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빚쟁이들은 가장 행복할 때에 나타난다 [2]
"폐하, 근심거리라도 있으십니까?"
가까이서 들려오는 중후한 목소리에, 라이돌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눈앞에는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자신을 보필해 온 충신인, 발프가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유능한 첩보원으로 현장에서 활동하며 이름을 날린 그였지만, 너무 이름을 날린 탓인지, 평균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현장직을 내려놓으며, 많은 이들의 경외와 안타까움을 뒤로한 채 화려한 은퇴를 하게 된다.
하지만 현장에서 물러났을 뿐, 그 뒤로는 현역 시절에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헤라나 왕국의 외교를 담당하는 책임자가 되어, 여러 국가들과의 우호관계 형성에 힘썼다.
잦은 분쟁으로 시끄러운 동대륙에서, 헤라나 왕국이 이토록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것에는, 그의 공이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아, 경인가. 잠시 일요일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소."
"마가리스의 대마법사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그 마법사란 자를 되찾아 오는데 협조하면, 해마다 한 번, 마가리스의 기술이 담긴 물건을 헌상하겠는 협약인데, 여태껏 자국 밖으로는 일체 유출하지 않던 기술들을 돌연히 준다니 영 찜찜하군. 경의 생각은 어떻소?"
일단은 라이돌 본인에게도 일요일에는 일을 대충한다는 자각이 있는 덕분에, 그날 즉답하지 않고, 빠른 시일 내에 답변을 주겠다며 사자를 돌려보냈다.
"확실히, 수많은 국가들이 얼마를 제시하든, 그것을 무시해오던 마가리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에는 영 미심쩍습니다만, 그래도 그들의 기술력은 세계 제일이라 할 수 있으니, 얻을 기회가 있을 때 얻어 두는 것이 좋다고 신은 생각합니다."
"흠.. 경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하오나."
발프가 말을 덧붙였다.
"폐하께서 그 마법사의 소재를 알고 계시니, 더 유리한 조건으로 마가리스의 기술을 받아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호오, 어떻게 말이오?"
"지금 그쪽엔 오로넬이 가있지 않습니까?"
"그렇소만."
오로넬. 그것은 유령의 이름이었다.
어떤 곳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누군가 고의적으로 행한 일이라는 것조차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그는, 헤라나 왕국의 외교, 그 뒷면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신분이 들통나, 일찍 은퇴해버린 발프와는 다르게, 그 이름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그는, 다른 첩보원들 사이에서 조차 여러 이름으로 불리우며, 미제로 끝난 정치인이나 귀족들이 사망한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고 있었다.
그런 국보급 인재와, 국왕의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오로넬과 라이돌의 관계는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라이돌은 오로넬을 신하라 생각하지 않고, 오로넬도 라이돌을 왕으로써 섬기지 않는 탓이었다.
그럼에도 오로넬은, 왕의 직속 첩보원으로서 활동하고 있고, 라이돌은 신용하는 신하들에게도 맡기지 않는 일들을 그에게 맡기고 있다.
서로를 믿지 않는 두 사람이,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오로넬에게 은혜가 있는 발프의 존재 때문이었다.
발프가 있는 한, 오로넬은 라이돌의 명을 따를 것이고, 발프가 있는 한, 라이돌은 신용하는 신하들 보다 더 오로넬을 믿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 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
펑!!!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굉음, 코를 찌르는 화약 냄새.
평소와 다른 것들이 이렇게 많은데, 등신들은 평소와 같이 문을 쳐다보지도 않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하도 문들을 쾅쾅 열면서 들어오니, 이젠 문이 날아가도 놀라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어서옵쇼~"
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정면에서 떡 하니 보이는데도, 주인장은 인사나 하고 있다.
"전원, 움직이지 마라!"
갑옷으로 중무장을 한 무리들이, 등신들을 둘러싸고 검을 겨누었다.
"여기, 오로넬이라는 자는 있는가!"
무리들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투구를 쓰지 않은 걸 보니, 이 놈이 대장인 듯하다.
머리가 제일 중요하다며 절대 투구를 벗지 말라고 하는 놈들이, 정작 자기들은 절대로 투구를 안 쓴다.
역시, 꼬우면 군대 빨리 와라는 말은, 어느 국가에서건 똑같이 적용되는 모양이다.
일단은 마법사가 여기 남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으니, 그 계획대로 해야겠다.
"뭐? 날 찾는다고? 당신이 누군데?"
일단은 모른 척을 한다.
왕놈의 편지가 나에게 도착했음을, 이 놈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 여기 있어서 다행이군. 그쪽 국왕님께서 보내신 편지를 받았을 텐데?"
"뭔 편지? 아아, 그거? 마법사인가 뭔가 하는 놈을 데려가는데 협조 하라는 거?"
