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등신들은 뭘 해도 즐겁다 [1]
"흐어어..!"
기분 죽이네.
겨울철의 따뜻한 물은 언제나 옳다. 따뜻한 차도 그렇고, 뜨끈한 국밥도 그렇고, 따뜻한 온탕도 그렇다.
"흐아.. 몸이 녹아내리네요."
제리스는 탕의 난간에 팔을 걸치고 천장을 향해 머리를 꺾은 채로 앉아 있다.
천장을 보고 싶으면, 한 칸 내려와서 난간에 목을 기대면 되는데, 괜히 힘을 빼고 있다.
"어~이, 할배. 괜찮아? 면상 터질 것 같은데? 힘들면 뻗대지 말고 나가시지? 당신 죽어. 진짜로."
이렇게 좋은 날을 마음껏 즐기지 못하는 이유는, 젊은 놈들에게 지지 않는다며 탕에서 농성중인 저 노친네 때문이다.
"이봐 오로넬. 자네 날 뭘로 보나? 얼굴이 빨간 건 더워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원채 부끄러움이 많아서 그런 거라네. 사람들 앞에서 홀라당 벗고 있으려니 부끄럽구만."
처음 봤을 때도 멀쩡한 할배는 아니었지만, 자기가 서대륙으로 오게 된 목적을 잃어버리게 되면서 나사가 몇 개는 더 빠졌다.
"오히려 자네들이야 말로 괜찮은가? 저쪽 금발 형씨는 벌써부터 힘든 것 같네만? 요즘 젊은이들은 이런 것 하나 못 버티고 말이야. 내가 젊었을 때는 탕 같은 건 없어서 못 들어갔지. 한번 들어가기만 하면 그날은 만사를 탕 안에서 해결했다고."
"어휴, 그럼 하루 종일 거기 있으쇼. 똥오줌도 거기서 해결 하시고."
그놈의 '나 때.' 노인네들의 문제가 이거다.
말하는 상대와 같은 시간 선에서 이야기를 해야지, 언제까지고 과거에서 섀도우 복싱이나 하고 있다.
제리스도 좋지 않은 기운을 감지했는지, 나를 따라 냉탕으로 넘어왔다.
"으으! 존나 차갑네. 뜨거운 물에 그렇게 있다가 왔는데 왜 이렇게 차가운 거냐?"
"으으흐..! 글쎄요, 그런 건 시오 씨가 잘 아시지 않을까요?"
"그러고 보니 너, 여탕 훔쳐본다거나 그딴 개소리 안 하네? 하면 던지려고 짱돌도 주워 놨는데."
여탕과 남탕은 아예 벽으로 막혀 있어서 훔쳐보려면 벽을 부숴야 하지만, 이 근성의 변태라면 시도 정도는 해 볼줄 알았다. 건너편에 꼬맹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진짜! 데이린은 지켜줘야 할 귀여운 동생일 뿐이지, 그런 불순한 마음은 전혀 없다구요!"
"그래?"
"네! 오히려 훔쳐보려는 놈이 있었다면 제가 묵사발을 내 놨을거에요."
"진짜?"
"네!! 진짜라니까요!"
눈에 핏발이 곤두선 게, 한 대 칠 기세다.
"아이, 그냥 물어 본 거야. 왜 그렇게 정색을 하냐? 조만간 한 대 치겠어?"
"오로넬 씨가 이상한 걸로 의심을 하시니까 그렇죠!"
"아 알았어. 화 풀어, 화 풀어. 이것도 버릴 테니까."
보이지 않게 숨기고 있던 돌을 탕 밖으로 던졌다.
쨍그랑!
거울이나 유리에 부딪힌 모양이다.
"좆됐네."
유리조각이 있을지도 모르니, 사실상 저쪽으로 가는 것은 봉인 됐다.
"저.. 오로넬씨? 저거.. 짱돌이라기 보단.. 수, 수박인 것 같은데요..? 그보다 어떻게 숨기고 계셨던 거에요?"
"처음부터 짱돌이 아니라 짱 돌이라고 했잖아. 돌중에 짱이라고."
"아, 아.. 그렇구나.. 짜, 짱 돌이구나.. 저 정말 죽을 수도 있었네요?"
