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등신들은 뭘 해도 즐겁다 [2]
"앗..!"
먹을 것을 위해 힘찬 걸음을 내딛던 꼬맹이는, 걸음을 때자마자 벽의 잔해에 걸려 넘어지고 있었다.
자고 있을 때는 집어 던져도 낙법을 써서 착지하더니, 정작 맨 정신일 때는 허공에서 팔을 허우적대고 있었다.
한편, 용사의 몸은 이미 탕의 절반은 빠져나가 있었다. 소리가 들리자마자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미쳤다고밖에 할 수 없는 반응속도다.
사실, 저기서 넘어져도 다칠 놈은 아니지만, 그건 직접 확인 한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전력을 다해 질주하는 용사였지만, 이미 꼬맹이의 얼굴은 바닥과 부딪히기 직전이었다.
저기서 아무리 더 빨리 달려간다 해도 저걸 구하는 건 무리다.
꼬맹이가 넘어지는 것은 그렇게 확정된 것이었다.
그때였다.
턱.
"숙녀의 몸을 지키는 것은 신사의 의무. 괜찮니, 데이린?"
의문의 신사가 나타나 꼬맹이의 몸을 받아냈다.
마치 제리스를 닮은 것 같은 의문의 신사는, 어찌나 빨리 달려 온 것인지, 허리에 감긴 수건도 날려먹고 왔다.
충격에 대비해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다시 뜨기 시작하는 꼬맹이.
하지만 저 각도면, 싫어도 '그것'을 볼 수밖에 없다!
"으아아아!!"
이를 악 물고 달려오는 용사! 과연 꼬맹이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부딪힌다!! 비켜ㅡ!!!"
역시 용사에게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저 미끄러운 바닥 탓에 멈추는 게 불가능해졌을 뿐이다.
쿵!
그러나 타이밍만은 완벽했고, 결국은 꼬맹이의 눈이 더럽혀지기 전에 구하는 것에 성공했다.
"괜찮니, 데이린?"
"응. 먹을 건 어디 있어?"
꼬맹이는 기울어진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면서도 먹을 것을 찾았다. 누가보면 내가 굶기기라도 하는 줄 알겠다.
"조금만 기다려.."
용사는 뒤를 돌아 턱을 움직여 마왕에게 신호를 보냈다.
잠시 후, 마왕의 부하가 음식들을 가져왔다. 맛들이 꽤나 괜찮아서, 꼬맹이가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을 무시하고 술안주 대신 몇 개 정도 씹었다.
"아.. 이제 더워.."
먹을 게 없어지자마자 이 소리다.
"여기서 뻗을 때 까지 마시는 것도 좀 그런데, 이제 다른 거나하면서 열 좀 식힐까?"
용사가 빈 병을 흔들어보고는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러자아."
어느정도 취한 마법사는, 뭘 하자는 지도 모르고 일단 응하고 봤다.
"그럼 대충 가운으로 갈아입고 탈의실 앞에서 만나자."
나는 한마디도 안 했는데, 마왕을 필두로 등신들이 하나 둘 탕에서 일어났다.
"야, 이거 안 치우고 가도 되냐?"
탕에 떠다니는 빈 병과 잔들을 가리켰다.
"아까 못 봤어? 내 부하들이 알아서 치울 거니까, 손님들은 걱정하지 마."
"음, 편하구만."
그렇게 탈의실로 향하려는데, 꼬맹이가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야, 니 옷 저쪽에 있잖아. 저기가서 입고 나오라고."
"아, 맞아."
뜨거운 물에 정신머리까지 씻겨 내려간 모양이다.
"우리 먼저 나갈게 제리스~"
마왕은 얼굴을 처박은 채 탕에 떠있는, 제리스와 할배에게 인사를 했다.
"둘이 많이 친해진 것 같아."
"그러게. 저 할배 말도 존나 많던데."
탈의실로 돌아가자, 척 봐도 포근해 보이는 하얀색 가운이 나를 맞이했다.
"역시, 물에 들어갔다 나와서는 이거지."
"오, 뭘 좀 아는구나, 오로넬!"
