〈 14화 〉싸움 구경도 치고받아야 재밌다 [1]
임무가 바뀌고 난 뒤로, 나는 심심할 때마다 가게를 방문했다.
뭐든 처음이 힘든 거지, 한 번 하고 나면 숨 쉬듯이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날은 점심을 먹고 바로 산에 올랐다.
대낮에 뭐하는 짓인가 싶겠지만, 이 근처에서 즐길 유흥거리는 이것뿐인 걸 어떡하겠는가.
조사할 때야 이놈들의 멍청함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구경할 때는 이것만한 구경거리가 없다.
이제 이 맛에 너무 익숙해져서, 마을에 있는 취객들은 멀쩡해 보일 지경이다.
더 웃긴 건, 이 시간에 가도 있을 놈은 있다는 거다.
주인장이 자는 시간 빼고는, 항상 등신들이 점거한 상태라는 거다.
"어서옵쇼~"
"뭐야. 오늘은 아무도 없네? 내가 너무 일찍 왔나?"
"아니, 한 사람 있어. 오줌 싸러 가서 자리에 없는 거야."
다시 보니 카운터석에 무심하게 놓여있는 하나의 잔이 보였다.
"허어, 그래? 일단 늘 시키는 걸로."
"예이."
제리스는 저녁쯤이 돼야 출근하고, 이 시간에는 주인장이 혼자서 가게를 본다.
반대로 말하면, 지금 제리스가 가게에 들어와서 꼬맹이의 옆자리에 앉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럼주 한잔과 꼬맹이의 스튜가 나왔다. 이제 이 녀석에게 주는 스튜는, 아예 용기의 크기가 바뀌었다.
"근데 저거 술 맞아? 냄새가 좀 좆같은데?"
맥주도 그 모양인데, 굳이 다른 걸 먹어 보지는 않아서, 무슨 술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기분 나쁜 냄새가 난다.
"아, 이거? 사과주."
"사과? 사과 냄새는 하나도 안 나는데."
"10년 동안 묵혀 둔 거거든."
"어우, 시발. 그럼 이거 썩은 내야?"
"글쎄. 냄새만 그럴 걸? 손님은 잘만 마시던데?"
과일주가 묵혀봤자 럼주만 하겠냐마는, 10년이면, 보통 과일주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것만은 분명하다.
"맛있다고 마셔주기만 하면 나는 상관없어."
혀를 내두를 만한 영업 방침이다.
"하, 시원하구만."
뒤에서 걸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월의 풍파를 맞아 허옇게 세 버린 짧은 흰머리와, 훈장이 가득한 깔끔한 정복. 은퇴한 군인인 모양이다.
자기 복무 경력에 대한 긍지라거나 그런 건 딱히 상관없는데, '나 때는' 만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
"처음 보는 얼굴이구만, 형씨."
할배의 낮은 목소리가 안부를 물어왔다. 딱 봐도 귀찮은 부류의 인간처럼 보이는데, 이런 인간을 상대할 때 좋은 방법이 있다.
"나도 처음 보는 얼굴이구만, 할배."
했던 말을 반복하면 된다.
"하하! 젊은 놈이 꽤나 패기가 넘치는구만!"
"하. 하. 늙은 놈이 꽤나 패기가 넘치는구만."
할배가 앉은 자리에서 가만히 노려봤다.
"나 바보다!"
"그래, 너 바보다."
한참을 고민하더니 하는 말이 저거다.
이 가게에 들어 올 자격이 충분하다.
"허허, 한방 먹었어. 머리 좀 쓰는구만 형씨."
병신.
"아니 뭘. 당신이 멍청했을 뿐이지."
"하하, 그런 말 자주 들었었지. 그보다 형씨, 굉장한 상이구만, 산전수전 다 겪어본 얼굴이야. 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말이야.."
관상, 손금 같은 점술들은 할배들의 필수 교양 중에 하나다.
평범한 인간들은 관심도 없는 분야의 지식이기 때문에, 이쪽으로 화제가 기울면 몇 시간 동안은 알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알고 있는 분야의 이야기를 듣는 걸 택하겠다.