"뭐, 사람 운명은 한 치 앞도 모르는 거니까."
"그, 그렇죠? 아, 아무튼 지금은 살아 있으니까요!"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보기 좋네."
"하하! 목욕은 잘들 즐기고 있느냐! 이제 이 몸이 얼마나 위대한지 잘 알겠지!"
장소 제공자인 마왕이 나타났다.
"위대한지 아닌지는 내 알바 아니고, 수건이나 좀 감아라."
아무리 자기 성인 데다가 목욕탕이라지만, 자연의 모습 그대로 돌아다니는 건, 보는 사람이 불쾌하다.
"우리들의 신, 블랙베리님께서 하사하신 이 몸에 창피한 것도, 숨길 것도 없다!
"하긴, 존나 작아서 숨길 필요도 없네."
"ㅁ, 뭐?! 감히 왕의 욕실을 사용하고 있는 주제에 왕을 모욕해!?"
"야, 일어나봐."
나는 제리스를 일으켜 세우곤, 허리에 감겨져 있는 수건을 빼앗았다.
"아! 뭐하는 짓이에요! 돌려주세요, 오로넬 씨!"
"자, 이제 알겠냐? 니 수준을. 너 정도면 동대륙에서 촌장도 못 하겠다."
한낱 잔디밭에 지나지 않던 마왕은, 제리스의 밀림을 보고는 굳어 버렸다. 기분 탓인지 왠지 더 움츠러든 것 같기도 하다.
"하.. 하! 크기가 다가 아니라고! 시, 실전에서 중요한 건, 기술이지, 기술!"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깨에 걸친 수건을 조심스럽게 하반신에 두르는 마왕이었다.
"아 됐으니까 빨리 수건이나 돌려 달라고요!"
제리스가 수건을 낚아챘다.
"그나저나 성도 존나 크더니 탕도 존나 크네."
가게 뒤편에 있는 절벽을 올려다보면 어렴풋이 보이던 성이 마왕성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훗, 뭐든 큰 것이 왕의 위엄을 더 잘 보여줄 수 있지."
"근데 거기는.."
"그건 이제 그만 하라고!"
마왕이 신경질을 냈다.
"다시 한 번 초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나디아 씨."
"너희가 너무나도 목욕을 하고 싶어 하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길래 말이야. 아무리 나라도 그걸 못 본 척 할 순 없었지."
지랄.
그냥 오늘 좀 춥다는 한 마디에,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 성에 있는 탕이 크다면서, 놀러 오라고 여기저기 찌르고 다닌 주제에.
"이제 좀 추운데? 저기에 다시 가기는 너무 뜨겁고. 뭐 야외 탕 같은 건 없냐?"
물에 꽤나 오래 있었는지 손가락이 쭈글쭈글하다. 수증기까지 더해지니 몸이 더 무거워 지는 느낌이다.
"야외? 아, 그럼 좋은 곳이 있지. 따라와."
마왕을 따라 쓸데없이 넓은 목욕탕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서서히,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 앞에 야외 탕이 있는 모양이다.
"여기야."
"이게 야외 탕이냐? 부서진 탕이지."
마왕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곳은, 확실히 관점에 따라선 야외탕이긴 했다.
무너진 벽 너머로 바람이 불어오고, 바깥 풍경이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 아니. 잘 봐. 이렇게 하면.."
쿵!
마왕이 탕에 앉아서도 바깥이 보일 수 있게, 균열을 더 크게 만들었다. 원래 부셔져 있던 구멍의 크기가 창문이라면, 대문 정도의 크기로 말이다.
"짠."
"와아아.."
제리스가 영혼 없이 박수를 쳤다.
첨벙!
마왕이 벽을 때린 탓인지, 구멍 말고도 탕 옆에 있는 약한 벽들의 윗부분이 부서지면서 탕으로 떨어졌다.
"에이 씨, 일단 저거부터 치워."
그래도 할배가 있는 탕으로 돌아갈 바에는 여기에 있겠다는 심정으로 파편들을 정리했다.
마왕도 자기가 부순 파편이라서인지, 묵묵히 작업을 도왔다.
