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빚쟁이들은 가장 행복할 때에 나타난다 [1]
머나먼 동쪽, 여러 대국과 소국들이 패권을 다투며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분쟁의 땅, 동대륙.
그 땅에서 유일하게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는 왕국이 있었으니, 수많은 용사들을 배출하여 서대륙의 침공을 몇 번이나 막아낸, 동대륙의 수호자, 헤라나 왕국이다.
"빛의 신 페어님의 가호 아래, 현명하게 백성들을 이끄시는 라이돌님께 무릎을 꿇나이다."
화려한 무늬의 휘장들이 기둥 곳곳에 매달려 펄럭이고 있는 엄숙한 공간.
그 공간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황금의 좌에는, 라이돌이라고 불린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래.. 오늘은 일요일이라 빨리 쉬고 싶구나. 그 때문에 갖은 예법은 생략한 것이니, 쓸데없는 아첨은 그만하고 마가리스에서 짐에게 알현을 요청한 이유가 무엇인지나 말해 보거라."
신하들은 라이돌의 이런 점을 굉장히 염려했다.
일요일만 되면 무기력증에 빠져서는, 일을 대충대충 해치워 버리기 때문이다.
알현이라는, 누군지도 모르는 자를 만나는 자리에도, 호위병 하나 대동하지 않는걸 보면, 대충 감이 올 것이다.
하지만 신하들도 바보는 아니다.
자고로 왕이라는 자는, 그 그림자마저 보통의 인간들과 궤를 달리하는 법.
지금 이 알현실에도, 그가 모르는 그의 그림자들이, 조용히 상대를 겨누고 있었다.
"전하께서도 그리 말씀하시니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왕의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혹, 저희 마가리스에서 대마법사라 불리는 자에 대해 아시는 지요."
~
마지막 정기 보고를 보낸 지 약 한 달이 지났다.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산책도 할 겸 우체국에 다녀왔다. 이번 달도 물론, 특이사항 없음이다.
"이봐~ 오로넬씨."
다시 방으로 올라가려는 차에, 여관 주인이 불러 세웠다.
"이거 당신한테 온 편지 같은데? 가져가."
여관 주인의 손에 들려진 것은, 한 눈에 봐도 '나 존나 중요함" 이라고 말 하는 것 같은 황금색의 편지 봉투였다.
왕놈이 보낸 편지는 확실한데, 이제 와서 편지라니, 불안하기 짝이 없다.
확실한 건, 철수명령은 절대 아니다. 본능적으로 그런 느낌이 든다.
방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봉투를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후.."
긴장되는 순간이다.
여기에 적힌 내용에 따라, 집으로 돌아갈 수도, 또 다른 개짓거리를 하게 될 수도 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집으로 돌아갈 거란 희망은 버리는 게 낫다.
이 편지를 보낸 놈은, 헤라나 왕국의 역대 왕들 중, 1 2위를 다투는 쫄보이기 때문이다. 절대 저런 위험분자들을 내버려 둘 위인이 아니란 거지.
그럼 다른 시킬 일이 있다는 게 확실한데, 이런 곳에 박아둔 걸 조금이라도 미안하게 생각한다면, 양심 있는 임무를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깐다? 진짜 깐다?"
"응."
혼잣말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침대 위에 엎어져 있던 꼬맹이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와.. 존나 많네. 언제 다 읽냐 이거."
봉투 속에는 세장의 종이쪼가리가 있었고, 그곳에는 무언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왕놈이 직접 쓴 편지인 듯한데, 종이 위에 벌레를 올려놓은 건지, 글을 적어 놓은 건지 모르겠다.
글자도 이 꼬라지로 쓰면서, 밑에 있는 따까리들한테나 좀 시킬 것이지. 종이 아깝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내 미래가 걸려 있는 종이쪼가리다. 곱게 모셔두고 한 글자 한 글자, 자세히 분석하며 천천히 읽어나갔다.
그렇게 분석이 끝나고, 머릿속엔 하나의 생각이 맴돌았다.
"오. 좆됐네."
~
"어서옵쇼~ 오랜만에 1등으로 왔네, 오로넬."
"주인장 보러 왔지."
"거짓말 하네."
"거짓말 맞아."
"하하하하!!"
주인장이 웃어댔다. 내가 정색하며 쳐다보자, 주인장도 웃는 걸 멈추고 정색을 하며 이쪽을 쳐다봤다.
"주문은 맨날 시키는 거?"
"어."
대답을 들은 즉시, 주인장이 손에 들고 있는 럼주와 스튜를 자리 위에 가져다 놨다.
이제 가게에 도착하기도 전에 준비해 둘 정도로 단골이 된 모양이다.
"보통 이 시간쯤에 오는 놈들이 누가 있지?"
받아든 술을, 곧바로 음미하며 주인장에게 물었다.
"뭐.. 지크나 몬드, 아니면 제리스려나."
