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4화 〉빚쟁이들은 가장 행복할 때에 나타난다 [3] (34/108)



〈 34화 〉빚쟁이들은 가장 행복할 때에 나타난다 [3]

새하얀 대리석 바닥과 정돈된 책상, 그 외의 불필요한 요소를 모두 배재한 공간.


소박함을 넘어 적막이 느껴지는 그곳에는,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빛을 뿜고 있는 의자가 하나 있었다.

그 의자의 주인은, 다른 물건은 어떤  쓰던 상관하지 않지만, 의자만은 항상 최고급의 물건을 고집했다.


똑똑똑


"들어오도록."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회색 갑옷을 입고 있는 금발의 검사. 마가리스에서 합법적으로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 '기동대'의 중대장중 한명인 젠이었다.

어찌됐든 마가리스는 '도시'국가인 만큼, 조직이라 해도 그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때문에, 중대장이라는 자리도 그리 많은 건 아니었다.

"앉게. 그러기 위한 의자니까."

"예."

갑옷의 접합부에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젠은 손님용 의자에 몸을 맡겼다.


훈련이 없는 날이든, 행사를 하는 날이든, 비번이 아니고서야, 그가 갑옷을 벗는 일은 없었다.

중대장이 이 모양이니, 그의 중대는 칼 같은 법규준수로 악명이 높았다. 그의 중대에 온 대부분의 인원이 기동대를 나가거나, 다른 중대로의 전입을 호소할 정도였다.

하지만 조직생활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그런 곳에서도 묵묵히 살아남는 자들이 있다.

몇 십,  백 개의 군법과, 중대 자체의 규칙마저 소화하며 버텨온 그의 병사들은, 숫자는 적을지라도, 하나하나가 가히 정예라고 말할 수 있었다.


"내가 왜 자네를 불렀는지.. 뭐, 알 리가 없겠군."

"말씀대로입니다. 미티스 의장님."

미티스라 불린 여자는,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깍지를 끼었다.


"아.. 그 호칭. 미티스면 미티스, 의장이면 의장, 같은 말이니 하나만 해 줬으면 좋겠군. 말이 길어지거든."


이제는 다 식어버린 차를, 젠에게 따라주는 미티스였다. 연기는커녕,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차다.

"알겠습니다. 의장님."

"그래. 의장이 더 짧고 좋군. 그건 그렇고, 얼마 전에  제국과 플람 공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 건 알고 있나?"


"예, 의장님."


"제국의 정복전쟁은, 이제 세는 게 귀찮을 정도로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네. 전쟁 때문에 뚫린 구멍을 전쟁으로 매우고 있으니 그만둘 수가 없지. 그놈들은 결국, 멸망할 때까지  짓을 반복 할 운명이야."


미티스는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편안한 의자는 생각을 정리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칫하면 다른 곳으로 빠져버릴 수 있었던 대화의 방향을 바로잡는데  역할을 했다.

"아,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지. 중요한 건, 제국과 공국이 우리에게서 무기를 사려고 한다는 걸세."


"무기.. 말씀이십니까?"


젠이 아는 바로는, 마가리스가 타국과 무기를 거래한 기록은, 지금까지 한 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기술의 근원인 대마법사라는 인물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가리스의 기술은 마가리스를 위해서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확고한 주장이자, 의회와의 계약이었다.

"그래, 무기. 제국의 물량공세를 버텨내려면 더 강한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공국에서 먼저 제안이 오더군.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제국에서도 같은 제안이 왔네. 벌써 양측의 첩보원들은 정보전을 시작한 모양이야."


"하지만 마법사님께서.."

"시오가 마법부를 만들었을 때 나에게 말했지.  기관에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은, 마가리스를 위해서만 써야한다고. 그래, 잊지 않았네."


"하지만 무기를 판매한 돈이, 그 무기가 없애줄 마가리스의 잠재적 위협들이, 마가리스를 더 풍족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 마가리스를 위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나, 젠 대장?"


"..."


젠은 대답하지 못했다.