"야, 근데 이 연기는 뭐냐?"
균열이 간 벽에서, 이곳의 수증기와 비슷한 농도의 연기가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의 정체를 알아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뭐야, 저거? 벽에 왜 금이 가지?'
건너편에서 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저기 혹시 남탕이야? 어~이 거기 누구 있어ㅡ?'
용사의 목소리가 탕 안에 울려 퍼졌다.
당연히 남탕이고 당연히 누가 있지. 몰라서 묻는 건가 저 등신은?
"시발."
울지도, 웃지도 않는 제리스와 마왕을 바라보며,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오로넬 목소린데?'
저놈은 귀도 좋다.
'그러니까 여기가 남탕인 거지? 그럼 이걸 이렇게 하면..'
'자, 잠깐! 시트린!'
"응? 쟤네들 뭐 하고 있는 거냐?"
쾅!
-으아아악!!
굉음과 함께 부서진 벽의 파편이 비수처럼 쏟아졌다.
방어구라곤 하반신에 걸친 수건 한 장이 전부인 남자들은, 탕 안으로 뛰어들어 그것을 피해야만 했다.
"어, 진짜네."
여기가 남탕이라는 걸 추호에도 몰랐다는 목소리였다.
"진짜는 무슨! 사람 죽일 일 있냐!
"응? 뭐야, 왜 나디아만 있어? 다른 두 명은?"
"무슨 소리야. 저기 있잖아."
"헛, 어머.."
저 멍청한 년이 자기도 수건 한 장 밑으로는 알몸이면서, 대체 뭘 보고 '어머'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일어나서 설명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제리스를 재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으읅..! 오로네..씨.. 대체.. 왜..!"
벽이 부셔진 그 순간, 이놈의 눈에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희열을 엿보았다.
꼬맹이를 지키느니 뭐니 실컷 주절거렸지만, 말로는 뭘 못하겠는가? 난 내 두 눈만 믿는다.
"악의는 없다, 제리스. 목욕이 끝나면 깨워주마."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을 수는 없다.
이만하면 땀도 많이 뺀 것 같으니, 잠시 쉬게 해 주자.
"크그긁..!"
"여, 여긴 여기대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광경을 지켜본 마법사가 중얼 거렸다.
"묻지 마라.. 공익을 위해서다."
나는 최소한의 예의로, 기절한 제리스의 허리에 수건을 다시 감아 주었다.
"우와, 여기는 경치도 좋네. 술까지 마시면 딱이겠는걸?"
용사가 깨진 벽 밖을 보며 술을 찾기 시작했다.
역시 이 인원으로 모이면 어떻게든 술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아니 꺼지라고. 여기 남탕이잖아. 안 보여?"
그래도 선이라는 게 있다. 뭐가 아쉬워서 이딴 년놈들이랑 알몸으로 술을 마셔야 하는가.
"응? 어차피 우리 밖에 없는데 상관없잖아."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년이다.
말은 알아 처먹는 마법사와 이야기를 하려했더니, 이년은 또 이상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아~ 확실히, 수건 한 장 두르고 있는 여자들이랑 술 마시면 좀 꼴릴 것 같긴 하다. 그치 오로넬?"
뭔 말을 하나 했더니, 괜시리 또 시비를 거는 것이었다.
왜 매번 털리면서 시비 거는 걸 멈추지 않는지, 도전정신이 끊이지 않는 년이다.
"뭐 볼게 있어야 꼴리지. 원숭이를 보고 꼴리겠냐? 아무튼, 들어올 거면 하나만 확실히 해라. 아무도 너희들 보고 들어오라고 한적 없다? 너희가 억지로 들어온 거지."
"아니, 우리밖에 없다니까 그러네? 뭐 변명할 사람이라도 있어?"
용사가 다시 한 번 큰소리로 강조했다.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어떻게 알고. 어디 두고 보라지.
"그럼 술도 마실 거야? 정말로?
"마시자, 마시자. 빨리 그거 해 봐, 나디아."
용사의 거듭된 요청에, 마왕이 마지못해 손뼉을 두어 번 치자, 부하 한명이 달려왔다.
