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빈 깡통이 요란하다고들 하지만, 꽉 찬 깡통도 충분히 시끄럽다 [4]
끼이익
"뭐야, 둘이서 어딜 갔다 온 거야?"
"아, 잠시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물론 그런 일 따위는 없었다. 나가서 한참을 있다가 돌아왔으니, 저런 질문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눈빛이 바뀌었다고 대가리까지 바뀔 리가 없었던 용사에게 설명을 하느라 쓸데없이 시간을 잡아먹은 탓이다.
"뭐, 됐어. 그래서 시트린도 같이 마시는 거야?"
마법사가 수상쩍게 쳐다봤지만, 평소처럼 흐리멍텅한 얼굴의 용사와, 내 표정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럼! 빨리 마시자고. 아저씨! 맥주 한잔!"
우렁차다못해 시끄러운 목소리로 용사가 대답했다.
"그래~"
"자, 빨리 잔 들어. 건배 해야지!"
근처에 빈자리가 없는 이유로, 용사는 서서 술을 마셔야만 했다.
마법사의 바로 옆자리엔 용사와는 초면일 터인 깡통이 앉아 있었지만, 용사는 굳이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 길고도 짧았던 20분간, 내가 용사에게 이르고 일러서 납득시킨, 가게에 들어가서 취해야 할 유일한 행동방침이다.
~
"자, 다시 한 번 설명해 줄게. 잘 들어."
시발, 벌써 다섯 번째 설명이다. 사람 한명 제정신으로 만드려다가 내가 울화통이 터져서 뒤질 것만 같다.
그래도 괜히 이 녀석이 또 입을 잘못 놀려서 일을 망쳐버리는 것만은 피해야 하니, 때려치우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뺨만 후려쳤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못 버틴다.
딱!
머리만 돌머린 줄 알았는데 뺨도 돌뺨이다. 이 녀석은 진짜 걸어 다니는 돌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 마법사가 2주전에 이상한 깡통을 하나 만들어서 들고 왔어. 맞지?"
"기억나, 그 불 뿜던 거."
"그래! 시이발, 니가 거기서 용 얘기를 꺼냈다고! 그냥 박수만 쳐줬으면 끝났을 일을!"
드디어 알아먹었다. 근데 아직 행동방침이고 뭐고,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그냥 이 일이 일어나게 된 계기, 사건의 발단을 설명한 것뿐이다.
이 머리로 대체 검술은 어떻게 배워 처먹은 거냐.
"어.. 그런데 그땐 니가 물어 본거였잖아."
"뭐?"
"아니, 나는 그냥 혼잣말로 중얼거린 거였는데, 니가 꼬치꼬치 캐물었잖아."
"아~ 그러니까 내 탓이다? 그 다음날도, 다음날도, 다음날도,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주절주절 씨불여놓고 내 탓이다?"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게 한, 니 잘못이라고 할 수 있지."
용사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미쳤나 진짜."
용사에게서 압수한 검을 던질 자세를 취했다.
이 놈이 개소리를 하거나, 못 알아먹는다 싶을 때, 협박용으로 쓰려고 몰래 빼앗아 두려고 했는데, 혹시나 싶어 달라고 하니까 진짜 줬다. 멍청한 새끼.
"아, 아! 거짓말, 거짓말! 계속 이야기 해 줘!"
검을 다시 내려놓고 설명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나 때문에 시오가 계속 발명품에 이상한 기능을 넣어 온다고?"
"그래. 니가 자꾸 이상한 것들이랑 비교해대니까, 그 놈도 자꾸 이상한 걸 넣어서 오잖아."
"내가 준 자극 덕분에 시오의 기술이 더 발전하고 있는 거일 수도 있잖아."
"발전하고 있는 건 오기뿐이라고. 니가 언제까지 자기 발명품과 되도 않는 비교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오기."
"으음.. 그럼 어떡하면 돼? 시오랑은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오, 그건 간단해. 니 머리통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니까."
~
"어, 바로 뒤에 자리 났다. 저쪽으로 가자 오로넬."
