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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화 〉싸움 구경도 치고받아야 재밌다 [2] (15/108)



〈 15화 〉싸움 구경도 치고받아야 재밌다 [2]

끼이익

문이 열렸다.


싸움 아닌 싸움을 치르고 있는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나조차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러나 곧, 그들은 알게 되었다.


귀가 듣지 못해도, 눈이 보지 못해도.

근육의 경직이, 살갗의 떨림이, '두려움' 이라는 감정을 온몸으로 전달했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

그것은, 물음이 아니었다.


적막이 뒤덮어 버린 공간에, 살기가 비집고 들어와, 순식간에 적막의 자리를 밀어내며 공간을 가득 채웠다.

위화감과 별반 다를  없는 흔해빠진 살기와는, 그 농도부터가 다르다.

부릅뜬 눈에서는 이미 조각난 상대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숨을 쉬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시간만이 흘러갔다.

그리고..

쾅!

한 번의 깜박임, 찰나의 순간.

할배와 마왕을 바라보고 있던 내 눈에 비치는 것은, 먼지만이 남은 마룻바닥뿐이었다.

먼지의 근원지중 하나인 오른쪽 벽에는, 정신을 잃은 할배가 박혀 있었고, 그 반대쪽에는 마찬가지로 벽에 박힌 마왕과,  목을 쥐고 있는 흰놈이 서있었다.

"오랜만이군, 나디아. 몇 년 만이지? 그동안 사람을 한명도 못 죽이니, 슬슬 손이 근질거리나?"


흰놈은 잡아챈 목을 더욱 강하게 죄었다. 마왕은 고통스럽게 호흡하며 발버둥 쳤다.

"켁..켁! 자, 자까만.. 난 안 싸웠어..!  싸웠다고..!"


"안 싸웠다고? 웃기지 마라. 여기 흩어진 테이블과 금간 벽들을 보고도 그 말을 믿으라고? 내가 말했지. 내 눈앞에 나타나는  괜찮아도, 규칙을 어기면 죽여버리겠다고."

흰놈의 품속에서, 언젠가 봤었던 정체불명의 정육면체가 빠져나왔다.

27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그 정육면체는, 스스로의 힘으로 공중에 뜬 채, 빛을 내며 무규칙 적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저, 저기 모, 목격자..!"

마왕이 다급하게 팔을 흔들며 나를 가리켰다.


흰놈과 눈이 마주쳤다.

"이 녀석의 말이 사실이냐?  마왕이라고 불리는 쓰레기 녀석의 말이 사실이냔 말이다."

말하는  보니 그냥 죽이고 싶은 거구만.


그래도, 일단은 발언권이 주어졌으니  번 생각해보자.


내가 거짓말을 하면? -> 마왕은 죽는다. -> 가게에서 가장 멍청한   하나가 사라진다. -> 볼거리가 줄어든다. -> 심심해서 죽는다.

확실히, 조사할 땐 저놈만큼 짜증나는 게 없었는데, 구경꾼 입장으로 볼 때는 저놈만한 광대가 없다.

죽이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려면 조금  일찍 물어봤어야지.

"그래. 그놈은 피하기만 하더라."

흰놈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는 이내 손을 놓았다.


바닥으로 떨어진 마왕은, 목을 어루만지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으허엉, 고마어어, 고마워어어."


그러고는 네발로 기어와, 내 다리를 붙잡고는 흐느꼈다.


"무슨 양심이나 도덕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조만간 이 쓰레길 구해준 걸 후회하게  거다."


이미 후회하는 중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지?"

흰놈은 자신이  앉는, 카운터석의 끝자리에 앉았다.

"다 말해주긴 귀찮고, 궁금한 것만 물어봐라."


나는 럼주를 한 모금 홀짝이며 답했다.

"건방진 놈이군. 너한테는 방관한 죄가 있다는  잊지 마라."


흰놈의 눈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바보 하나  죽인 게 그렇게 아니꼬운가 보다.


마왕은 어느샌가 내 의자 뒤로 몸을 숨겼다.

"방관은 무슨, 내가 저놈들을 말릴  있었으면, 저 등신같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술을 마시고 있었겠냐? 대가리가 있으면 생각을 좀 해라."

"맞다, 맞아!"

마왕이 추임새를 넣었다.

흰놈이 노려보자, 다시 움츠러들어선 더 깊숙한 곳으로 숨었다.


"좋다.  보기에도 약골인  같으니 이해해주지. 그럼 먼저 공격한 건 저 늙은이인가?"

"어."

"그럼 먼저 시비를 건 사람은 누구지?"

"그냥  할배가 먼저 치던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


"도대체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하나도 모르겠군."

나한테 물어서는 끝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지, 흰놈은 벽에 박혀있는 할배에게로 갔다.

"어이."


대답이 없다. 죽은 것일 지도 모르겠다.


흰놈은 상관하지 않고 할배의 복부를 걷어찼다.

노인공격이라 볼 수도 없는 게, 실제 나이는 저 흰놈이 더 많다. 어떻게 살아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쿠헠! 콜록, 콜록!"

