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빚쟁이들은 가장 행복할 때에 나타난다 [4]
쿵!
오로넬이 미리 일러두었던 대로, 데이린은 지면을 내리쳤다.
땅이 흔들릴 정도의 큰 충격에, 연막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거대한 모래먼지가 일었다.
그리고 그것은, 수적으로 열세인 오로넬과 데이린에게 든든한 방어기재로 작용하였다.
웃는 얼굴의 남자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상황을 분석해 지시를 하달했다.
이쪽은 열 명, 저쪽은 두 명. 그것도 한 명은 어린 아이다. 이 연기를 어떻게 발생시켰는지는 모르겠으나, 육안으로 보았을 때, 두 사람에게 그렇다할 무기는 확인할 수 없었다.
고지는 우리들이 점령한 상태다. 연기는 저곳까지 닿지 않았다. 이대로 연기가 걷힐 때까지 기다리기만 해도, 유리한 건 여전히 이쪽이다.
무장도, 지형의 유리함도, 이쪽이 우위다. 그렇다면 연기의 의미는 무엇인가?
결론은 하나다.
도주.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형으로 유도하거나, 무기를 얻기 위해, 그것도 아니라면 동료를 부르기 위해.
남자는, 그들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이것 하나뿐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절반은 나무에서 내려와! 먼지에 숨어서 도망치기 전에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의 판단은, 전제부터가 잘못되어 있었다.
"어딜 보는 거냐?"
무장과 지형의 유리함 정도로는, 그들의 우위에 설 수 없었다.
팍!!
황갈색의 연막을 뚫고 날아온 단검이, 남자의 가슴에 박혔다.
남자 자신이 가장 처음에 주의를 끌기 위해 던졌던, 그 단검이었다.
"크헉!"
나무에서 내려온 네 명의 동료들도, 상대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하나 둘 쓰러져갔다.
"여기 있다!"
한 명의 병사가 적을 발견하고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검을 던지지 않는 것은, 아군에게의 오발을 염려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상대가 노리는 바였다.
연막 속에서의 암습과 일대일의 백병전. 적들의 가장 큰 강점인 수적 우세도, 각개전투로 끌고 간다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야아ㅡ!!"
병사에게는 두개의 검이 있다. 모습이 드러나 있는 오른손에 쥐어진 검과, 왼손에 숨겨져 있는 검.
오른쪽의 검을 크게 휘둘러 상대의 주의를 그곳으로 집중시킨 후, 그 틈에 왼쪽의 검을 꺼내, 최단거리로 빠르게 급소를 찌른다.
피하지 않는 이상, 이것을 당해낼 수단은 없다. 한 합이라도 검을 맞대는 순간이, 상대의 마지막이다.
텁!
오로넬은 양팔을 모두 사용하여, 달려드는 병사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무기가 없었으니 당연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팔을 붙든다는 것은, 그만큼 수비에 취약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었다.
병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상대의 복부를 향해 왼팔을 뻗어나갔다.
그러나, 오로넬은 기다렸다는 듯이 병사의 정강이를 발로 찍어 내렸고, 중심을 잃은 병사의 오른손에서 검을 빼앗은 후, 팔꿈치를 이용해, 붙잡고 있던 오른팔을 꺾어버렸다.
"으아악!!"
빼앗은 단검은, 뒤에서 몰래 접근하고 있던 마지막 병사의 가슴팍에 내다 꽂혔다.
"어..어떻게..!"
병사는 가슴을 붙잡은 채 쓰러졌다.
"어떻게 알았냐고? 글쎄. 이 짓거릴 오래하다 보면, 자연스레 느껴지더라고. 살의를 띤 인간의 기척을 말이야."
"으아악!!"
털썩! 털썩!
나무 아래로 병사들이 떨어졌다. 꼬맹이도 제 몫을 해치운 모양이다.
"그러게 적의 농담에 넘어가서 무기를 제공해주면 쓰나."