뒤편의 테이블에 있던 등신들이 집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용사가 서서 마시고 있었으니, 자리를 옮기자고 하는 것은 용사를 배려해서 하는 말이겠지만, 마법사가 아까부터 뒷자리를 계속 살피고 있던 걸 봐서 그런지, 왠지 모르게 불안하다.
"아, 난 이 자리가 좋아서. 니들끼리 앉아라. 여기서도 잔은 칠 수 있잖아."
"아니 다 같이 가야해! 너 시트린처럼 서서 마시는 손님들을 보고도 자리를 낭비할 생각이야!? 테이블에 앉을 거면 자리는 다 채우는 게 예의지!"
갑자기 왜 이러는 거냐, 이 새끼? 평소엔 자리가 차던 말던 상관도 안 하던 놈이, 저 자리에 앉으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는 건가?
그래도 논리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반박하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무슨 꿍꿍이 인지 모르니, 닥치는 게 맞는 건지, 지랄하는 게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야, 꼬맹아. 나 바로 뒷자리로 옮길 거니까, 적당히 먹고 있어라."
"응."
내가 옆에 있어도 조금만 눈을 때면 금새 스튜를 시켜먹는 꼬맹이다. 이렇게 말해도 자기 꼴리는 대로 시켜먹겠지.
적어도 이 녀석이 보이는 자리에 앉도록 해야겠다. 오늘은 대충 마법사의 상태만 더 지켜보고 돌아갈 예정이다.
잔을 들고 용사와 마법사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도달했을 때, 마법사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깡통, 이리로 와."
보란 듯이 용사의 앞에서 깡통을 소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새끼, 아까 나랑 꼬맹이로 만족했다는 듯이 말해 놓고, 잘도 용사에게 자랑할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용사가 저 미끼를 물 일은 없으니까.
~
"간단한 일? 뭔데?"
"가게에 들어가면, 마법사의 옆자리에 처음 보는 남자가 한 명 앉아 있을 거다. 그 녀석이 그 고철덩어리야. 쉿! 아무것도 묻지마! 그냥 그런가보다 하라고."
"아무튼, 너는 그 녀석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안 하면 돼. 아무것도 안 했는데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 거니까."
"알았어. 그 녀석을 무시하면 되는 거지?"
"그래. 오늘, 마법사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
"그나저나 나디아 녀석 늦네. 오늘 같이 마시기로 했는데."
말해둔 대로, 용사는 철저하게 깡통 녀석을 무시하고 있었다.
제 아무리 마법사라지만 2주 동안 밟혀왔던 상대에게 직접 자랑 할 용기는 없겠지.
"니네가 언제 약속하고 만났냐? 마시다 보면 어느샌가 모여서는 꼴깝을 떨면서."
아예 원천을 봉쇄하려면, 잡소리가 나오지 않게 아무렇게 던진 화제에도 필사적으로 달려들어 이야기를 이어가야 한다.
이건 화제는커녕 혼잣말이지만, 어떻게든 받아쳐야지.
"흠, 흠. 아~ 담배나 필까~"
하지만 마법사는 아랑곳 하지 않고 큰 소리로 주의를 끌었다.
담배를 입에 물자, 깡통이 손가락을 갖다 대어 불을 붙여주었다.
물론, 용사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산을 넘으면 바다 아니던가? 여름에는 거기서 낚시라도 할까."
분위기가 곱창 나기 일보직전. 이번에는 내가 화제를 꺼내 위기를 무마했다.
"어, 어. 맞아. 거기에 아마 무인도도 있을 거야."
무인도 얘기는 왜 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렇게라도 받아쳐줘서 다행이다.
"그럼 거기에 아무나 한 명 버리고 오면 되겠네."
"그건 좀.."
"서대륙 남서쪽 해역. 희귀한 어류들이 대량으로 서식하고 있으며, 대체적으로 수심이 낮음. 하지만 급격하게 수심이 깊어지는 구간이 있으므로 주의 요망."