그래도 역시 힘보다 빠른 해결 수단은 없다. 이게 바로 한방치료라는 놈인가 보다.

"어이, 한 번만 물을 테니  대답해라. 알겠나?"

"으으욱 으어억."

할배는 실컷 얼굴을 구기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왜 가만히 찌그러져서 살고 있는 놈한테 다짜고짜 주먹을 휘두른 거지?"


"콜록, 콜록. 가만히 있다고..? 저 놈 때문에 100년마다 차출되는 동대륙의 젊은이들과,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정말 모르고 하는 말인가?"

"흠. 아무래도, 오늘 여기에 처음 왔나 본데, 이 녀석은 300년 전에 이미 그럴 힘을 상실했다. 토벌대는 겉치레일 뿐이고."

"그게.. 무슨.."


"뭐 하나 아는  없는 늙은이로군. 여기서 저놈을 죽이면 동대륙이 평화로워 질 거라 생각했나? 실제로 저 녀석이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데도 동대륙은 그 꼴이다. 결국 상대가 누가 됐든 간에, 동대륙은 전란에 휩싸일 운명이란 거다."


퍽!

"..!!!"


할배의 얼굴에 핏발이 바짝 섰다. 미치광이라고 불렸던 남자조차도 감당하지 못하는 주먹인가보다.


"초범이니 이정도로 봐주지. 그리고 니가 걱정하는 일은 앞으로도 절대 일어날 일 없으니, 바보같이 술이나 마시던지, 동대륙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나 걱정해라."

흰놈의 말을 다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끙끙 앓던 할배는 이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나디아."


마왕은 호명된 것만으로도 벌벌 떨었다.


"규칙은 저 늙은이만 어긴 것 같으니, 이번은 봐주겠다."


"지,지진짜..?"

"내가 너처럼 거짓말 하는   적 있나?"

"아,아니 없지. 그, 그럼 일단 좀, 아, 앉을까ㅡ"

마왕이 의자 뒤에서 기어 나와, 눈앞에 보이는 의자에 착석했다.

저긴 마법사가 앉는 자리긴 한데,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자기 자리정돈 알아서 챙기겠지.


"후우. 살려줘서 정말 고마워. 답례로 여기서 곤란한 일이라도 있으면 말만해. 내가 해결해 줄 테니. 나 마왕이야, 마왕. 이 서대륙의 지배자라고."

흰놈이 들을까봐 눈을 돌려 확인하는 마왕이었다.

"그 대륙의 지배자가 일개 인간한테 쫄아도 되는 거냐?"


"으,으응.. 저 녀석은 예외야."


"도대체 저놈이 얼마나 강하길래 그렇게 쪼는 거냐?"

"300년 전만 해도 저렇게 강한 녀석은 아니었어. 그때는 오히려 내 힘이 가장 강할 때였지. 우욱. 그때 내가 그러지만 않았어도.."

"구라 치지 마. 무슨 병신같은 짓을 했길래 관계가 이렇게까지 역전 되냐?"

"우욱. 아, 미안.. 그때만 생각하니 구역질이.. 간단하게 말하면, 내가 저 녀석을 저렇게 강하게 만들어 버렸어."


병신 맞네.


"강하든 말든.  부활할 수 있다며? 죽지도 않는 놈이 약한  하면서 찡찡대긴. 몇 십 대를 맞아도 한 대만 맞추면 이기는데, 그걸 못하냐?"


"나도 처음  녀석에게 죽었을 때 그렇게 생각했지. 근데 문제가 뭔  알아?"

"뭐?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라."


"나는 죽지 않는 '불사'가 아니라, 죽어도 살아날 수 있는 '부활' 이라는 거."

그게 뭐가 다른데.


"'그게 뭐가 다른데' 라고 생각하고 있지? 엄연히 다른 거라고, 다른 거! '부활'은 살아날 때까지의 공백이 있잖아. 내가 의식이 없는 동안 상대가 뭘 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왜 나한테 신경질인데, 이 새끼야. 맞고 싶냐?"


"어어으, 미안."


팔을 들어 올리자 마왕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보호했다.


"아, 아무튼, 지크는 그 공백의 시간에 내 무장을 해제하고, 이상한 곳으로  옮겨 놓았지. 빛도, 소리도, 한 줄기만이 겨우 들어오는 기분 나쁜 곳. 거기서 내가 무슨 짓을 당한 줄 알아?"


마왕이 자조하듯 코웃음을 쳤다.

"죽고, 죽고, 죽고, 또 죽었어.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공격하는지, 그런 걸 확인할 생각도, 시간도 없어. 눈을 뜨면 죽고,  눈을 뜨면 죽었으니까."

"그걸  달 동안 당했어. 의지가 꺾이기엔 충분했지.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제발  짓을 끝내달라고 애원했어. 그때 지크가 뭐라고 했는지, 전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직 조금 남았다고 했던 건 기억해."

"몇 주간의 죽음을 더 맛보고, 모든 무장을 몰수당한 뒤에야, 난 풀려날 수 있었지. 그리고 300년 동안  지크가 시키는 대로 살아왔어. 전쟁을 멈추고, 공식적인 지배자 자리에서 물러났지."