무수한 동의를 표하며 날아왔던 9개의 단검은, 오직 하나만이 자리에 남아 있었다. 빗나갈 수도 있으니 다 챙겨가라고 했는데, 더럽게 말을 안 듣는 꼬맹이다.
모래먼지가 발생한 직후, 오로넬과 갈라진 데이린은, 땅에 박힌 단검 중 8개를 가지고, 근처의 나무를 빠르게 올랐다.
연기가 사그라들기를 기다리고 있을 네 명의 적을 배제하기 위해.
"어?"
오로넬이 그들이 있는 방향을 누누이 강조했지만, 나무에 오르면서 그 방향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오로넬에게 욕을 먹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 실책이었지만, 친절하게도 데이린의 움직임을 감지한 적들이, 단검을 던져 자신들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데이린에게는 그 검들을 피하는 것도, 그 방향을 알아차리는 것도, 무척이나 간단한 일이었다.
오로넬이 시킨 대로 한 명당 두개씩, 다리와 발을 노려 나무에서 떨어뜨린다.
바람이 불어와 모래연기를 걷어 갔다.
그곳에는 쓰러져있는 10명의 병사들과, 낮술을 즐기는 남자와 스튜를 좋아하는 어린 아이만이 서있을 뿐이었다.
"아이고 허리야. 몇 달 만에 움직였다고 몸이 아주 지랄이네 이거."
몇 달 동안 쓰지도 않던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고 꺾어댔더니 온몸이 쑤셔댄다.
사람이 안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다. 격한 운동을 할 때는 준비운동을 반드시 하도록 하자.
"쿨럭..! 쿨럭..!"
쓰러져있는 놈들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아프니까 내는 소리겠지만, 죽이지 않고 아프게만 해 준 걸 고맙게 생각해야한다.
"야, 안 죽었잖아. 일어나봐 이 새끼야."
제일먼저 쓰러뜨린, 장발놈에게 가서 뺨을 후려쳤다. 이 새끼 암만 봐도 죽은 척 하는 거다.
"후.. 잘 들어라. 여기 있는 놈들 중, 누구도 뒤지진 않았다. 뒤지게 아플 뿐이지. 치료 좀 하고 재활 좀 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 올 거다. 아마."
"근데, 몸에 박혀 있는 검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거 뽑으면 과다출혈로 뒤지거든."
눈앞에 있는 장발놈의 가슴에 박힌, 검의 끝자락을 검지로 툭툭 쳤다.
"으어, 어! 잠깐만요."
"그래, 살고 싶으면 진작에 대답했어야지. 이딴 병신 같은 곳에서 죽기 싫잖아?"
"쿨럭! 워, 원하시는 게 뭐죠?"
"이제 입장이 반대가 됐네? 아깐 내가 이러고 있었는데 말이야."
근처에 있는 적당한 돌을 주워, 장발놈의 머리맡에 받쳐줬다. 적어도 심문을 할 때는 편하게 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한다.
"날 공격한 이유는 뭐지? 내가 알고 있는 건 그날 다 말해줬을 텐데."
"으윽..! 젠 대장이.. 의심스러운 게 있다고.. 데려 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사람 하나 부르는데 이렇게 떼거지로 와서는 단검을 던져댄다고? 그냥 데려오라고만 한 게 아닐 텐데?"
녀석에게 가까이 가자, 내 손을 꽉 붙잡았다. 죽는 건 무섭고, 말하기는 싫은 모양이다. 그래도 대충 무슨 목적이었을 지는 짐작이 간다.
"아무도 안 죽일 거니까 걱정하지 마라. 매일 지나다니는 길에 시체가 널브러져있는 건 싫거든."
"난 이제 가게에 올라갈 거니까, 마을까진 알아서들 가서 치료 받으라고. 암만 그래도 날 죽이려고 한 놈들을 내 손으로 치료해주긴 좀 그렇잖아?"