마왕이 격한 공감을 표했다.
"그리고 이 다음엔 우유 한잔이 딱인데."
"오오오, 그렇지, 그렇지."
무슨 옛날이야기 듣는 애새끼도 아니고, 무슨 말을 해도 반응한다.
"야, 근데 너."
"응?"
"이거 입을 때 속옷 입냐, 안 입냐?"
갑자기 적막이 흘렀다.
그냥 물어본 것뿐인데, 되도 않는 머리를 이상한 방향으로 굴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 입.."
듣고 있다는 의미로 눈을 크게 떴더니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 안.."
이번에도 나와 눈을 마주치자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내 표정으로 간을 보고 있는 모양이다. 표정 같은 거 하나도 안 바꾸고 있는데 말이다.
참고로 나는 가운만 입는다.
물기가 이렇게 많은데, 속옷 같은 거 입어봤자 젖기만 할 뿐이다.
마왕이 결심을 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안 입어!"
"그러냐."
"어? 맞아..?"
진짜 내가 뭐라고 할 줄 알았나 보다.
"다 입었으면 빨리 나가. 저놈들 기다린다."
"어, 어어 그래야지."
탈의실 밖으로 나가자, 역시 여탕쪽의 등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운만 입고 나오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마법사가 투덜댔다.
보통 이런 건 남녀가 반대여야 하는데, 마왕이 시간을 끄는 탓에 늦어졌다.
"기다려봤자 몇 분이나 됐다고 지랄이야."
마법사도 이제 이 정도 욕으로는 반응도 하지 않는다. 역시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다.
"자! 이제 어디로 가 볼까!"
용사가 소리 질렀다.
"왜 니가 난리야. 너 여기 길 아냐?"
"당연하지~ 나 용사야, 용사. 숙적 마왕의 본거지인 이 성은 이미 머릿속에 다 꿰고 있다고."
"뭐가 숙적이야. 너 그냥 목만 받고 나왔다며."
"앗, 아아, 들었어?"
용사가 말을 더듬더니 마왕을 노려봤다. 이걸 알고 있는 건 마왕밖에 없나 보다.
"사기꾼 새끼."
"사기꾼?"
사기꾼이란 말에 반응한 꼬맹이가 용사를 쳐다봤다.
'사기꾼은 응징해야 한다.' 그것이 꼬맹이에게 가르친, 세상을 살아가는 법 중 하나다.
"아, 아니야! 사기가 아니라 음.. 그래, 의례야 의례. 지크 아저씨가 의례라고 했어."
"의~례~? 무슨 뜻인지는 알고 쓰는 거냐?"
"물론이지! 그, 그거잖아? 축제.. 같은 거잖아? 백년에 한번 하는 축제지."
"그래서, 무슨 축제라고 하던? 그 지크라는 아저씨는."
"어.. 그러니까 분명.. 헤라나 왕국의 입.. 지를? 탄탄하게 하고..? 동대륙 사람들이 안심하고 지낼 수 있도록 해 준데."
"사람들을 안심시키려면 굳이 백 년마다 부활한다는 설정 끼워 넣지 말고, 그냥 마왕이 죽었다고 했으면 됐지 않냐?"
"그러면 동대륙 사람들이 서대륙으로 쳐들어가서 전쟁을 일으킬 거래."
하긴, 지금 자기네들끼리 전쟁하고 있는 꼴만 봐도 눈에 훤하다.
아무래도 멀쩡한 상태의 흰놈은 머리도 멀쩡하게 잘 돌아가는가 보다.
"흐음. 근데 그거랑 니가 여기 구조를 알고 있는 거랑 무슨 관계냐?"
"아 그건.. 사실, 그냥 목만 받고 가긴 뭐 해서. 나디아한테 성 안내 좀 해달라고 했어."
어떻게 하면 대가리가 저렇게 돌아갈까? 술을 뒤지게 처먹어도 저렇게는 안 돌아가던데.
"숙적이랑 잘 하는 짓이다."
"헤헤.."
용사가 코끝을 문질렀다.