"그것 보다 할배, 그거 어느 나라 정복이야? 그런 정복은 처음 보는데."
동대륙에 있는 국가들은 거의 다 돌아 봤다고 자부할 수 있는 나지만, 저 정복은 정말로 처음 보는 옷이다.
설마 이 할배, 자기가 만든 옷에 자기가 만든 훈장 붙여놓고 군인이라고 지랄하는 노망난 할배는 아니겠지.
"아니, 형씨. 대륙 평화 유지군이라는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나?"
"그건 알지. 그거 설마 유지군 정복이야? 걔네 군복만 있고 정복은 없잖아. 입는 놈들이라 해봤자 군인출신인 놈들밖에 없을 텐데, 그건 자기네 나라 정복이고."
"아, 거기까지 알고 있나? 그럼 설명하기 편하겠군. 흠흠!"
"100년에 한 번, 헤라나 왕국에서 마왕토벌대를 보내, 마왕이 동대륙으로 오는 것을 막고 있지 않나? 지금 기수가 20기였나.."
"어이! 정복 얘기에만 집중하라고."
시작하자마자 다른 길로 새려하다니, 별로 듣기도 싫은 이야긴데 집중까지 해서 들어야 할 판이다.
"아, 알겠네, 알겠네. 아무튼, 어느 날 나는 문득 생각했지, 계속 승리하고 있는 토벌대지만, 싸움인 이상, 천에 한 번, 만에 한 번은 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야."
"그렇게 되면 끝이라네. 정말 끝. 동대륙은 마왕군과의 전쟁으로 또 다시 피폐해 지겠지. 토벌대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들에게만 짐을 지우는 건 안일한 것이라 생각했다네."
"생각만 하다간 영원히 생각으로 끝날 것 같아, 나는 곧바로 조국을 뛰쳐나왔다네. 그리고 동대륙의 온 나라를 돌아다니며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지."
알고 있다니까 왜 처음부터 설명하고 있는 건데.
"한 명이 열 명이 되고, 열 명이 백 명이 되더니, 어느새 그 규모는 군 이라고 부를 정도로 커졌네. 그때부터 세계 각국에서도 물자와 금전적 지원을 약속하겠다는 서신들이 하나 둘씩 날아왔지."
그야, 국적도 없는 군대가 돌아다니고 있는데, 잘 못 보이면 어떻게 될지 뻔하니까 그렇지.
"온 대륙의 지원을 등에 업은 우리는, 동대륙과 서대륙을 잇는 유일한 육로, 전략적 요충지인 로그브릿지에 성을 쌓아, 그곳에 주둔하기로 했네. 마침 그 시기에 20대 용사도 우릴 통과해 갔지."
"다행히 용사는 무사히 돌아왔고, 그렇게 이번 대의 용사가 생환하자, 우리는 계획대로 조직의 체계만을 유지해 둔 채,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기로 했네. 마왕이 저지된 이상, 100년 동안 이러고 있을 이유는 없으니까 말이야."
군을 이룰 정도의 인간을 모아 놓고 곧바로 해체라니, 시간낭비도 이런 낭비가 따로 없다.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가던 우리를 반긴 건,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불타는 도시였네. 마왕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겠다 떠들어 댔지만, 정작 동대륙 내부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우리의 힘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전쟁을, 막지 못한 걸세. 앞만 볼 줄 알았지, 뒤는 볼 생각도 안했던 거야."
"우리는 이 이상 무고한 피가 이 땅에 흐르는 것을 볼 수 없었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샌가 분쟁지역에 뛰어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지."
"수많은 전투에 참여하며 많은 생명을 구했네. 하지만 그만큼 많은 동료들을 잃었지. 이 정복의 기묘한 색감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입고 있던 옷의 색들이고, 이 훈장들은 모두, 그들이 살아있었다는 증거일세."
할배가 훈장 하나를 쥐고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점점 분위기가 무거워져 간다.