의장의 말은 궤변이다. 그런 것쯤, 평생 검만을 휘둘러온 자신조차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거절할 수 없었다. 미티스를 거부할 수 없었다.


설령 그것이, 마가리스를 구원한, 마법사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해도.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의장님?"


"몇  전, 시오가 행방불명되었던 그때, 그 녀석을 목격했다는 자가 있네. 자네는 거기에 가서, 한 가지 일만  주면 된다네."

~


똑똑똑

이른 아침.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벌써 8시다. 예전엔 7시만 되도 눈이 떠졌는데, 일이 없으니 사람이 이리도 나태해 진다.


똑똑똑똑!

"아, 나간다고, 시발."


아침 댓바람부터 존나게도 문을 두드리는 새끼다.

동면에서  일어난 곰은 미친 듯이 흉포하다는데, 그건 어떤 생물이 건 마찬가지다. 특히, 누군가 깨워서 일어난 경우에는 더.


"대체 어떤 새끼야?"

문을 열자, 검을 소지하고 있는 까까머리의 남자가  있었다.

아무리 사복이라지만, 이 까까머리와 검을 보고도 눈치를 못 챌 리가 없다.


"이른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혹시, 시오라는 이름을 가진 파란머리의 여성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렇게 위험한 곳에 머리도 다 안자란 햇병아리 같은 신병을 데려와서는, 되도 않는 조사를 시키고 있다.

나름 유능한 대장인줄 알았는데, 잘못 본 모양이다.

"아!  사람?!"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신병의 눈이 문고리 만해졌다. 자기가 엄청난 공을 세웠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눈이다.

"반 년 전에 병신아. 니네 대장이 목격자 이야기 안  주더냐?"

"아.. 혀, 협력자님이셨습니까! 이른 아침부터 죄송했습니다!"

신병의 커졌던 입과 눈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에휴, 시발."

말  마디 나눴다고, 벌써 잠이 확 달아났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환자들한테도 자기 이름과 나이 정도만 물어본다는데, 방금 일어난 인간한테 너무 많은 말을 시킨 탓이다.

그것도 한 번이면 그러려니 하지, 이런 일만 벌써 세 번째다. 탐문을 해도 안 겹치게  돌란 말이다. 병신들아.


"뭐야,  또?"

일어난 김에 화장실이나 가려고 했는데, 수건을 들고 세면대에 서있는 꼬맹이가 보였다.


"밥 먹으러 가야 해."

아까까지 잘만 자고 있더니, 밥 때만 되면 귀신 같이 일어나는 놈이다.


"나 똥  거니까 알아서 기다리고 있어라."


"알았어."

아침은 오랜만에 보는 돌멩이 빵과 맹물 스프였다. 아침부터 더럽게도 재수가 없다.


"안 먹어?"


꼬맹이가 물었다. 그걸 말이라고.


당연히  놈 접시는 벌써 하얗게 증발한 뒤다.


"그래, 너나 먹어라."


꼬맹이 쪽으로 접시를 밀었다. 접시가 자리로 가는 중에도, 이미 빵 두개는 꼬맹이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아, 오늘은 왜 이렇게 덥냐, 또."


시기상으로는 곧 봄이 올 시기다. 봄은 분명 적당히 쌀쌀하고 적당히 따뜻한 계절일 텐데, 요즘 날씨를 보면, 더운 날은 유사 여름이고, 추운 날은 유사 겨울이다.


지랄맞은 이상기후에, 사계절이라는 게 정말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까지 들기 시작했다.

날씨라는 놈은 자기 꼴리는 대로 찾아 올 뿐인데, 학자 놈들이 지들 멋대로 계절이라 이름 붙이고 분류 해 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 말이다.


아무튼, 조금 시원한 옷들도 슬슬 준비 해둬야겠다.


그래, 내일부터.


원래 인간이 무언갈 결심할 때, 오늘부터라는 건 없다. 내일부터, 모레부터, 일주일 뒤부터, 영원한 미래에의 기약만이 있을 뿐이다.


아침 식사 후에는 평소처럼 방으로 올라가지 않고 가게로 향한다.