대장 놈의 얼굴엔 상처 하나 없었다.
보통, 무장조직에서 높은 직위를 가진 인간의 얼굴에 상처가 가득하면, 실전 경험이 풍부한 강자라고 인식되는 경우가 많지만, 진짜 강자들은 얼굴에 상처 따위 안 난다. 제일 중요한 눈이 있는 곳인데, 거길 다쳐서 어쩌잔 거냐.
"그렇다. 뭐하는 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쪽이 대마법사님의 소재를 알고 있다더군."
"어.. 혹시 진짜 그렇게 듣고 온 거냐?"
"그렇다만."
이 놈들도 알고 있는 건 그렇게 많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면 이쪽이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거지.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이제야 왔냐? 반년 전이야, 반년 전. 국왕님도 차암 답이 없어요. 나한테 물어보기라도 하던가. 이미 사라진 인간을 찾는 걸 다짜고짜 도우라니, 어이가 없다. 어이가 없어."
"무슨 말이지? 마법사님이 이곳을 떠나셨다는 건가?"
"그래, 벌써 한참 지났지."
"그럴 리가.. 목숨을 걸고 대륙 경계를 넘었는데, 의장님이, 미티스님이, 우릴 속이셨다는 건가?"
대장놈이 주먹을 쥐었다.
녀석이 말하는 미티스는, 마가리스 의회의 의장을 몇 년째 해오고 있는 유능한 여자다.
일찍이 마법사의 가치를 알아보고, 공직에 등용하자며 의회에 건의했지만, 보수적인 의회에 의해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그 여자의 말은 옳았고, 마법사를 등에 업은 여자는, 그대로 의회에 입성하여, 무서운 기세로 의장자리까지 올라갔다.
그 여자의 결정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의회를 잘 이끌었으니, 저 놈이 저런 말을 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뭐, 너희들 꼴을 보아하니, 동대륙도 샅샅이 뒤져봤을 거 아냐? 그래도 못 찾으니까 서대륙에 있다고 생각한 거겠지."
"그분은 그런 단순한 이유로 결정을 내리실 분이 아니다. 오히려, 난 그쪽이 더 수상하군. 대체 뭐하는 작자길래 동대륙의 인간이 서대륙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으며, 국왕이 직접 서신을 보내기까지 하는 거지?"
뭐라는 거야, 이 새끼. 여기 있는 놈들 전부 동대륙 놈들인데.
적어도 용사의 얼굴은 알아 볼 줄 알았는데, 세계사 공부를 대충 한 모양이다. 그리고 왕놈이 개인적으로 편지를 보내는 건, 나 좆같으라고 보내는 건데, 왜 거기에 의미를 두는 거지? 이딴 걸로 의심을 받다니, 이렇게 억울한 일도 없다.
"아, 옛날에 헤라나 왕국에서 용병 일을 좀 했었지. 그때 친하게 지내던 놈이 꽤 출세한 것 같아서 말이야. 반년 전쯤에 그 마법사라는 양반이 사라졌다면서 편지가 오더라고."
"헤라나 왕국에서도 그 양반을 찾고 있다고 하던데, 마침 그 전날에 여기서 마가리스에서 왔다는 여자를 봤었거든."
"그래서 편지를 보냈더니 답장이 오더군. 반년이 지나긴 했지만 말이야. 그 편지도 왕가의 인장만 찍혀있지, 그 친구가 쓴 거야. 왕이 아니라고."
곧바로 가공의 인간을 창조해냈다. 어디에서나 써먹기 좋은 '은퇴한 용병' 이라는 설정이다. 아까 했던 말들과 모순되는 말은 없으니, 의심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흠, 그래도 의장님이 결정하신 일이다. 마법사님이 여기에는 오지 않게 되었을지는 몰라도, 이 근처에는 아직 계실 수도 있지."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 좀 더 머물면서 근방을 조사하도록 하겠다. 당신도 언제 다시 부르게 될지 모르니, 마을을 나가지는 않도록 해라."
"날 만나려면 여기로 오면 되니까, 그렇게 알아라."
"알겠다. 전원, 철수한다!"
남자의 외침에, 등신들을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가게 밖으로 흩어졌다.
저놈들이 문을 터트리고 간 덕분에, 별다른 움직임 없이 마을 쪽으로 내려가는 뒷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야, 오랜만에 갑옷을 봤네.
-크으으, 옛날엔 저런 거 입고 다녔지.
등신들은 오랜만에 현역 시절을 떠올렸는지, 하나같이 추억에 빠져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머리를 굴리고 있는 건, 나 하나뿐인 모양이다.
"야, 갔으니까 나와라."