"그래서 어떤 게 있는데? 연구 시설 같은 곳도 있어?"
역시 마법사는 저런 곳에 관심을 보인다.
"어.. 그건 지크가 부숴버렸어."
마왕이 대답했다.
"음ㅡ 놀만한 곳은.. 축구장도 있고, 야구장도 있고, 탁구장도 있고, 골프장도 있고.."
용사가 오락시설들을 하나씩 읊어나갔다. 근데 끝나지가 않는다.
"이게 마왕성이냐? 놀이동산이지."
"그럼 어떡해! 주요 시설들은 지크가 다 부숴버리고, 다시 만들지도 말라고 하는데. 이런 것 밖에 만들 수가 없었다고!"
마왕이 울분을 토했다.
"자, 자. 성질 그만 내고. 어디부터 갈래? 놀 건 산더미만큼 있다구."
용사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축구는 기본적으로 뛰어야 하고, 탁구도 생각보다 운동량이 많고, 골프는 재미가 없으니.. 일단은 야구로 해야겠다. 마침 좋은 생각도 떠올랐고 말이다.
"야구장."
"좋아! 가자!"
야구장은 천장이 다 뜯겨져 나간 꼭대기 층에 있었다. 넓이도 적당했고, 장비도 잘 갖춰져 있었다.
거기까진 그러려니 했는데, 관중석에 먹거리까지 완비 되어 있는 걸 보고, 이 녀석들이 얼마나 할 짓이 없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자 그럼, 한명이 남으니까 내가 심판 한다?"
생각해뒀던 대로, 재빠르게 심판 자리를 꿰찼다.
나, 꼬맹이, 마법사, 용사, 마왕.
제리스가 생환하지 않는 이상, 인원은 언제나 홀수가 유지된다. 한명은 빠져야 한다는 뜻이지.
그리고 심판은, 정말로 놀고 싶지만 모두를 위해 희생하는, 빠지는 이유 중 가장 그럴듯한 구실이다.
나는 기껏 개운해진 몸을, 땀으로 찝찝하게 만들 생각이 없다.
"아, 그건 부하들 부르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
마왕이 선심을 쓰듯 말했다.
"아니. 내가 심판 할 테니까, 두 명씩 팀 짜서 해. 그게 더 편하잖아. 거기에 맞게 규칙도 좀 바꾸자고."
"오오 어떻게?"
좋아, 용사는 걸려들었다.
"두 명이 한 팀이니까, 수비팀은 포수 한명, 투수 한명이면 되잖아. 다른 수비는 빼. 귀찮으니까."
"공격팀은 투수보다 멀리 치기만 하면 1루타로 인정, 타자는 아웃 시에만 교체. 어때, 존나 쉽지?"
"괜찮네."
마법사는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럼 팀부터 나눌까?"
용사도 곧바로 게임을 진행시켰다.
"어, 그럼 내가 꼬마랑 팀 할게. 어차피 야구가 뭔지도 설명해 줘야 하잖아?"
"그럼 나디아랑 나랑 팀이네?"
"흐흐, 우리가 여기서 몇 년을 놀아 왔는지 보여주자고."
자랑은 아니다.
처음 공격은 용사의 팀이 당첨 되었다. 수비인 마법사팀은, 꼬맹이가 투수를, 마법사가 포수를 맡았다.
"자 그럼, 플레이볼!"
나는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를 불었다.
첫 번째 타석은 용사였다. 타석의 좌측에 서는 걸 보니 좌타자다.
검을 잡을 땐 오른손으로 잡으면서 굳이 좌측에 서는 걸 보니, 좌타가 유리한 걸 알고 있다.
여기서 허비한 시간이 상당하다는 뜻이지.
한편, 투수인 꼬맹이는 마법사가 설명을 잘 해줬는지, 자세가 꽤나 그럴듯하다.
저 녀석이 공을 던진다는 게 살짝 불안하기는 하지만, 이 두 놈이라면 충분히 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꼬맹이가 첫 투구를 위해 다리를 들었다.
응? 꼬맹이의 팔은 뻗어져 있는데 공은 어디..
