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빈 깡통이 요란하다고들 하지만, 꽉 찬 깡통도 충분히 시끄럽다 [1]
아침을 먹고 다시 잠든 뒤, 점심때가 되어 일어났다.
그럴 거면 점심때까지 쭉 자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는데, 사람은 하루에 세 끼를 먹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그럴 순 없다.
가끔가다 살을 빼겠다고 하루에 한 끼나 두 끼밖에 먹지 않는 놈들이 있는데, 굶지 말고 운동할 생각을 하는 것이 몸에도 좋고, 건강에도 좋다.
"하아암. 오늘이 정기보고 날이었던가."
머리를 긁적이며 세면대로 걸어갔다. 꼬맹이는 반쯤 감은 눈으로 이불을 개고 있다. 무릎을 땅에 대고 있으니, 쓸데없이 긴 머리카락이 바닥을 덮었다.
"넌 그거 안 불편하냐? 잘도 그러고 다니네."
"머가..?"
아직 잠에서 덜 깼는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듯하다.
"니 머리. 안 불편하냐고."
"머리?"
꼬맹이가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그거 말고 머리카락."
꼬맹이가 자기 머리카락을 잡아, 눈앞으로 가져갔다. 저게 되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게 길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다, 저 키에 저 길이면 무게도 상당할 텐데, 잘도 고개를 들고 다닌다. 평범한 꼬맹이였으면 항상 고개가 천장을 향하고 있었겠지.
"별로.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냐."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이랑 지낸지 몇 달 가까이 되어 가는데, 저거 이상으로 머리가 더 길어지지 않는다.
"야, 막대기."
책상 옆에 세워둔 막대기가 공중에 떠올랐다.
「뭐냐.」
"니네 둘 다, 누가 만든 거라며."
「그렇다. 위대하신 분이 직접 만드셨지.」
"쟤는 저기서 더 안 자라냐?"
문 앞에 서있는 꼬맹이를 가리켰다.
"옷 다 입었어."
점심을 먹으러 가자는 뜻이다.
"세수하고 와라."
꼬맹이가 내 옆을 지나 세면대로 향했다. 나는 그동안 옷을 갈아입었다. 막대기 녀석도 그쪽에 있으니, 대답을 듣기도 쉬울 거다.
「데이린은 이미 완전한 상태다. 더 이상 성장할 필요가 없지.」
"그럼 저기서 늙지도 않는다는 소리냐?"
그럼 난 저 놈을 언제까지 대리고 살아야 한다는 거냐.
「물론이다.」
내가 볼 땐, 그 위대하신 분이라는 작자도 제리스 못지않은 변태다.
예술가들이 으레 그렇듯, 무언가를 만들어 낼 때는 창조자의 취향이 다분하게 반영되는데, 굳이 나이도 먹지 않는 놈을 꼬맹이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정상참작의 여지도 없다.
"하.."
그 양반이 진짜 신이라면, 세상이 이렇게 병신 같은 것도 이해가 간다.
이런 거지같은 이유로 신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다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어이, 거기서 왜 한숨을 쉬는 거지?」
"안했어. 들숨 날숨 모르냐?"
맞다고 했으면 막대기 녀석이 또 한껏 지랄을 했겠지. 일어나자마자 그런 곳에 힘을 빼긴 싫다.
"다 씻었어."
꼬맹이가 얼굴을 닦으며 걸어 나왔다.
"그럼 밥 먹고 올 테니까, 다시 아무데나 박혀있어라."
막대기에게 사라지라는 손짓을 했다.
가게에선 몰라도, 날아다니는 검과 같이 마을을 돌아다닌 다고 생각해 봐라.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귀찮은 일밖에 안 생긴다.
그래서 이 녀석은 가게에 갈 때 빼고는 집에만 박아두는 것이다.
점심은 찐 감자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날로 먹는 메뉴에 돈을 받는 건 양심에 찔리는지, 투숙객들에게는 값을 받지 않고 제공한다.
물론, 외부인들에게는 돈을 받는다. 근데 제정신이 박힌 놈이라면 이걸 돈 내고 먹을까? 돈으로 똥을 닦아도 될 만큼 넘쳐흐르는 놈이라면 몰라도.
"어이~ 오로넬이랑 꼬마, 안녕."
있었다. 그런 놈.
"안녕, 시오."
꼬맹이도 인사를 건넸다.
"안녕 병신."