더 이상 얻어낼 것도 없는 놈들에게 볼일은 없다. 붙잡힌 손을 뿌리치고 가게를 향해 산을 올랐다.
"꼬맹이 너 좀 친다?”
"응, 나 좀 쳐.”
이젠 말도 그럭저럭 잘 받아치는 꼬맹이다. 실전에 투입해 본건 처음이었는데, 꽤 쓸만하다.
늙지도 않는다는데, 그냥 내 경호원으로 계속 써먹을까싶기도 하다. 꼬맹이인 모습이 상대를 방심하게 하기도 좋고 말이다.
끼이익
"뭐야? 왜 아무도 없어?"
분명 아침마다 모이기로 했던 등신들이,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멍청하긴 해도 약속을 어기진 않는 놈들이다. 아까 그놈들이 무슨 짓을 해 둔 게 틀림없다.
"응? 오로넬이잖아. 왜 벌써 왔어?"
문소리를 듣고 저장고에서 올라온 주인장이 물었다.
"왜긴 왜야, 아침마다 다른 놈들이랑 만나기로 했잖아."
"그거 오늘은 안 한다면서?"
"누가 그랬는데?"
"니가 그랬다던데?"
"뭐?"
그놈들은 대체 뭘 하려는 거지?
'등신들이 가게에 오지 못하게 막고, 나를 습격 한다.' 이걸로 녀석들에게 무슨 이득이 있는 거지?
다른 건 제쳐두고, 그렇다면 지금 그 대장이란 놈은 어디에 있는 거지? 마을? 아니면 이 근처 어딘가? 이 근처라면 부하들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까지 몸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아니면 내가 죽이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던 건가? 상대를 믿고 있는데도 무력행사를 하다니, 그건 그거대로 이상하지 않은가?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일단 온 김에 앉으라고.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머리 좀 식혀."
"후.."
이미 주인장이 꼬맹이가 먹을 스튜까지 준비해 두었기에, '어쩔 수 없이' 이것 까지만 먹고 움직이기로 했다.
역시 머리를 식히는데 술 만한 게 없다.
모든 것을 비우고,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지금 내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이다.
선택지는 두 가지, 마을이냐, 마왕성이냐다.
마을로 가는 것은 이 근방에 대장 놈이 잠복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고, 마왕성으로 가는 것은 대장 놈이 마을에 잠복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병사들과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대륙을 넘어온 남자다. 그 정도의 신뢰관계로 보아, 병사들의 목숨을 소홀히 할 그릇으론 보이지 않는다. 아니면 목숨을 걸 정도의 각오니 만큼, 그 부하들의 목숨조차도 임무를 위해 버릴 수 있는 자일 수도 있다.
여기서 문제는, 나도 한 번 마왕성에 들어가면, 이 사태가 종결되기 전까진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거다. 아까의 일로 알 수 있듯이, 나도 확실하게 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장기전이든 단기전이든, 이쪽은 배 째라는 듯이 버티고만 있으면 될 일이지만, 며칠도 안 되서 무력을 행사해 오는 걸 보니, 상당히 서두르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놈들이 더 급해지면, 무슨 일을 벌일지 장담할 수 없다.
어찌됐든 지금은, 그 대장놈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마을보다는 마왕성이 더 안전하겠지.
"다 먹었냐? 간다."
"응."
"진짜 한 잔만 마시고 가려고? 어디로 가는데?"
주인장이 물었다.
그래, 혹시 모르니 보험을 들어두도록 하자.
"마왕성에 갈 생각인데, 혹시라도 다른 놈들이 오면, 내가 급하게 찾았다고 마왕성으로 오라고 해줘."
"그래, 그거야 어려울 것 없지. 뭔지 모르겠지만 조심하라고."
가게에서 고개를 조금만 들어 올리면 마왕성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그곳에 걸어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다.
이 절벽을 따라 비잉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내려갈 때는 곳곳에 튀어나와 있는 큰 돌들을 타고 내려가면 될 것 같은데, 똑같은 짓으로 올라가지는 못하겠다.