내가 바라던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어떤 선택지를 골라도 개같은 결과밖에 없는 거냐, 이 할배는?
"그래서, 당신 이름이 뭔데? 유지군 창립자 중에 한 명이라면, 은퇴한지는 꽤 됐겠네."
떠오르는 말을 일단은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술맛이 떨어지는 것만큼은 피해야한다.
"아,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안했군. 몬드라고 하네. 죽기 전에 마왕군이랑 한 번 붙어보려고 여기까지 왔지."
"몬드? 몬드라고?"
미치광이 몬드. 대검 하나만으로 적진에 뛰어드는 정신 나간 전술을 구사하던 남자.
단지 그것만으로 미치광이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다면, 군인들의 절반이 그 소리를 듣고 있었을 거다.
그 남자를 미치광이로 만드는 건, 그가 지휘관이라는 거다. 그것도 총사령관.
자기 목 하나에 본인 목숨뿐 아니라, 전 군의 목숨을 함께 달고 있는 양반이 최전선에서 뛰어다닌다는 말이다.
아마 미치광이는 그나마 많이 순화된 표현일 것이다.
"그래. 그게 내 이름이다만?"
"그 양반, 잡병한테 활 맞고 죽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아, 그거 말인가? 은퇴식일세, 은퇴. 나도 나이가 들어서 말이지. 뒷일은 후배들에게 맡길까 했는데, 이놈이고 저놈이고 놓아 주질 않지 뭔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런 식으로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네."
하긴, 뭘 해도 죽지도 않던 남자가 활에 맞아서 죽다니, 누가 봐도 거짓말이다. 너무 거짓말 같아서 오히려 믿어 버렸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마왕군이랑 붙어보려고 왔다고? 할배 여기 온지 얼마 안 됐어?
"오늘이 처음이네만?
"이 술집에 마왕도 오는데?"
"뭐라고!!"
할배가 자리를 내려치며 소리 질렀다.
"요즘은 별로 못 봤는데, 오긴 와."
"지금이라도 대검을 챙겨와야겠군. 고맙네, 형씨."
남은 술을 한입에 비우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할배였다.
용사가 해치웠을 터인 마왕이 왜 살아있고, 왜 이딴 술집을 다니는지는 궁금하지 않은가 보다.
끼이익
"어서옵쇼."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마왕이 나타났다.
이 할배는 눈앞에 있는 게 마왕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대검을 들고 와서 어쩔 생각인지 모르겠다.
"아, 그러고 보니 형씨 이름을 못 들었구만."
"아."
갑자기 할배가 멈춰선 탓에, 맞은편에서 오고 있던 마왕과 부딪히고 말았다.
나는 술잔을 들고 의자를 돌려 앉았다.
곧,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는 싸움 구경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이, 그 쓸데없이 큰 덩치로 이 마왕님의 앞길을 막다니, 제정신이냐? 너."
아무리 그래도 여기에 저놈보다 정신 나간 놈이 있을까?
"아, 미안하네. 앞에서 사람이 오고 있는 줄은 몰랐.."
"잠깐, 방금 뭐라고.."
"앙? 이 마왕님의 앞을 막지 말라는 소리다. 늙은이."
후웅!
할배의 주먹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 여파만으로 근처의 테이블이 밀려나갈 정도의 위력이었다.
하지만 마왕은 이미 할배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뒤였다.
"뭐하는 짓이야, 늙은이! 여기 규칙 몰라?"
마왕이라는 놈이 규칙을 준수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만큼 흰놈의 무력도 엄청난 수준이라는 거겠지.
"그래, 니가 바로 마왕이군.. 천 년이 넘도록 동대륙의 평화를 위협하는 놈이, 바로 너라는 말이지."
할배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흐리멍텅했던 눈은, 날카롭게 벼려진 검과도 같이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고, 이완되어 있던 근육들은 곧바로 전투태세에 들어가, 상대를 분쇄할 힘을 자아내고 있었다.