"흐아아!!!!"
우렁찬 기합소리가 들려왔다.
타자가 아닌 포수에게서.
공은 이미 포수의 품속으로 날아 온 것이다.
마법사의 몸이 점점 뒤로 밀려나가고 있었고, 글러브의 바깥쪽으로는 후폭풍이 일어, 타자인 용사도 반대로 밀려나가고 있었다.
"도와줘어어, 오로네에엘!!!"
"이미 니 뒤에 있다고!!"
나는 진작에 마법사의 등을 밀고 있었다. 이 녀석이 버티지 못하면 피해를 보는 건, 어차피 뒤에 있는 나이기 때문이다.
-흐아아아!!!!
쾅!
끝내 버티지 못한 마법사는, 나를 등에 진 채, 공이 나아가는 방향을 따라 벽에 처박혔다.
"커헉!!"
공의 속도와 마법사의 무게까지 합쳐져, 나에게 전해진 충격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어디가 어떻게 박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입가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괘, 괜찮아..?"
바로 옆자리에서 손을 벌벌 떨며 마왕이 물었다.
"야, 꼬맹이!!! 쿠헠! 너, 너 공 던지지 마, 이 새끼야! 푸핰!"
"알았어."
"잠깐!"
이대로 계속 진행하면 반드시 인명피해가 나온다. 아니, 확실하게 내가 죽는다.
그래서 꼬맹이가 투구를 하지 못하게 했더니, 갑자기 용사가 막아섰다.
"교체하기 전에, 저 공. 한번만 치게 해 줘."
용사가 진지한 얼굴로 땅을 두드렸다.
"너 아까 못 봤냐? 아니, 지금 내 꼴이 안 보여? 맞으면 뒤진다고! 애초에 보이기나 했냐? 니가 쳤으면 내가 이러고 있진 않겠지!"
"속도는 적응하면 돼. 다섯 번, 다섯 번만 기회를 줘. 한 번 타석에 들어선 이상, 저 공은 치고 간다."
용사의 눈은 투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게 해주자고. 시트린 녀석, 못 친 공이 있으면 칠 때까지 하려 한단 말이야. 다섯 번이면 금방이잖아."
마왕이 붕대를 건네주며 말했다.
어차피 마법사건, 나건, 지금 당장 시합을 재개하는 건 무리다.
마왕의 부축을 받아 관중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 이제 던져, 데이린!"
쾅! 쾅! 쾅!
순식간에 세 번의 기회가 지나갔다.
경기장의 뒤편에 구멍이 세 개나 뚫렸지만, 용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네 번째 기회.
용사가 배트를 휘둘렀다. 하지만 공은 배트를 지나, 벽을 뚫고 날아갔다.
저게 정말로 보여서 휘두른 것인지, 허투루 휘두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마지막 기회.
용사가 웃고 있다. 돌파구를 찾은 모양이다. 아니면 그냥 미쳤거나.
전자나 후자나 너무 그럴듯해서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다.
꼬맹이의 마지막 투구가, 손을 떠났다.
오른발에 체중을 실어 땅으로 꽂아 넣고, 당겼던 허리를 힘차게 되돌리며, 용사는 배트를 휘둘렀다.
다음 순간, 엄청난 모래 바람이 관중석을 향해 불어왔다.
꼬맹이의 공이 지나가서가 아니다.
그 공이, 멈춰 있어서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공과, 그걸 간신히 억누르고 반대방향으로 날려 보내려는 배트가, 서로 맞물린 상태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이 모래바람은 그 여파였던 것이다.
"으으으으!!!"
식은땀이 흐르고,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용사의 얼굴은 웃고 있는 모습 그대로다.
시간이 지나자, 공의 회전력이 점점 떨어지며, 후폭풍이 약해져갔고, 배트가 조금씩 앞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왔다아아!!"
용사는 기다렸다는 듯, 비축해 두었던 힘을 모두 때려 박아, 배트를 움직였다.
"홈런을 때려주마아아!!!"
마침내, 배트가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용사의 손에는 배트의 손잡이만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