깡통 녀석이 주절주절 정보를 늘어놨다. 저런 기능까지 있을 줄이야.
이번에야말로 마법사는 이겼다는 듯 기쁘게 술을 들이켰지만, 용사와 나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빈 잔을 사납게 내려찍었다.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챈 마법사는, 더 이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깡통의 손가락에서 유리구슬을 난사하며 대놓고 위협을 가하기도 하고, 주먹을 날려 보내 때리려고도 하고, 눈에서 붉은 빛줄기를 비춰 테이블을 태우려고도 했다.
그럼에도 나와 용사는, 그것을 인식하려 하지 않았다.
끼이익.
"오 시트린, 먼저 와있었네."
돌조차 모독하는 사상 최대의 돌대가리, 마왕이 오기 전까진.
"많이 늦었네, 나디아."
용사가 자신에게 날아오는 구슬들을 아무렇지 않게 피하며 말했다. 주인장이 보지 못해 다행이지만, 구슬이 닿은 곳에는 그만한 크기의 구멍이 뚫렸다.
"미안, 미안. 꼭 나가려고만 하면 서명해야 할 문서들이 한가득 온다니까."
사전에 얘기 되지 않은 마왕조차도, 깡통이 설치고 있는 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이 녀석이 저걸 보는 건 처음일 텐데, 놀라기는커녕, 반응조차 없다. 드디어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터득한 것인가? 아니면 실명이라도 된 건가?
"만들었다는 녀석이 이 녀석이야?"
안심하는 찰나에 마법사에게 질문을 하는 마왕이었다. 저 녀석의 존재에 대해, 이 녀석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래, 덕분에 잘 움직여. 너도 하나 필요하면 말해. 답례로 만들어 줄 테니까."
덕분에? 마왕 덕분에? 저놈이 덕분에가 붙을 만한 일을 할 수 있는 놈이었나?
"아, 난 필요 없어. 그런 거 있어봤자 지크가 부수러 올 뿐이라고."
마왕이 고개를 저었다.
"시트린, 이거 대단하지 않냐? 무려 내가 원조한 재료로 만들어낸 물건이라고."
덕분에 라는 게 재료 제공이었나 보다.
"응? 뭐가?"
용사는 그걸 또 무시했다. 저렇게 대놓고 물어보는데도 무시하는 건 너무 융통성이 없다.
"이거 말이야 이거."
깡통을 두드리는 마왕이었다.
"뭐야, 거기 아무 것도 없는데?"
시발, 이건 아니지.
"이 새끼! 시트린한테 뭐라고 한 거야! 니가 시킨 거지!"
신기하게도 무시한 건 용사인데, 마법사에게 멱살이 잡히고 있는 건 나였다.
"잠깐만, 잠깐만. 설명할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해 줄게!"
진심으로 눈에 살기가 가득 찬 마법사를, 필사적으로 멈추었다.
마법사의 손에서 풀려난 나는, 제3자로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전부 이야기 해 주었다.
지금 마법사 본인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 오늘도 용사에게 밟혔으면 더 이상한 걸 만들어 왔을 거란 것 등을 말이다.
"그런 게 쓸데없는 오지랖이라고! 내가 아까 말 했지? 너희 둘이면 족하다고. 시트린은 그냥 덤이라고 덤!"
이걸 끝까지 인정을 안 하네.
"그럼,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아무 상관없는 거지?"
"그래."
"내일 또 이상한 거 달고 와서 자랑 하기만 해봐라. 이 새끼 부셔버린다."
"그러니까 그딴 걱정하지 말라고. 이게 완성 된 거라니까? 더 이상 집어넣을 것도, 장착할 곳도 없다고!"
"에휴, 그래 알겠다. 야, 이제 무시할 필요 없어. 그냥 너 원하는 대로 말해라."
용사가 있는 방향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저 녀석을 부셔버리겠다고 까지 말해두었으니,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거슬리면 부수면 될 뿐.
"진짜? 진짜 말해도 돼?"