주방에 숨어있던 마법사가 기어 나왔다.
"후우, 좆 되는 줄 알았네."
"아까 저 새끼들 하는 말 못 들었냐? 안 돌아가고 수색하겠다잖아. 진짜 좆 될 수도 있다, 너."
"으아아아, 미티스 이 년! 널 따라가는 게 아니었어.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껏 하게 해 준다더니, 언제까지 날 잡아놓을 셈이야! 내 마음껏은 이미 끝났다고."
마법사가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연구는 둘째 치고, 니가 없으면 시설이 고장 나도 고칠 놈이 없으니까 그런 거겠지."
"무슨 소리야? 원리를 이해시킨 못했어도, 고장 났을 때 해야 할 일은 다른 놈들한테 확실하게 이해시켜 놨다고. 나 하나 없어도 도시는 잘 돌아간단 말이야."
"그랬구만."
그냥 다 팽개치고 도망친 줄 알았는데, 대책은 세워두고 튀었구나.
"아 그보다, 저놈들한테 안 넘겼으니까 넌 자동으로 조건을 이행해야 돼. 알겠냐?"
"하.. 알았어. 조건이 뭔데?"
나는 편지에 적혀 있던 내용을 떠올렸다.
"존나 쉬워. 한 달에 한 번씩, 만들어 놓고 던져둔 물건들 있지? 그거 한 두 개정도만 나한테 주면 돼."
"뭐? 니가 그게 왜 필요해?"
"나 말고 왕놈이 필요하단다. 아까 못 들었냐? 왕놈이 편지 보냈다고. 저 놈들은 널 넘기는데 협조하라는 내용으로 알고 있는 모양인데, 사실 다르거든."
물론 그 내용도 있었지만, 그건 1안, 이건 2안이다. 편지를 받았을 땐, 뭔 개짓거릴 시키려는지 걱정했지만, 선택권이 있는 개짓거리라 그나마 안심했다.
"하.. 알았어. 그럼 이제 어떡하지?"
"뭘 어떡해? 저 놈들 돌아갈 때 까지 숨어 지내야지."
그놈들이 내려간 방향을 보니, 당분간 마을을 조사할 듯한데, 목숨을 걸고 왔다고 했으니, 서대륙, 정확히는 마왕 대한 공포심이 제대로 박혀있는 상식인들이다.
마왕성이 훤히 올려다 보이는 마을에서, 그렇게 대놓고 돌아다니지는 못하겠지.
어차피 그리 넓지도 않은 마을이니, 며칠이면 조사가 끝날 거다. 그 뒤엔 다른 마을로 가거나, 마가리스로 돌아가는 선택지 밖에 없겠지. 요컨대, 시간 싸움이란 거다.
"오~ 은신처도 수배해 놓은 거야?"
기대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마법사였다.
"저놈들이 조금만 늦게 왔어도 그랬겠지. 근데 이렇게 돼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어? 뭐가? 뭐가 어쩔 수 없어? 설마 날 넘길 거야? 에이 설마?"
여기서 이놈을 괴롭히는 것도 재밌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일단은 임무이니, 안전한 곳에 박아두고 괴롭혀야겠다.
"당분간 마왕성에 가있어라."
저놈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뒤져볼 생각조차 못하는 곳, 멀쩡한 동대륙인이라면 누구나 공포를 느끼는 곳, 마왕성.
아마 시간을 더 들여서 생각해 봐도, 이곳보다 좋은 은신처는 없을 것이다.
"마왕성이라니, 나디아네 집? 그냥 가면 돼? 나디아랑 다 이야기 된 거야?"
"아니. 그러니까 이걸 가져가. 이 녀석이 입장권 대신이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용사의 뒷목을 잡아 올렸다.
"예아!"
용사는 벌써부터 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신이 난 모습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바로 출발하라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아직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지만, 이놈들이니까 혹시 모른다.
"절대로. 절대로 내가 된다고 할 때 까지 가게에 오지 마. 성에만 박혀있으라고. 알겠냐?"
"나도..?"
용사가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아니 넌 말고."
"만세!"
"넌 알겠냐?"
멍 하게 서있는 마법사에게 물었다. 이 판국에도 술 마시는 건 포기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고."
"그럼 빨리 사라져, 둘 다."
이제, 해 줄 건 다 해줬다.
나는 다시 돌아앉아, 미지근해진 잔을 집어 들었다.
"아아아 한 모금만 더!"
용사는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시고 가려는 마법사를 붙잡고 가게를 나섰다.
"하.."
시간과의 지루한 싸움, 그것을 좋아하는 인간은 없다.
“아, 그러고 보니 럼주 얼마 안 남지 않았나?”
그리고 나는, 그 싸움이 더욱 지루해질 예정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