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8화 〉빚쟁이들은 가장 행복할 때에 나타난다 [7] (38/108)



〈 38화 〉빚쟁이들은 가장 행복할 때에 나타난다 [7]

"어떡하지.. 어떡하지.."


흰놈이 싸우는 건 처음 본다며 들떠있는 용사와는 달리, 성의 주인인 마왕은, 방에 들어온 이후로 계속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다.


"아, 귓가에 거슬리니까  닥쳐."

하지만 나는 환자다. 지금 이 순간,  공간에서 가장 지위가 높다고 할 수 있지. 절대안정이라는 말은, 절대 권력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미, 미안.. 근데.. 근데.. 아, 어떡하지.."

"적어도 무슨 일인지 말이라도 하던가. 더럽게 앵앵 거리네."

"으으으, 미안해.."


평소의 멍청하고 거만한 태도는 어디가고, 땅바닥을 기는 벌레마냥 한껏 찌그러져있는 마왕이었다.

"그래서 뭐냐고."

"그, 그게.. 지크 녀석이 검을 뽑아 들었잖아?"


"그게 왜."

"그 녀석이 가진 조각이 여섯개나 되는  알지?"


"그래서."

바로 결론만 말하면 될 것을, 길게도 설명하는 놈이다.

"그래서고 자시고, 아직 우리가 멀쩡하잖아! 저 녀석이 조각을 썼으면 여긴 진작에 박살났다고!"


"잘 됐네."

대체 이걸 듣고 어디서 불안증세를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혹시 그거라도 쓴다면..  성은.. 나는..!"


"아, 진짜! 똑바로  하라고 똑바로! 대체 그게 뭐냐ㄱ..!"


쿠구구궁!!!!


-어어!!


성 전체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흔들렸다.


닫혀있던 문이 벌컥 열리며, 말도 안 되는 강풍이 불어왔다.


"으헝헝!! 이제 이 성은 끝이야!!"

마왕의 절규소리와 함께, 마왕성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


'무기 같은 건 버리고, 다 같이 술집에 둘러앉아서 실없는 이야기를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는 걸.'

아.. 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언제까지고 내 안에 남아있는, 과거의 기억.


'지크, 니가 내 부관이라 정말 다행이야.'


레기아..!

'다음번에 만날 땐, 개다리 춤이라도 출 테니까.. 이런 용사를.. 나를.. 용서해줘.'

웃는 얼굴로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금발의 여성.

자신이 지켜줬어야 했던, 상냥하고, 강인한 사람.

아무리 그녀를 구하기 위해 발버둥 쳐도, 내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몇 번의 각오를 다져도, 몇 번을 무시하려 애써도, 머릿속에서 영원토록 반복되는 이 기억은, 지크의 정신을 빠르게 좀먹어 갔다.

그가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약 30분.  시간이 오기 전에, 눈앞의 남자를 처리해야 한다.

그녀가 바라던, 실없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지크를 감싸고 있던 빛줄기가, 강한 파동과 함께 사라졌다.


쿠구구궁ㅡ!!


~

무너지는 건물의 잔해들을 밟고, 가까스로 바닥까지 도착한 젠은, 갑옷에 묻은 먼지들을 털어내고 있었다.

거대한 성을 한순간에 무너뜨린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잔해더미에 깔리기라도 한 건가. 양측 모두에게 그것만큼 맥 빠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때였다.

젠은 가슴이 멎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수많은 사지를 해쳐오면서, 생존본능이 이토록 강하게 몸을 이끈 적은 없었다.


쿵!


뒤에 있던 잔해더미가 깔끔하게  동강이 나며 앞으로 흘러내렸다.

뚜벅 뚜벅.

흩날리는 먼지 속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오른쪽이 있는 편이 훨씬 편하군."


"뭐..!"

눈앞에는 절망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현현한 것 같은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외팔이라는 악조건을 보란 듯이 짊어지고 있는데도, 승리를 장담할  없는 괴물. 그 괴물에게 존재해선 안 되는 오른팔이, 그 자리를 당당히 꿰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어서라. 힘으로 찍어 누른다는 게 뭔지, 직접 보여주마."


젠은 씁쓸한 웃음소리를 내며, 무릎을 딛고 일어섰다.


그것은 절망의 뒤에 찾아오는 것.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했을 때 인간이 느끼는 감정. 허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퇴직금까지 미리 받아  걸 그랬군."

첫 합을 나눈 그 순간부터, 이미 자신의 패배는 정해져 있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했던 자신에게, 죽음이 찾아올 줄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더 이상 움직이기를 거부하는 팔과, 서있기를 거부하는 다리를 억지로 당겨, 자세를 잡았다.

움직인다 한들,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안다.


"후..!"

그래.. 이것이 나의 마지막..


죽음을 확신한 지금이기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


내가 검을 쥔 이유, 그것으로 무얼 이루려 했는가.


그것은 마가리스를 위해서도, 하물며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삶의 흔적.

내가 이 세상에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것.

검사로서의 죽음.

수많은 목숨이 덧없이 져가는 전장 속에서, 바라던 것은 오직 그뿐.


