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6화 〉빚쟁이들은 가장 행복할 때에 나타난다 [5] (36/108)



〈 36화 〉빚쟁이들은 가장 행복할 때에 나타난다 [5]

 뚝.

새빨간 선혈.


바닥을 물들이고 있는  액체는, 오로넬의 복부로부터 발생하고 있었다.

"으윽..!"


몸을 움직일 수 없다. 고통의 근원에는 낯익은 형태를 한 날붙이가 솟아있었다.


그래. 며칠 전에 봤던, 그 대장놈의 검이.

"여기까지의 안내, 수고했다. 조력자."


젠을 발견한 데이린은, 곧바로 주먹을 내지르려 했다.


"가만히 있어, 꼬맹이!"

그 주먹을 맞았다면, 분명 상대는 상당한 거리를 밀려났을 것이다. 검을 놓친다면 몰라도, 검을 쥔 채로 거리가 벌어진다면, 오로넬 자신의 몸이 어떻게 될  장담할 수 없었다.


"기동대 놈들, 듣던 대로 좆같은  처리구나. 날 잡으러 온 거 아니었어? 저 녀석은 관계없잖아!"

시오가 목소리를 높였다.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창백해져가는 오로넬이 보였다.

"당신이 마법사님이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젠, 당신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자들  하나지요. 은인을 해치고 싶지는 않으니, 원만하게 일이 진행되도록 협조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원..!만 좋아하네.. 씹새끼가..!"

오로넬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 원만한 길은 아니지. 이제 남겨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서 말이야. 그래도 우린, 쓸데없는 피를 보지 않으려 충분히 노력했다. 당신이 마법사님이 계신 곳을 순순히 알려 줬다면, 서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젠은 쥐고 있는 검을 조금 움직였다. 오로넬의 비명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그보다.. 여긴 어떻게 들어 왔냐, 이 미친 새끼야..!"

그럼에도 오로넬은, 멀쩡하게 질문을 했다. 첩보원으로서, 어떤 고문에도 꺾이지 않도록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게 제일 궁금하겠지. 이 아이랑 둘이서, 아주 열심히도 두리번거리더군."

젠은, 한쪽 발을 들어 뒤꿈치를 두어 번 땅에 부딪혔다.

젠의 모습이 사라졌다.

모습만이 아니다. 소리, 냄새, 기척,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을 요소들 중, 무엇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발.. 조각이었냐..!"


처음으로 엔드홀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오로넬이었다. 엔드홀이 있었다면, 저런 건 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하들의 목숨을 빼앗지 않은 것에는 감사를 표하지. 죽음을 각오하고 이곳에 왔다고는 하나, 죽고 싶은 녀석은 없었을 거니까. 뭐, 마왕이란 녀석의 실체를 보니, 괜한 각오를 하고 온 것 같긴 하다만."


젠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 새끼.. 대체 언제부터 내 똥구멍을 그렇게 따라다닌 거냐..!"

"처음부터."


그렇다.

젠은 처음 오로넬과 대화를 나눈 그 순간부터, 그를 믿지 않았다.


자신들은 목숨을 걸어가며 넘어온 서대륙에서, 그것도 마왕성의 바로 아래에서, 태평하게 술이나 마시고 있는 남자다. 친구? 용병?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았을 것은 당연했다.

확실한 것은 왕국에서 이 남자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한 것. 즉, 마법사와 관련된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 그에게 필요한  그걸로 충분했다.


"그럼.. 니 부하들이 죽을 뻔한 것도, 다 지켜보고 있었단 거냐?"

"그래. 하지만 당신이 그들을 죽이든 살리든, 난 여기에 이렇게 서있었을 거다."

"그놈들 실력을 보니 상당히 공들여서 키운 것 같던데.. 정말 그놈들이 죽었어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젠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부하 하나 죽었다고 엉엉 울며 달려가기라도 할 줄 알았나? 그거야 말로 그 녀석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는 행동이다."

"우리는 모두, 마가리스라는 국가를 위해 휘둘러지는 의지 없는 검. 이가 빠지고, 녹슬더라도, 그 몸을 꼿꼿이 세울 수만 있다면, 검은 언제나 주인을 위해 휘둘러져야만 한다. 그 녀석들도, 나도 말이야."

"자기 자신까지 소모품 취급을 하는 거냐? 이거 대가리가 완전 맛이 간 게, 가게에 딱 어울릴 것 같은 놈이구만.."

오로넬의 말끝이 점점 흐려졌다. 바닥에 고인 피가 어느새 오로넬의 양 발에 다 닿을 정도로 퍼져있었다.