"아무도 안 오네."
"그야, 지금이 네 시니까."
"그런가."
요즘 시간 감각이 많이 무뎌지긴 했다.
일어나서, 아침이면 아침을 먹고, 점심이면 점심을 먹고, 저녁이면 술집에 온다.
이 세 개의 굴레 속에서 일상이 돌아가게 되면서, 시계 보단 배고픔의 정도로 시간을 가늠하여 살아가고 있었다.
"주인장, 혹시 요 며칠 사이에 처음 보는 놈들이나 수상한 놈들 못 봤어?"
"뭐? 이런 산 구석에 누가 제 발로 찾아오겠어? 너희들 같이 오는 놈들만 오지."
주인장이 저렇게 말 하는 걸 보니, 아직 우려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걱정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게 오늘이 될 수도 있다는 거니까.
"와.. 진짜 아무도 안 오네. 존나 심심하다."
한 시간 동안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등신들이 한 놈도 가게에 오지 않는다.
"야, 막대기."
「뭐냐.」
"재밌는 얘기 좀 해봐."
「이몸은 니 장난감이 아니다.」
"그걸 아니까 이러는 거지. 장난감은 내가 직접 가지고 놀아야 하는데, 니가 말하는 건 내가 가만히 있어도 할 수 있잖아."
「..거절하겠다.」
"아, 존나 재미없네."
자리에 엎드리곤 한숨을 쉬었다.
평소라면 일찍 오던, 늦게 오던, 알아서 마시다 보면 등신들이 자연스레 모여 있는데, 오늘은 누굴 기다리고 있어서 그런지, 시간이 더럽게 안 간다.
끼이익
"어서옵쇼~"
드디어, 누군가 온 모양이다.
"뭐냐, 이렇게 이른 시간에. 할 짓도 없는 거냐, 네녀석은?"
2등으로 온 주제에 할 짓 운운 거리는 흰놈이었다. 자기는 퍽이나 할 짓이 있어서 여기에 온 모양이다.
그래도 마침 물어 볼 것도 있었는데 잘 됐다.
"야, 흰놈."
"나 말이냐?"
자신의 고정석, 카운터석의 끝자락에 앉은 흰놈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 말이다."
"그딴 식으로 불리는 건 불쾌하군."
"그럼 머리를 미시던가."
"그래, 언제 한번 니 머리를 쳐주도록 하지. 그래서 용건은 뭐지?"
"너 싸움 좀 하냐?"
"..웬만큼 하지."
물어봐도 그딴 걸 물어보냐는 표정이었다. 그래. 나도 병신 같은 질문인 건 안다.
그래도 이놈들의 전력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해 두는 것이, 가까운 시일 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웬만큼이 얼만큼인데? 너 이거 이길 수 있냐?"
옆에 있는 막대기를 들어 흰놈이 보이게 흔들어 보였다. 흰놈은 그대로 코웃음을 쳤다.
"하, 그깟 떠다니는 검 쯤, 아무것도 아니지."
「...」
막대기는 말을 아꼈다. 지금까지 급발진을 했다가 데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로 나한테 처맞았지.
"자기 말로는 최강의 무기라던데? 용사도 쩔쩔매는 거 못 봤냐?"
"그건 시트린이니까 그렇지. 내가 보좌했던 용사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고. 애초에 나 때는.."
생각해보니 이 새끼, 몬드 할배보다 늙은 놈이다. 나 때를 찾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니 때는 알고 싶지도 않으니까,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만 말해. 니 검도 조각이잖아? 이 녀석한테는 조각도 안 통하던데? 팔도 한 짝밖에 없는 게, 조각도 못 쓰면 어떻게 이기냐?"
조각의 지원을 받지 않고도 이 놈을 이길 수 있다면, 어떤 놈들이 와도 걱정 없겠지.
"조각이 안 통해? 그거 무섭군. 하지만, 그 힘을 가지고도 절대로 관여할 수 없는 조각이 하나 있지. 안 그래?"
「ㅈ.. 짐승 주제에 어떻게..!」
막대기 녀석도 놀란 모양이다. 저 녀석은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설마..
"그건 너희들이 알바가 아니고. 아무튼, 완전 무효화가 아닌 이상, 내가 이긴다."
「입만 살아 있는 짐승이구나. 설령 니가 그 조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일개 짐승의 몸으로 그것을 온전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마음대로 지껄여라. 어차피 나랑 싸우게 되면, 네 녀석만 부셔지고 끝날 테니."
둘이서 무슨 말을 하는지는 통 알아먹을 수 없었지만, 입으로 하는 싸움의 승자는, 아무래도 흰놈인 모양이다.
흰놈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안녕하세요, 점장님."
주변에 신경을 끄고 있는 동안, 제리스의 출근 시간이 되었나 보다. 이제 저녁때가 됐다는 뜻이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등신들도 꽤 늘어 있었다. 대충 모이는 놈들은 다 모인 듯한데, 마법사의 모습만 보이지 않는다.