"흐아아아ㅡ!!"

캉! 캉! 캉!

찢어진 근육이 움직인다.

부러진 뼈가 움직인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육체가 스스로 걸어둔 제약이, 끊어진다.


살기 위해서가 아닌, 죽기 위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그 순간까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을, 마지막으로 검을 마주하게 된, 저 남자의 눈에 새기기 위해.

그것이, 검사의 죽음.


"..!"

상대가 공격할 틈도 없이 빠르게, 반격조차  수 없는 속도로, 공격을 이어나갔다. 운 좋게 유효타를 먹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죽음을 각오하고서야 겨우 끌어낼 수 있었던  속도를, 상대는 당연하다는 듯이,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모조리 받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나도 빠르게, 그 순간은 찾아왔다.

팅!


손에서 튕겨져 나온 검이, 등 뒤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힘을 줘도, 자신의 자세만 무너져갈 뿐, 검이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상대의 검은, 이미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길고 길었다.

드디어 나에게 죽음이 찾아왔다.


미련은 없다.


내가 이룩해 온 모든 것들은 저 남자의 눈을 통해, 세상에 남을 것이다.

콰직!

~


약했다.

가난하고, 힘도 없는, 마가리스는 그야 말로, 언제 다른 국가에게 먹혀도 이상하지 않은 도시였다.


하지만 어떤 국가도, 마가리스를 가지려 들지는 않았다. 먹자니 유지비가 걱정이 됐고, 내버려두자니 그곳에 있는 자원이 탐났다. 바로 인간이다.

온갖 국가들이, 온갖 이유를 붙여가며 마가리스의 인간들을 빼앗아갔다. 어떤 이는 전장으로, 어떤 이는 사창가로, 또 어떤 이는 노역장으로, 마가리스는 동대륙의 공공재나 다름없었다.


어린 시절, 나는 멋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검의 길에 들어섰다. 멋으로 시작한 일이 얼마나 갔겠냐 만은, 나는 달랐다. 그만둘 겨를도 없이, 전장으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얼굴도 모르는 인간들을 죽였다. 이름도 모르는 동료들이 죽어갔다.

억울하게 끌려와서 죽어가는 와중에도, 그들은 살아남은 동료들에게 말했다. '마가리스를 부탁 한다' 고.

당연한 일이지만, 똑같이 끌려온 데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검을 휘두르는 것뿐인 내가, 그런 부탁을 받는다 해도,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몇 년간, 전장에서 의미 없는 살육을 반복했다.


살아남기 위해.

그곳에 적과 아군 같은 건 없다. 나에게 검을 휘두르는 자는 곧 적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곧 아군일 뿐.

어느샌가 동료들이 죽어도, 눈물  방울 나오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장례를 치르고, 아무렇지 않게 검을 쥐고는, 아무렇지 않게 적들을 베었다.


내일은 죽겠지. 내일은 죽겠지. 이제는 하루하루 죽을 날 만을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 하나의 서신이 도착했다.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다.

이제 싸울 필요는 없으니 돌아오라고.


마가리스를 위해, 용케도 살아남아 주었다고.


몇 년 만에, 눈물을 흘렸다.

돌아온 마가리스는, 떠났을 때와는 다른 도시가 되어있었다. 처음 보는 건물들이 수두룩했고, 거리에 사람들도 넘쳐났다. 아이들은 행복해 보였고, 시민들도 부족함 없이 지내는  했다.

 모든 게 마법사라고 불리는 사람의 덕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를 그 지옥에서 꺼내준 건, 그 마법사라는 사람을 찾아낸, 미티스 의장이었다.

의회에서 나를 호출했다.

의장이 제안할게 있다고 했다. 야전 경험이 풍부한,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문득, 동료들의 말이 떠올랐다.

이런 나라도, 마가리스를 위해  수 있는 게 있었다.


내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죽이기 위해 휘둘러 오던 검은,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휘둘러졌고, 자신만을 위해 휘두르던 검은, 국가를 위해 휘둘러졌다.

이번의 일도 그랬다.


의장은 말했다. 이 일은 마가리스에 진정한 자유와 부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빼앗아갔던 놈들에게, 복수 할 수 있다고.

복수 같은  상관없었다. 그건 나에게도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지금도 그 광경을 꿈에서 보곤 하지만, 동료들이 원했던  그런  아닐 것이다.


나는 마가리스를 위해, 이곳에 왔을 뿐이다.


하지만 최후의 최후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음의 문턱 앞에 서서야 깨달았다.

전장이 바뀌었을 뿐, 나는 여전히 자신만을 위해 검을 휘둘러 오고 있었다는 것을.

그저 명분이라는 거대한 기둥 뒤에 숨어서,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살육을 반복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런 나의 앞에 나타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어도 끄떡도 하지 않는, 눈앞의 남자를 보며 눈을 감았다.

~

"아아악! 씨발!"


아래층으로 떨어지면서 다시 피가 터져 나왔다. 마치 거품이 넘치는 맥주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뒤졌다고 생각했다.

"오로넬!!"