"이제 정말 위험하니까 말은 삼가는 게 좋을 거다. 당신이 내 부하들을 살려둔 것처럼, 나도 당신을 살려두고 싶긴 하거든. 자, 마법사님. 그러니  요구에 순순히 응해 주시겠습니까?"

"어차피  데려가겠다는 거 아니야?"


시오가 젠의 눈을 노려봤다.

그녀가 마가리스를 떠난 건, 별안간 연구원들의 질문 공세 때문이 아니다.


만들고 싶은 걸 얼마든지 만들게 해준다던 미티스 의장이, 어느샌가 마가리스에 필요한 물건만을 만들도록 닦달했기 때문이다.

"아, 마법부는 앞으로도 그대로 유지될 계획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법사님이 계신 것만은 못하겠지만, 언제까지고 한 사람에게만 의존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가 온 이유는 단 하나. 그것보다 훨씬 간단한 일입니다."

젠이 말을 끌었다. 자기 자신이 목표가 아니라면, 마가리스가 원할 만한 것은 하나 밖에 없다. 시오는 어렴풋이, 다음에  말이 짐작 되었다.

"마법사님께서 가지고 계신 '열쇠'를 받아갈  있겠습니까?"

'열쇠'. 그것은 한손으로도  수 있을 만큼, 극소수의 인간들만이 존재를 알고 있는, 어떤 방으로 들어가기 위한 물건.


마가리스라는 국가의 존망을 결정지을  있는, 세상에  하나만이 존재하는 물건.


그 책임을 짊어진, 마법사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이다.

~

마가리스 의회 의장실. 미티스는 오랜만에 의자에서 일어나,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 어디에도 이 정도로 진보된 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 여름에도 시원하게 지낼  있고, 한 겨울에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으며, 노동자들이 밤늦게 귀가할 때,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빛까지 있었다.


'정말 내가 만들고 싶은 거 다 만들어도 돼?'

이 거리를 만들어낸 자가, 의회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았을 때, 해맑게 웃으며 대답한 말이다.


그로부터 몇 십 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20대의 모습을 유지한 채, 여전히 어린 아이 같은 미소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웃지 않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나.

'미티스, 보여줄게 있어. 따라와.'


어느 날, 그녀의 호출에 불려간 텅 빈 방. 그곳에는 충격적인 물건이 있었다.

'내가 너한테 처음 했던 말. 기억하지?'

과학과 전쟁은 같은 말이다. 과학의 발전은 곧 전쟁의 발전이고, 과학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와 같다.


'그래서 내가 의회 놈들에게 말한 조건이 뭐였지?'

타국에 팔기 위한 물건은 절대 만들지 않는다. 또, 만들어진 물건을 타국에 파는 것도 금지한다.


'요즘 들어 의회에서 계속 되도 않는 의제가 나오는 모양인데, 내 대답을 미리 말해 줄게.'

그녀는 이 텅 빈 공간에 존재하는 유일한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하얗게 칠해진 벽들 중, 하나의 색이 벗겨지며 반대편에 있는 잡동사니들이 가득한 공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버튼을 누르자, 그 잡동사니들이 순식간에 폭발하며 재로 변했다.

이건.. 대체.. 라고 말하는 미티스에게, 그녀는 담담하게 말할 뿐이었다.

'내 말을 어겼을 때, 마가리스에 닥칠 미래야. 지금은 범위를 이  하나로 줄였지만, 마음만 먹으면 이 도시는 물론이고, 너희가 팔아치운 물건을 사간 녀석들의 나라에도 같은 일이 벌어질 거야.'


'그리고 이 방은, 내가 가진 열쇠로 밖에 열리지 않으니까, 개수작 부릴 생각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그날 이후로, 미티스는 그녀와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훗,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였다면, 그 자리에서 열쇠를 빼앗아 버렸을 텐데 말이지."


미티스는 책상 위에 있는 작은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일과 관련된 물건으로만 가득 찬 그녀의 책상에서, 그녀의 소유물 중 유일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물건.

그녀를 이곳까지 데려와준, 소중한 물건이었다.

"역시.. 나이를 먹으면 후회밖에 남지 않는군."


~

"열쇠라고? 대체 그걸 누구한테 들었지?"

시오는 서대륙에서 여태껏 보여준 적이 없는 눈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향한 격한 분노가, 그 표정에서 전해져왔다.


"누군지는 알고 계실 겁니다. 이 이상 시간을 끌어봤자, 이 남자의 목숨만 위태로워질 뿐이구요. 지금도 충분히 한계를 넘긴 상태라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말대로 오로넬의 전신은 땀과 피로 범벅이 돼 있었다.

"하.. 다짜고짜 검부터 찔러 박는 놈을 뭔 수로 믿냐,  등신아."