인생, 오르는 건 힘들지만 내려가는 건 쉬운 법이다.
"주변에 있는 개미 한 마리의 기척까지 다 보고해야 된다, 꼬맹아."
논리적 추론에 의해 마왕성으로 향하곤 있지만,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놈들의 개짓거리 중, 무엇 하나 정확히 의도를 알아 낸 게 없는 탓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다리 근육이 발달할 것 같은 경사를 올라, 마왕성에 도착했다.
문 앞에는 덩치가 제법 나가는 해골 두 놈이 서있다. 마왕의 말로는, 이 성에서 그나마 전력이 될 만한 게 저 두 놈이라고 했다.
두 놈밖에 없으니, 넓디넓은 안을 지키는 것 보다, 하나밖에 없는 입구를 지키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겠지. 마왕의 머리에서 나온 것은 아닌 것 같지만.
"마왕을 만나러 왔다. 문 열어."
해골 놈들이 창을 두 번 내려치자 거대한 문이 열렸다. 이렇게 당당하게 마왕성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걸, 동대륙 사람들은 믿지 못 할 거다.
꼬맹이와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주위를 살핀 뒤, 조심스레 그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로 들어서자, 또 다른 해골 한 놈이 마중 나와, 마왕에게로 안내했다. 아까 덩치 큰 놈들을 봐서 그런지, 이 놈들은 엄청 왜소해 보인다.
"그래.. 헤라나의 오로넬.. 이몸에게 용건이 있다고?"
용사에게 '용사병'이 있다면, 마왕에게는 '마왕병'이 있다.
여러 상황들이 받쳐줘야 하는 용사와는 다르게, 마왕은 앉아 있는 의자가 어느 정도 편하다 싶으면 바로 도져버리는 게 용사보다 더 귀찮다고 할 수 있다.
"너한텐 관심 없으니까, 용사랑 마법사가 어디 있는 지나 말해라. 용사는 가게에도 안 오던데 살아는 있냐?"
근데 이젠 이런 짓에도 요령이 텄다. 그냥 이놈들이 무슨 개소리를 하던, 나는 내가 할 말만 하면 된다.
"흐흐흐, 용사라고? 그 녀석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몸의 부하들이 만든 요리를 겁도 없이 먹어버렸기 때문이지!"
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됐다는 말이다.
"그럼 그 놈은 됐고, 마법사는 어디 있냐?"
"후후, 운 좋게 살아남은 그 여자는 오래된 연구시설에 가둬버렸지."
마법사는 적당히 먹고 연구시설을 구경하러 갔다는 말이다.
"알겠다, 병신. 계속 수고해라."
내가 발걸음을 옮기자, 마왕은 재미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다시 눈앞에 놓여있던 도장을 집어, 빼곡하게 쌓인 종이에 그것을 찍어나갔다. 저런 놈이긴 해도, 왕은 왕인가보다.
"야, 연구시설이 어디냐?"
복도를 청소하고 있는 해골에게 물었다. 해골은 모른다는 건지 그런 건 없다는 건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문득, 옛날에 흰놈이 연구시설을 다 날려버렸다고 한 걸 떠올렸다.
"제대로 돌아가는 시설 말고. 옛날에 박살난 거."
그제야 해골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연구시설은, 복도에서 문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박살이 났는데 고치지도 않은 문에, 쓸데없이 뭔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으니, 척 봐도 왕년에 잘나가던 방이었던 걸 알 수 있었다.
"뭐야, 너. 왜 여기 있어?"
시설을 둘러보고 있던 마법사가, 복도에서 걸어오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어.. 좀 좆 된 거 같아."
마법사는 말 대신 얼굴로 대답했다. 이 이상 좆 될게 있냐는 표정이었다.
나는 어디가 어떻게 좆 됐는지를 설명해야 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푸욱.
옆구리 부근에, 익숙한 모양의 쇳덩어리가 솟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