드디어 낮술을 넘어선 아침술을 시작한 거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엄연히 작전의 일환이다.


마을 곳곳에 퍼져있는 등신들이 아침, 점심, 저녁으로 기동대의 움직임을 전해 주고, 나는 그에 맞는 계획을 그때, 그때 생각해낸다. 엄청난 두뇌 노동이지.

이짓을 기동대놈들이 철수할 때까지 반복해야 한다. 집중하기 위해  몇 잔을 마시긴 한다만 문제없다.

"으흐..! 밖에는 춥네 미친."


아침에 더웠던 건, 여관 주인이 난방을 너무 세게 때서인 듯하다.


그럼 내일 옷을 사러 갈 필요는 없겠군. 귀찮았는데 잘 됐다.

“후우.. 후우..”


코끝을 때리고 가는 겨울철의 칼바람과는 별개로, 뒤쪽에서 의도적으로 날 쫓아오고 있는 듯한 기척이 느껴진다.

평소라면 아무런 의심도 없이 제리스라 확정 지었겠지만, 이 시국에 미행 같은 걸 할 놈들은, 그 놈들 뿐이다.

의심될만한 건 전부 떨쳐냈을 텐데, 왜 내 뒤를 쫓는 거지? 다른 등신들이 무심결에 자백하기라도 했나?

"야, 꼬맹아."

"응?"

"뒤돌아보지 말고 잘 들어라.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는 놈들이 있거든? 혹시라도 저놈들이 공격해 오면 반격할  있겠냐?"

"응."


"숨은 붙어있었으면 하니까, 전력으로는 때리지 마라."


"알았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가장 좋지만, 아침의 운세를 봐선,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 두는 게 좋아 보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기가 마을이 아니라 산이라는 거다.

여기라면 몇 달 동안 지긋지긋하게 오른 덕분에 지형도 익숙하고, 무엇보다 인적이 드물다.

반격을 하기엔 최적의 조건이란 거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중턱에 오르자 미행하던 놈들의 기척이 사라졌다.

내 일과를 감시하고 있는 건가? 그런 것 치곤 중턱까지만 따라온 것도 수상하고, 대놓고 기척을 풍겨댔던 것도 수상하다.

나에게 무언가의 혐의가 걸려 있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내가 뭔갈  수 있는 것도 아니지.

다시 마을로 내려간다고 해도, 이미 마을 곳곳에 잠복해 있는 놈들의 눈에 띌 뿐이다. 괜한 의심만 더해지겠지.

지금은 최대한 저것들을 눈치 채지 못한 척을 하고, 평소대로 일과를 진행하는 수밖에 없다.


콰직!


바로 옆의 나무에, 무언가가 박히는 소리가 났다.

그래, 이렇게 어중간하게 미행을 그만둘 리가 없지.

처음부터 대놓고 기척을 풍기던 건, 한 놈의 기척으로 주의를 끌고, 다른 놈들의 기척이 들통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군.

죄다 폐급인 줄 알았는데, 꽤나 체계가 잘 잡혀있다. 설마 아침에 그놈도 일부러 멍청한 척 연기를 했던 건가.

나는 가만히 멈춰선 채, 나무들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일부러 나무에 빗맞힌  알고 있다! 내가 포위됐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겠지! 이래봬도  목숨이 아까운 인간이다! 원하는 게 있다면 한 놈만 내려와서 말해라!"


벌써 대부분의 위치는 파악했지만, 몇 놈이 더 남아 있을 수도 있다.


한 놈만 내려오라는 건, 그 놈들을 찾기 위한 시간을 끌기 위함도 있지만, 이 놈들의 장비까지 파악하기 위함이다.


"단검 하나에 거기까지 다 파악하시다니, 역시 국왕에게 천거할만한 용병이시군요."

뒤를 돌아보자 기분 나쁘게 웃고 있는 장발의 남자가 서있었다.

장비는 며칠 전의 금속갑옷이 아닌, 검은색 천이 주를 이룬, 급소에만 최소한의 철을 덧댄 가벼운 갑옷이었다.