나도 인사를 건넸다. 별 다른 말이 없는 걸로 봐선, 마법사도 자기가 하고 있는 짓이 병신 짓이란 걸 인식하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묵는 여관 쪽 점심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이쪽으로 왔어.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혼자 먹는 것 보다야, 같이 먹는 게 낫잖아?"
"점심이 뭐였길래 이딴 걸 먹으러 오냐?"
"삶은 달걀."
"너 진짜 병신이냐? 삶은 달걀 싫다고 찐 감자를 처먹으러 와? 그놈이나, 그놈이나, 뭐가 다른데, 미친놈아."
"아ㅡ니. 문제는 그게 아니지. 뭘 모르네."
마법사가 손가락을 저었다.
"또 뭔데?"
껍질이 너무 뜨거워, 열을 식히기 위해, 감자를 양손에 번갈아 가며 던졌다.
"나는 반숙파야."
"어쩌라고."
진짜 몰라도 되는 것이었다.
"여관에는 완숙만 나온다고. 자기들 말로는 반숙도 있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주는 대로 처먹으라 이거지. 반면에 찐 감자는 찐 감자잖아. 덜 익히거나 더 익힌다고 완전히 망하는 것도 아니니까, 이게 더 좋지."
어째 처음에는 영양분만 섭취할 수 있으면 된다던 놈이, 취향이란 취향은 다 따진다.
"에휴, 조용히 먹고 깨끗하게만 사라져라."
"에이, 무슨 소리야. 같이 앉은 김에 근황이라도 이야기 하자고."
"뭐? 너 근황이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소리냐? 맨날 술집에서 보는데 무슨 근황이야 근황은."
"너는 잘 지내고 있다고? 나? 아, 나는 요즘 바쁘게 지내고 있지. 이제 곧 '그게' 완성되거든."
아, 자기 자랑하려고 그런 거였구나.
"와. 정.말.대.단.하.다."
그렇다면 그렇게 신경 써서 듣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 아~ 정말 힘들었다니까. 특히 접합부를.."
몇 분 동안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이 옆자리에서 들려왔다.
그걸 무시하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해서 감자를 먹었다.
감자의 냄새, 열기, 식감. 찐 감자가 그렇게 맛있는 음식인줄은 처음 알았다.
"아, 배부르니까 난 먼저 올라간다. 맛있게 먹고. 잘 가라."
꼬맹이의 먹는 손이 멈추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달렸다. 앉아있는 시간이 1초 늘어날수록 저 녀석이 씨불이는 말은 10분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조만간 가게에도 가져갈 테니까 기대하고 있으라고!"
계단을 거의 다 올랐을 때, 마법사가 등 뒤에서 외쳤다. 뭐라고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손을 흔들어 줬다.
방에 들어오고 나서는 왕놈에게 쓸 보고서를 작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보고서에 필요한 글자 수는, 몇 달 전의 보고서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짧아졌다. 그냥 '특이사항 없음' 한 문장이면 끝난다.
철수명령이 오지 않는 것에는 여전히 화가 났지만, 일이 없는 게 어디인가. 나름대로 이곳 생활을 즐기는 법도 터득했고 말이다.
5분도 안 되서 할 일이 끝났다. 이젠 이걸 왕국으로 보내는 일만 남았다. 가게에 가기 전에 보내도록 하자.
아, 생각해보니 오늘은 가게 문을 열지 않는다. 나중에 꼬맹이가 뭐라 하기 전에 미리 말해 둬야겠다.
"야, 꼬맹아."
"응?"
침대에 엎드려 있는 꼬맹이를 불렀다. 저놈은 엎드려 있을 땐, 꼭 얼굴까지 묻고 있다.
"오늘 가게 문 안 열어서 안 갈 거다."
"어? 왜? 맨날 열었잖아."
꼬맹이가 얼굴만 내 쪽으로 돌려서 대답했다.
"오늘은 뭐, 천둥도 치고 비도 오고 난리가 날 거라더라. 비 온다고 해서 어차피 안 가려고 했는데, 괜히 오는 놈들 번개 맞고 뒤질까봐 그냥 문 닫는단다."
주인장은 가게 밖으로 잘 나가지도 않으면서 이상하게 날씨 하나는 잘 맞춘다.
주인장이 비가 온다고 하면 비가 왔고, 눈이 온다고 하면 눈이 왔다. 천둥이 친다고 하면 천둥이 치겠지. 영업까지 안 하는걸 보면 오지게도 치는 모양이다.
"으으.. 안 돼.."