제차 확인하는 용사였다. 이 녀석이 이렇게 말을 잘 듣는 날은, 아마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
"그래, 빨리 말 해주고 끝내라. 그래야 내일 망치를 들고 오지."
"음.. 사람처럼 생긴 대다가 손에선 불도 나오고, 온갖 무기도 들어있어.. 요리도 할 수 있고, 아는 것도 많아.."
용사가 이 녀석의 특징을 나열하고 있었다. 이렇게 뭐가 많은데도 비교할 대상이 있나 싶다.
그냥 무릎 한 번 탁 쳐주고 끝내줬으면 좋겠다.
"아!"
뭔가 떠올랐나 보다. 대체 20여년밖에 안 되는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별종들을 봐온 거냐.
"지크 아저씨잖아."
"뭐?"
"어, 그러고 보니."
마왕도 공감하는 걸 보니, 흰놈에게는 저 잡기능들이 다 들어가 있는 듯하다.
하긴, 인간이 300년 쯤 살다보면 별 걸 다 할 수 있겠지. 천 년을 산 이놈은 그걸 다 재현해 낼 수 있고 말이다.
"이..시ㅂ.. 내 기술의 결정체가 저런 주정뱅이라고..?!"
덤이라고 말했던 마법사는, 주먹을 쥐고 부들거리고 있었다.
"설마 너, 열 받거나 그런 거 아니지?"
"그, 그러엄.. 덤이라고 했잖아..! 난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도 않게'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마법사였다.
"어, 뭐야? 깡통! 어떻게 된 거야? 움직여!"
담배를 아무리 물고 있어도 깡통이 불을 붙여주지 않자, 마법사는 깡통을 흔들며 상태를 살폈다.
"벌써 고장 났냐? 쓰지도 않을 기능들을 박아놓기만 존나게 박아놓으니까 배탈 난거 아냐."
"아..아니 이거.. 연료가 다 된 것 같아.."
"뭐? 그럼 어떻게 되는데?"
~
"으으윽..! 으으윽..!"
마법사의 신음소리가 산 중에 울려 퍼졌다.
"힘내라 마법사. 너라면 할 수 있다. 요즘 힘쓰는 마법사들이 대세라더라."
기본적으로 쇳덩어리로 만들어져, 그 자체로 이미 무거운 깡통인데, 이런저런 기능을 있는 대로 때려 박았다 보니, 그 무게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연료가 떨어졌으니, 그걸 집까지 끌고 가는 건 본인의 몫이지.
그래도 마법사 혼자서는 힘들 것 같아, 나는 꼬맹이와 함께 약소하게나마 마법사를 도왔다.
"앞에 잘 보이냐?"
어두운 숲속에서 발을 헛디디지 않게, 뒤에서 불을 비춰주는 중요한 역할이다.
"으으윽..! 시발..! 나 죽네..!"
"그러게 연료를 놔두고 다니래? 가볍게라도 만들던가. 전부 니 잘못이다."
"뭐 이 새끼야!? 너 이..!"
마법사가 이쪽을 보며 신경질을 냈다.
뚝.
1옥타브의 그 짧은 소리에는, 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절망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었다.
쥐고 있는 줄에 화풀이라도 한 건지, 깡통을 끌고 가고 있던 줄이 끊어진 것이다.
"돌 굴러가유~"
줄이 사라지자마자 깡통은 썰매처럼 쓸려 내려갔다.
"어! 안 돼! 돌아와! 깡토오옹!!"
마법사는 그 뒤를 따라, 숲 속의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야, 꼬맹아."
아무튼, 이번 일로 한 가지 깨우친 게 있다.
"응?"
"넌 지금도 충분히 멍청하니까, 더 멍청해지려고 하지마라."
등신들과 지내다보면 멀쩡한 사람도 등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응."
말뜻은 제대로 알아듣고 대답을 하는 건지, 건성으로 대답하는 꼬맹이를 데리고, 깡통이 쓸려 내려간 자국을 따라 숲을 거닐었다.
온갖 욕지거리가, 나무들 사이로 전해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