"평화를 위협?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용사니, 토벌대니, 이상한 놈들을 보내와서는, 가만히 있는 사람 목을 내놓으라질 않나, 낡아 빠진 성에 바람이 들길래 보수 좀 하려니까 냅다 달려와선 부수질 않나, 너희들이야 말로 날 좀 내버려 두란 말이다!!"
후웅!!
그로부터 할배의 공세가 끝날 때까지의 수 분간, 가게에서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규칙을 지키려는 마왕은, 반격도 하지 않고 이리저리 피하기만 했다.
"주인장, 저거 안 말려도 돼?"
치고받고 싸우질 않으니 영 재미가 없다. 오히려 바람 소리만 시끄러워서 이젠 그냥 빨리 끝났으면 한다.
"아 괜찮아, 괜찮아. 저러다 하나 부수면, 오래된 것들 한 번에 싹 다 바꿀 수 있거든."
애초에 이렇게 싸워도 주인이라는 놈이 안 말리는데, 규칙은 뭔 규칙이냐.
"허억.. 허억.. 왜 피하기만 하는 거지? 날 놀리는 건가?"
할배가 주먹에 힘을 주었다.
"하아.. 너희들은 싸우다 걸려도 몇 대 맞고 말겠지만, 나는 진짜로 그놈한테 죽는단 말이다. 때리고 싶어도 때릴 수가 없다고!"
마왕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눈까지 부라리는걸 보니 어지간히 비통한 모양이다.
"목격자만 없으면 진작에 때렸지. 점주는 딱히 일러바치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상관없는데, 저 두 명이 보고 있잖아!"
마왕이 꼬맹이와 나를 가리켰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들고 있던 럼주를 홀짝거렸다.
"부탁이니까 나가주면 안 되겠냐? 나 진짜 이 노친네 때리고 싶다."
"나도 부탁하지 형씨."
"싫은데? 너네가 나가서 싸우지 그려냐."
나는 중지를 내밀었다.
"아! 나가서 싸우면 무조건 걸린다고! 이제 그 녀석도 올 것 같은데, 괜히 내려와서 이 고생을 하네, 정말."
진짜 왜 온 거냐 너.
"대체 그 녀석이 누구길래 아까부터 그렇게 벌벌 떠는 거지?"
할배가 물었다.
"너 진짜 여기 처음 온 거냐?"
"그렇다만."
"그러니까 이러고 있겠지! 잘 들으라고. 여긴 지크라는 괴물 녀석이 정한, 한 개의 규칙이 있어. 단 한 개!! 가게에서 무력을 쓰지 않는 거지. 그걸 어기면 그놈이 직접 처분 한다고 했으니, 뭘 당할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죽인다고 했다고!! 이래도 내가 싸우고 싶겠냐!!"
"그래, 그 자에게 규칙을 어긴 걸 들통 나는 게, 내 주먹에 맞는 것 보다 더 치명적이라는 거군.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때릴 생각은 하지 않겠다."
"후, 노친네가.. 드디어 알아먹었군."
마왕이 안심한 듯 긴장을 풀었다.
"니가 끝까지 피할 생각이라면, 나도 더 이상 맞추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겠다. 그 지크라는 자가 왔을 때,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만 하면 될 일이니까 말이야."
후웅!
할배는 다시 한 번 주먹을 휘둘렀다.
"이 녀석..!"
긴장을 풀고 있었던 탓에, 마왕의 회피가 한 박자 늦어졌다. 치명상은 피했지만, 왼팔을 타고 흐르는 핏줄기가 보였다.
지금 궁금한 건, 이 싸움의 결착보다, 흰놈이 이 싸움을 목격 했을 때다.
아직 가게에 오지 않았다는 건, 맨 정신인 상태의 멀쩡한 흰놈일 거고, 멀쩡한 상태의 흰놈은 마왕도 겁낼 정도의 괴물이다.
과연 만전의 흰놈이 얼마나 강하기에, 등신들이 그렇게 규칙을 잘 지키는지 알 수 있는 기회다.
할배는 계속 주먹을 휘둘러, 체력적으로 힘든 상태일 텐데도, 위력은 약해질지언정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끼이익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