"뭐? 그럼 토벌대는 여기에 왜 오는 거냐?"


사실상 300년 전에 대륙 간의 전쟁이 끝났다는 말인데, 어째서 토벌대는 그걸 왕국에 알리지 않는 거지?

"아~ 그 녀석들? 올 때마다 표정이 가관이었지. 죽은 줄 알았던 지크가 살아있고, 혈전을 치를 줄 알았던  몸이 선뜻 목을 내어주니 말이야."

"저놈이 시키는 대로?"

"그래."


"목을 내줬다고?"


"그래. 이젠 그냥 그 녀석들이  시기가 되면, 미리 머리를 잘라놓고 포장까지 해서 줘."

"허."

흰놈이 무슨 이유로 그렇게 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 알게  건 있다.

토벌대도 모집하지 않고, 혼자만의 힘으로 마왕을 무찌르고 돌아와 역대 최강의 용사라고 불리던 시트린의 전설이 모두 사기였다는 것이다.


편안한 삶이 보장돼 있는데도 이곳으로 도망치듯 온 건 쪽팔려서인가?


그럼 양심이라도 있지. 18대 19대 토벌대는 대체 뭐하는 새끼들이냐? 뻔뻔하게 뒤질 때까지 영웅 행세나 하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시트린을 못 본지도 꽤 된 것 같은데. 그 녀석이 만나자는 시간대는 거의 지크도 가게에 있을 시간이라  꺼려진다고. 원래  오지도 않더니 요즘 들어 갑자기 자주 온다니까, 저 녀석."


용사라면 곧 가게에 올 시간이긴 하다. 마왕이 있으니 오늘은 밤새도록 마시겠지.

끼이익


말하기가 무섭게 누군가 온 모양이다. 용사일 수도 있지만, 다른 바보들도 기어오는 시간이기 때문에,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

"안녕하세요~ 어, 오늘은 나디아씨도 계시네요? 오로넬씨도 안녕하세요? 데이린도 안녕~"

생각해 보니 변태도 출근할 시간이었다.

"이야, 오로넬씨와 나디아씨가 친분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한 번도 같이 계신  본 적이 없는데."

"아니. 그냥 이 녀석이 내 옆에 앉아 있는 거야."

"아, 그러셨군요."


"에이~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나, 오로넬. 내 목숨을 구해줬으니 친구라고 말해도 좋다고?"


웬만한 개소리면 반응이라도  주겠는데, 이건 도를 넘었다.  같은 새끼랑 친구? 대답할 가치도 없다.


"어이, 제리스. 오면서 용사 못 봤냐?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빨리 용사한테 떠넘기고 술이나 마셨으면 좋겠다.


"그러게요. 저보다 먼저 와 계실 줄 알았는데."

"이 쓸모없는 용사새끼. 필요 할 땐 존나 안 보여요."


"누가 나를 부르는가!!"

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가게 문이 쓰러졌다. 아니, 부서졌다고 하는 게 더 옳은 말이다.


그 부서진  위에, 용사가 서있었다.


"고쳐라."

주인장이 식칼을 들고 단호하게 요구했다.


용사는 언제 부서졌냐는 듯, 놀란 눈으로 문을 쳐다보더니, 조각이 난 문들을 다시 하나로 만들려 애썼다.

"아~ 멋있게 들어가려고 했는데 모양만 빠졌네. 그래서 누가 나 불렀어?"

용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났다.

용사가 왔는데 옆에서 뭘 하고 있나 했더니, 주문할 술과 안주를 고르고 있는 마왕이었다.


이놈들은 한 번에 한 가지 이상의 일을 하면 죽기라도 하는 건가?

니가 찾던 용사가 왔으니, 둘이서 손잡고 어디로라도 사라지란 말이다.


팔꿈치로 마왕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아악!! 뭐야!?"

생각보다  호들갑이다. 귀청이 떨어질 뻔 했다.

"어, 뭐야. 나디아잖아? 오랜만이다!"

"응? 시트린? 크흠! 흠. 오랜만이구나, 용사여. 기다리고 있었다."

용사를 발견한 마왕은, 정해진 수순인 것처럼 자연스레 대사를 읊었다.


이 뻘짓거리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훗, 오늘은 봐주지 않겠다, 마왕."

"니가 내 전력 앞에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간다아아앗!!"

제리스에게 저지당할 미래가 나한테만보이는 건지,  등신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소리를 질러댔다.

-건배!!

-하하하하!!

등신은 등신을 끌어당긴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평소엔 얼굴도 비추지 않던 등신들이 줄을 지어 가게에 찾아왔다.


-조용히 하세요, 손님!


덕분에 제리스만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저놈이 뭐하는 놈이라고?"


술에 절은 마법사가 물었던 말을 되풀이했다.


"뭐긴 뭐야."


-마셔, 마셔!

-하하하!!


맞은편에는 깔깔대며 바닥을 구르고 있는 용사와 마왕이 보였다.


새삼스레 저렇게 살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을 한다.

"여기서 제일 등신 같은 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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