"어이, 제리스."
방금 마을에서 올라온 제리스는 마법사를 봤을 지도 모른다.
"네, 오로넬씨."
"혹시 마법사 못 봤냐? 걔한테 뭐 해줘야 될 말이 있는데."
"아, 시오씨요? 아까 다섯 시쯤 뵌 것 같은데, 오로넬씨가 묵는 여관으로 간다고 하시길래 한참 전에 가게에 가셨다고 했죠."
또 깡통에다가 뭘 추가했나 보다.
"잠깐만, 내가 가게에 간 걸 니가 어떻게 알고 있냐?"
"아."
"이 새끼, 너 나 감시하냐?"
"아, 아니 이건 그냥 지나가다가 우연히 본 거에요. 산 쪽으로 가시길래 당연히 가게에 가시는 줄 알았죠."
"그 길로 우연히 지나갈 일이 있나? 아무 것도 없는 곳인데?"
"아, 아아 요즘 쓰레기를 줍는 취미가 생겨서요. 구석구석 쓰레기를 줍다보니 거기까지 갔나 봐요. 후손들에게 물려 줄 땅, 깨끗하게 사용해야죠."
"너 안 들키게 조심해라? 들키면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릴 테니까."
"아.. 아하하. 어, 저기 손님이 부르시네? 이, 이만 가볼게요!"
제리스는 능청스럽게 대답을 회피하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이젠 미행까지 신경 써야 하는 거냐.
끼이익
"하하! 찾았다 오로넬!"
드디어 마법사가 나타났다. 옆의 깡통 녀석은 딱 봐도 자랑하려고 데려 온 것이 뻔하다. 며칠 안 끌고 다니나 싶더니, 또 뭔갈 개량한 모양이다.
"닥치고 빨리 와봐. 너 좆됐어."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듣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뭐, 자기가 좆 되든 말든, 시답잖은 자랑이나 하고 싶다면 들어줘도 좋긴 한데, 이 녀석이 좆 되면 내가 마실 럼주의 공급이 끊겨 버리니, 어쩔 수 없다.
"어? 좆 되다니, 무슨 일인데?"
마법사도 놀랐는지, 하던 짓을 멈추고 순순히 자리로 왔다.
"잘 들어. 놀라지 말고."
"아 안 놀랄게. 무슨 일이냐니까?"
"너 여기 있는 거 들켰데."
"뭐?"
"너. 여기. 있는 거. 들켰다고."
"뭐어어어ㅡ!!!!"
얼마나 소리를 크게 지르는지, 가게 안에서도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안 들켰을 거라며!! 몇 달이나 지났으니까 괜찮을 거라며!! 어떻게 된 거야!! 이 배신자 새끼! 니가 찔렀지!!"
요즘 가게에 입고 갔던 옷들이 조금씩 헐렁해져 있더라니, 시도 때도 없이 이 녀석에게 멱살을 잡힌 탓이었다.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했잖아!! 그것도 며칠 전에!!"
"에이, 일단 진정해봐. 그래도 아직 완전히 좆 된 게 아니야. 선택지가 있다고. 무려 두개나."
"으아아아아악!!!"
이걸 먼저 말했어야 했나. 정신줄을 놓아 버렸는지 말이 통하질 않는다.
"야, 깡통. 이거 붙잡아."
"알겠습니다."
깡통이 마법사를 붙잡았다.
원래는 자기 말만 듣도록 만들었다는데, 등신들이 직접 사용해 보고 놀랄 수 있게, 온갖 놈들에게 명령권을 부여했다. 그게 결국 자기를 구속하는 결과를 낳다니, 과학은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다.
"자, 한번만 말한다. 안 들으면 너만 좆 되는 거다. 잘 들어."
붙잡혀서도 정신을 못 차리는 마법사의 뺨을 쳤다.
여섯 대쯤 맞으니 정신이 드는지, 그만 때리라고 침을 뱉는 마법사였다.
"아마 빠른 시일 내에 마가리스 기동대가 올 거다."
"뭐?! 기동대? 범죄자들도 때려잡고, 도시에서 설치는 첩보원들도 족쳐대는 그 무장집단? 으아아아악!!"
"그래, 그 무장집단. 아무튼, 니가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다. 그놈들에게 끌려가거나, 숨어있거나."
"끌려가겠다고 하면, 내가 뭘 해줄 필요도 없이 그냥 가면 되는 거고. 근데 여기에 더 있고 싶으면 숨어야겠지? 그럴 생각이라면 내가 도와줄 건데, 조건이 있어. 어떡할래?"
"당연히 숨어야지, 시발! 나 이제 거기 가기 싫다고!!"
"그래? 그럼 조건에 대해 말해주지. 일단.."
'폭발물 설치완료. 전원, 돌입준비.'
어? 이 소리? 좆됐..!
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