마법사의 목소리다. 내 욕 소리를 듣고 위치를 알아차렸나 보다.

아무것도  보이는 곳에서  번에 날 찾다니, 하늘이 어지간히도 내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모양이다.

"괜찮아?"

"아니."


"상처가 또 벌어졌잖아! 무리하지 말라니까."


"내가 무리한  아니라 바닥이 갑자기 부셔졌잖아 미친놈아! 아아악, 시발 죽겠네!"


"아무튼,  번 더 벌어지면 진짜로 뒤지니까, 머리 아래론 움직이지도 마."

마법사가 응급조치를 끝내고 손가락질을 했다. 그럼 여기에 누워만 있으라는 건가? 침대고 뭐고, 떨어지면서  박살이 났는데, 잔해들 사이에서 시체처럼 누워 있으라는 건가?

"콜록, 콜록. 어, 환자 여기 있네. 야! 여기야!"

기침을 하며 잔해를 헤집던 마왕이, 나를 발견하고 다른 등신들을 호출했다. 곧 용사와 꼬맹이가 달려와 나를 부축했다.


 이상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왜 이렇게 조용하냐? 설마 흰놈이 진  아니냐?"


"무슨 개소리야! 그 놈이 그렇게 쉽게 지는 놈이었으면, 내가 이러고 있지도 않았다고!"

마왕이 화를 냈다. 거 질 수도 있지. 어디까지나 자기가 약해서  게 아니라, 흰놈이 강해서 진 걸로 해두고 싶은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부축을 하려면 꼬맹이가 아니라, 마왕 니가 해줘야 되는 거 아니냐?"

부축 받은 채로 끌려가는 거라, 상처가 벌어질 걱정은 없는데, 왼팔은 꼬맹이가 잡고 오른팔은 마법사가 잡고 있으니, 높이 차이 때문에 불편해 죽겠다.

"아 옷에 피 묻는 건 싫은데."


"니 대가리에서 피 나게  줄까?"

마왕은 말없이 꼬맹이와 자리를 바꿨다.


"저기다! 지크 아저씨야."


용사가 가리킨 곳에는, 깔끔하게 절단된 잔해들과, 그 사이에 서있는 흰놈, 그리고 갑옷이 깨진 채로 누워있는 대장놈이 보였다.

"왔군. 상처는 괜찮은가보지? 누워있지도 않고 말이야.

흰놈이 검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성을 부순 건 저 검의 힘인가? 외팔로도 이 정도라니, 대체 오른팔이 멀쩡했을 때는 뭐랑 싸웠던 거냐.


"잘 누워있었는데 갑자기 바닥이 무너지더라고. 그래서 범인을 찾고 있지. 너 혹시 아는  있냐?"

"..모르겠군."

누워있던 대장놈이 꿈틀거렸다.

"쿨럭, 쿨럭. 허.. 또 살아남았나.. 이번엔 정말 죽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분명 처음 봤을 때, '죽어라' 고 하지 않았나, 당신?"


"마음이 바뀌었다. 죽는  너무 쉽지. 네놈은 살아남아서 영원히 굴러줘야겠다."


"뭐야, 안 뒤졌네? 반갑다 십새야. 덕분에 배로도 숨  수 있게 됐어."

"하, 여긴 정말 미친놈들 밖에 없는 곳이군. 배를 뚫리고도 저런 인사를 할 수 있다니."


다짜고짜 배를 뚫은 게 더 미친놈이지.

"진짜 왜 살려둔 거냐,  새끼? 돈이라도 받았냐?"

생각해보니 화가 나서 흰놈에게 따졌다. 지금 내 상태론 이 놈을 죽이긴커녕, 배에 구멍을 뚫어줄 수도 없다.


"갑자기 떠오른 게 있어서 살려뒀으니, 토 달지 마라."


"뭔데."


"이거. 고쳐야 되거든."


흰놈이 무너진 천장을 가리켰다.

"니가 부셨잖아."

"하지만 내가 이겼지."


이게 말이냐 똥이냐?


"패자는 승자의 뜻에 따라야지. 안 그런가, 검사 양반?"


"이럴 때만 검사 취급을 하는군.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표정을  놓고선 말이야. 하지만 뭐.. 그래, 승자의 뜻에 따라주지. 어차피 오늘 안에 열쇠를 회수하지 못하면, 임무는 실패였다."


천장을 바라보며 자조하는 대장놈이었다.

"그럼 이 놈이 알아서 고칠 테니까, 나한테 뭐라 할 생각 하지마라, 나디아."


마왕을 노려보며 흰놈이 말했다.

"아,알았어."

마왕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이 열쇠가 필요했던 건, 내가 '그 방'에 들어가는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티스가 '그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지?"

마법사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정확합니다. 역시 마법사님이시군요."

"미티스가 생각하는 거야 뻔하지."


땡그랑!


대장놈의 머리맡에 무언가 떨어졌다.


"그렇게 갖고 싶으면 가져가라. 그거."

그것은,  배를 뚫어가면서까지 요구하던, 거지같은 모양의 열쇠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