침대에 얼굴을 비벼대며 현실을 부정하는 꼬맹이였다. 그래도 저녁은 먹을 만하게 나오는 여관이니, 거기에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내려가면서 오늘 저녁은 많이 해 두라고 여관 주인에게 일러두어야겠다.
"난 편지 좀 부치고 올 테니까, 누워 자든, 혼자 놀든, 아무튼 방에 있어라."
"으응.."
꼬맹이가 힘없이 늘어졌다.
우체국은 여관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걸어서 3분 정도 면 도착한다.
하지만 그곳에는 용무가 없다. 거긴 서대륙 내에서만 배송이 되기 때문이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동대륙과 서대륙간의 공식적인 교류는 한 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서신을 주고 받으려면, 다소 불법적인 경로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진짜 용무가 있는 건, 우체국의 뒷골목에 있는 허름한 건물이다. 이곳에 편지를 맡기면 가장 가까운 동대륙의 우체국으로 배달이 되고, 그 우체국에서 왕놈에게로 배달이 되는 구조다.
"암호."
물건 하나 정도가 들어갈 만한 작은 구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좆까."
"아, 오로넬씨. 오셨군요."
암호 같은 거, 일일이 외울 필요는 없다. 돈만 있으면 열지 못할 문은 없으니까.
"그래. 이거 평소대로 보내라."
편지 하나와, 늘 지불하는 값을 구멍으로 밀어 넣는다. 금액은 이 녀석들이 통상적으로 요구하는 것의 두 배를 준다. 어차피 내 돈도 아니고, 무엇보다 암호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물을 나와 다시 여관을 향해 걸었다. 오늘의 일과는 이걸로 끝이다. 남은 시간은 자거나, 얼마 전에 빌려온 책이나 읽도록 해야겠다.
머리에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슬슬 비가 오려는 모양이다.
"일찍 나와서 다행이군."
조금 더 늦었으면 머리를 감아야 할 정도로 맞았을 거다.
나는 본격적으로 비가 오기 직전, 딱 맞춰 여관으로 돌아왔다. 이제 남은 하루 동안은 이 건물을 절대 나가지 않을 것이다.
습기 때문에 축 처지는 몸을 이끌고 계단을 올랐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먹구름들이, 마을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었다.
~
"하하하하!"
천둥이 몰아치는 음산한 밤. 낡아빠진 고성이 올려다 보이는 어떤 마을의 여관에서는, 한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방 두개에 엄청난 값을 지불하며, 말 그대로 방을 사버린 여자는, 또다시 상당한 돈을 들여, 두개의 방을 합치고는, 거기서도 만족하지 못 했는지 개조에 개조를 거듭했고, 이제 그 방은 여관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것이 되어 있었다.
여자 스스로가 '연구실'이라고 부르는 그 방에는, 누구도 본적이 없는 요상한 물건들이 무질서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정리해야겠다고 늘상 생각은 하지만, 실상은 널브러진 물건들이 더 늘어나기만 할 뿐이다.
그 잡동사니들의 가운데에, 여자는 서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완성했어..!"
그녀의 앞에는 기다란 책상 위에 눕혀져 있는 어떤 물건이 있었고, 그녀의 손에는 주먹만 한 수정이 쥐어져 있었다.
"후.. 긴장되는걸."
대마법사라고 불리우며 칭송받고 있는 그녀였지만, 사실 그녀는, 조각의 힘으로 내다본 미래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을 재현했을 뿐이었다.
물론, 처음 보는 물건의 원리를 규명하고, 똑같이 만들어 내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에 발명, 창조 같은 수식어가 붙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왔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원본이 되는 물건은 조각을 통해 내다본 물건이었지만, 도저히 원리를 알아 낼 수가 없어, 재현에 포기했던 물건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방식대로 그것을 만들어내기로 했다. 재료와 작동 방식, 모두 그녀가 스스로 생각하여 그것과 비슷한 무언가를 만들어낸 것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들 하지 않는가. 이것은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어엿한 발명이었다.
여자는 초심을 되찾고 오랜만에 발명다운 발명을 했다는 사실에 너무 기쁜 나머지, 자랑을 위해 아침부터 오로넬이라는 남자가 지내는 여관의 식당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제대로 듣지도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이것을 말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슈웅ㅡ
수정에 빛이 들어왔고, 모든 준비는 끝났다.
"자.. 이제 눈을 뜰 시간이다."
새하얀 섬광이, '연구실'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