그럼에도 오로넬은, 젠의 말을 듣고 웃고 있었다.


"아직   힘이 남았다니, 경이로운 정신력이군.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머리를 박아서라도 우리 부대에 데려오고 싶을 정도야."


젠은 더 이상 검을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다음번에 움직일 때는 검을 빼낼 때뿐이다. 그 직후 치료하지 않으면, 이 남자는 목숨을 잃는다.


"어이, 미티스의 개새끼. 열쇠에 대해 알고 있다면, 방에 대해서도 들은 건가?"

"물론입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물건을 만들어 내시면서, 그것들을 파괴할 물건까지 만들어 내시다니. 역시 마법사라고 불리는 분답습니다."


"그래.  방은 파괴를 위한 방일 텐데, 어째서 미티스가 지금 와서 그 방의 열쇠를 탐내는 거지?"

"그건 당신께서는 몰라도 될 일입니다. 중요한 건, 당신을 구하러 온 남자는 이미 죽기 일보 직전이고, 남자를 그렇게 만든 자가 당신 앞에 서있다는 것, 그리고 그자가 열쇠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이 남자가 죽으면,  다음은 이 아이,  다음은 당신이 죽을 뿐입니다. 설마 어린 아이까지 말려들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젠은 검을 잡고 있는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열쇠는, 마가리스의 기술이, 그 근원이 되는 먼 미래의 기술이, 세상으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족쇄이다.


한 번 기술이 퍼지고, 그것을 연구하기 시작해도, 당장은 위험하지 않다. 수많은 실패작들과, 모양만 비슷한 모작들만이 가득할 것이다.

허나, 그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그 기술은 차츰차츰 발전해 나간다. 언젠가는 자신의 영역에 도달하는 자도 나타나겠지.


하지만 문제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녀가 우려하는 것은,  기술이, 이 시대의 기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시대를 앞선 기술은, 전쟁의 양상을 바꾸기에 충분하고, 기술을 등에 업은 전쟁은, 수많은 인명피해를 동반할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피범벅이 된, 저 남자의 상태도 심각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일각을 다투고 있다.

그를 죽게 하기도 싫다. 천 년의 세월을 살면서, 처음으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녀석들과 만나게 해  놈이다.

서로의 손익을 따지는 동료로서의 친구가 아닌, 면전에 대놓고 욕을 박을 수도, 좆같을 땐 술   따라줄 수도 있는, 그런 개 같은 놈들을 말이다.


시오는 고민했다. 눈앞의 목숨 하나와, 보이지 않는 수 천, 수 만의 목숨. 수치로 따졌을 땐, 후자를 고를 것은 명백했다. 그러나  하나의 목숨이, 자신에겐 더 없이 소중했다.


주머니 속의 손은, 이미 '열쇠'를 쥐고 있다. 이것을 건네기만 하면, 눈앞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친구를 구할 수 있다.

이제, 결단을 내려야했다.

"그 순서는 내 생각과 좀 다르군..  다음에 죽는 건 너다."

하지만 시간은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오로넬이 마지막으로 쥐어짠 힘을 토해내고 있었다.

"저승에서 보자고."

오로넬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안 돼!! 죽지 마, 오로넬!!!"


앞으로 쓰러져 가는 오로넬과, 검을 빼내는 젠.


두 사람의 거리가 최대로 벌어졌을, 그때였다.


"..나 아직  뒤졌다, 이 새끼야.."

간신히 귓가에 들리는 말과 함께, 오로넬은 바닥으로 엎어졌다.

검이 뽑힌 여파로,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양의 피가 뿜어져 나왔다. 시오는 곧바로 자신의 가운을 찢어, 지혈을 하기 시작했다.

젠은 그것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인질인 데이린을 붙잡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 자신의 앞에서 날아오는 무언가를 피해야만 했다.


쾅!

젠은 늦지 않게 조각을 사용하여, 주먹의 궤도가 바뀌는 일 없이, 안전하게 피할 수 있었다.


데이린이 진심으로 내지른 주먹에 닿은 벽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실내로 들어오며 잠시 동안 시야를 어지럽혔다.

"이거였군. 당신 충고가 없었으면 진짜로 죽을 뻔했어. 나는 당신을 죽여 버리고 말았지만, 당신은 우리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주는군."


아니, 그게 아니었다.

데이린의 목표는 처음부터 벽이었다.

다시 주먹을 내지르려 하는 데이린을 주시하고 있던 젠은,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야, 자신의 뒤에서 다가오고 있는 희미한 기척에 눈치 채고, 급하게 몸을 틀었다.


"..!"

그래, 모든 것은 부서진 벽으로부터 저 남자를 불러오기 위해서였다.

"죽어라."

외팔의 검사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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