해골 가면을 쓴 건지, 진짜 해골인 건지, 아무튼 해골의 형상을 하고 있는 놈이었다.
"자, 받아, 받아."
다시 돌아온 해골의 품에는 술과 잔들이 있었고, 용사는 능수능란하게 술을 따고, 잔을 돌렸다.
어째서 이렇게 능수능란한지는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으~ 탕 안에서 마시니까 한잔 만에 어지럽다."
듣고 보니 그렇다. 술 자체는 그렇게 독한 술은 아닌 듯한데 말이다.
"이번엔 내가 돌릴게. 자, 오로넬 먼저 받아."
마법사가 술병을 내밀었다.
"멀잖아, 좀 가까이 와봐."
"이럴 거면 다른 놈이 따르게 하지, 왜 사람 귀찮게 하는 건데?"
옆에 있는 용사가 몸을 비켜줘서, 그렇게 많이 이동 하진 않았지만, 물에서는 움직인 거리보다,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귀찮은 일이다.
"응? 더 줄까?"
3할 밖에 따르지 않아놓고 더 필요하냐고 물어보는 마법사.
벌써 맛탱이가 가버린 건가? 하고 생각하는 찰나에, 마법사의 손이 몸을 가리고 있는 수건을 노골적으로 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까 전의 싸움이 아직도 이어지는 줄 아나 본데, 그건 내 카운터펀치로 끝나지 않았던가? 한 대로는 정신을 못 차는 놈이다.
"대체 어디까지 내려야 가슴이 나오는 건데? 집에 두고 온 거 아니냐? 나올 기미가 안 보이는데?"
마법사의 웃는 얼굴에 금이 갔다. 좆같아도 맞받아칠 말이 없는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나의 승리다.
"빨리 따르기나 해. 마시게."
꼽을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 그래.. 그래야지."
승리의 미주는 언제나 달달하다.
"어? 왜 여기에 있어?"
그렇게 몇 잔이 지났을 무렵, 무너진 벽에서 꼬맹이가 나타났다.
아까부터 뭔가 위화감이 들었었는데, 이 녀석이 없어서였나 보다.
"오로넬이 성별에 안 맞는 곳에 들어가면 변태라고 했어."
맞는 말이다. 나를 따라서 남자 탈의실로 들어오려는 꼬맹이한테 했던 말이지.
용사와 마법사가 날 쳐다봤고, 나는 어쩌라는 거냐는 얼굴로 맞받아 쳤다.
"시오도, 시트린도, 변태였어."
"아 데이린, 이건 그게 아니라.. 그 그.."
경멸하는 꼬맹이에게 가장 먼저 자기변호를 시작한 건 용사였다. 하지만 빨랐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 녀석의 화술로는 이 꼬맹이조차 납득시키지 못 했다.
"이건 혼탕이라는 거야, 꼬마야."
그래도 의미는 있었다. 마법사가 머리를 굴릴 시간을 벌었으니 말이다.
"혼..탕..?"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들어갈 수 있는 탕이지. 그래서 여기는 벽도 없는 거야."
바로 앞에 박살이 난 벽의 잔해가 있는데, 잘도 이빨을 턴다.
"그러고 보니 여기만 벽이 없어. 진짜 들어가도 되는 거야?"
"물론이지. 빨리 와, 같이 왔는데 같이 놀아야지."
"맞아, 여기 오면 먹을 것도 준데. 가능하지 나디아? 가능하다고 말해."
"어, 어.. 가능 하지."
두 변태는 꼬맹이가 경계를 넘게 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자신들이 현재 남탕에 있다는 사실을 바꿀 수 없으니, 꼬맹이도 남탕에 들이겠다는 생각이다.
그런다고 자신들의 무엇이 구원받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먹을 거?"
당연하다는 듯이 먹을 것에 반응하는 꼬맹이.
사실, 처음부터 먹을 걸로 유혹 했으면, 쓸데없는 소리는 안 해도 됐을지도 모른다.
"그래, 빨리 와 데이린."
"빨리 와 꼬마야."
1초 동안의 심사숙고 끝에, 꼬맹이는 당연히 이쪽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그때.
"앗..!!"
꼬맹이의 놀란 목소리에, 모든 등신들이 뒤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