"살아남으려면 눈치가 빨라야지. 말했잖아, 목숨이 아깝다고."

헌데, 검은색인데다 천으로 덮여있어서 그런지, 어떤 장비를 얼마나 소지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없다.


"제 몸을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셔도, 찾으시는 건 안 보일 겁니다."

"뭐, 니 좆? 당연히 안 보이겠지. 바지를 입고 있는데."

"..그거 말고. 저희가 어떤 장비를 사용 하는지 확인하고 싶으신 거 아닙니까?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누구라도 눈치 챕니다. 목숨이 아까우시다더니 다 거짓말이셨군요."


남자가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목소리는 남잔데 머리는 여자처럼 길게 늘어뜨려 놨으니, 입만 다물고 있으면 여자로 착각할 법도 한데, 좆 얘기를 꺼내니 기분이 나쁜 모양이다.

매사에 늘 진지함을 달고 다니는 놈이겠지. 아마 부대 내의 별명은 '꽉 막힌 놈'일 거다.


 막혔다는 말이 어디가 그렇게 막혔길래 그러는지 몰랐는데, 아마 똥구멍일 거다.

똥은 마려운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 닥쳐봐라. 누구든 '꽉 막힌' 사람이 된다.


이 상황에 이런 걸 생각하고 있는 나도 대단하다. 그 술집에 너무나도 물들어 버렸다.

"거짓말을 해 봤어야 거짓말을 하지. 난 살면서 한 번도 거짓말을 해 본적이 없다고."

잡념을 없애고 의미 없는 거짓말을 계속한다.

"입만 열었다 하면 거짓말이시군요. 저희에게 제공한 정보도 전부 거짓이지 않습니까?"


"아, 그래 그래. 인정하지, 거짓말을  하는 인간이 어디 있어? 하지만 이건 알아둬야 해. 내가 하는 거짓말은 선의의 거짓말.."


팍!


또 다른 단검 하나가, 이번엔 발치에 박혔다.

"자꾸 그렇게 시간을 끄시면 좋은 일이 일어나진 않을 겁니다. 한 번만 더 개소리를 하시면 그대로 머리통에 꽂도록 하죠."


"허, 참. 머리가 길어서 농담  번 해 본 건데, 그걸 계속 마음에 품고선, 말하는 것까지 끊냐?"

"그게 아니라 지금 무의미하게 시간을 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 아니라니까. 그럼 한  물어볼까? 자, 봐라. 야! 여기! 이 녀석의 성별이 한 번이라도 헷갈렸던 적이 있던 놈은 내 옆에 검 하나씩만 던져봐라!"

파바바바바바박!


"이 새끼들이! 요즘 풀어주니까 고참이 아주 만만하지?! 돌아가면 전부 대가리 박을 준비나 하고 있어라!"

장발놈이 노발대발 하며 나무들을 향해 소리쳤다. 머리가 긴 남자놈들은 항상 저런 식으로 놀림 받곤 하는데, 저렇게 지랄할 거면 자르면 되지, 왜 계속 기르는지 모르겠다.

"거봐라, 머리가 길면 다들 헷갈린다니까. 그러니까 소심하게 말 끊지 말고  들으라고."

"하.. 그럼 저희에게 말씀하신 것들 중에 선의의 거짓말인 것이 있습니까?"

됐다. 이제 이놈은 완전히 나에게 휘둘리고 있다.

아까 날아온 단검은 총 9개. 눈앞의 이놈까지 합치면 10명. 내가 파악한 인원수와 일치한다.

이제  쓸데없는 개소리는 그만둬도 될 것 같다.

"내 직업이 용병이라는 거."

"하, 그런 뻔한 거짓말은 처음부터 눈치 채고 있었습니다. 진짜 직업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을 뿐이죠. 그런데 그게 어떻게 선의의 거짓말이 됩니까?"

"내 본직을 아는 인간들은 뒤지게 멍청한 놈들이거나, 이미 뒤진 놈들 밖에 없거든."

때가 되었다.

"지금이다, 꼬맹아."


쾅!

황갈색의 연막이, 적들의 시야를 봉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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