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빚쟁이들은 가장 행복할 때에 나타난다 [8]
"이 시발, 사람이 뒤지던 말던 아득바득 들고 있더니, 갑자기 그걸 줘? 누구 놀리냐, 이 새끼야?"
용사에게 부축 받고 있는 팔을 뻗어, 마법사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어지간히 중요한 물건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간단히 내어줄 물건이었으면 나는 뭐 하러 사경을 헤맨 것인가.
"아, 아! 주려고 했어, 주려고 했어! 아까도 주려고 했다고!"
마법사가 고통에 몸부림 쳤다. 저딴 변명은 꼬맹이도 하겠다.
"어째서 이걸 제게..?"
대장놈도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이년이 조금만 더 빨리 저 빌어먹을 물건을 줬다면, 저놈도 저 꼴은 나지 않았겠지.
"나는 내가 만든 물건들을 팔아치우려고 열쇠를 노리는 줄 알았어. 그런데 그건, 마가리스에 단기적인 이득밖에 되지 않아. 더 이상 그걸 만들어낼 내가 없으니까."
"미티스는 다른 건 어떻게 되도 상관없는 년이지만, 마가리스에 해가 되는 게 있다면 고려조차도 하지 않는 년이야."
"그런 년이, 버튼 하나로 도시 전체에 퍼져있는 물건들을 폭발 시킬 수 있는 물건을 원한다? 그럼 그것조차도 이득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무언가를 떠올린 거지."
"예를 들어, 그 폭발할 물건들이 마가리스가 아닌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던가."
대장놈은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법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이게 필요한 이유는 '마음에 들지 않는 국가를 수뇌부 째로 날려버리기 위해.' 대충 그런 이유겠지."
"..거기까지 알아챘으면서, 이걸 저에게 주신다는 겁니까?"
"그런 이유라면 괜찮고말고."
저게 더 안 좋은 거 아닌가? 알 바는 아니지만.
"어차피 그 방에 대한 이야기는 전부 가짜거든."
"지금.. 무슨.."
대장놈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 방 자체가 미티스를 속이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고. 눈앞에 있는 잡동사니를 터트리는데도 그 지랄을 했는데, 무슨 수로 국경 너머에 있는 물건을 터트려? 뭐, 덕분에 의회 놈들의 간섭 없이 맘 편하게 놀 순 있었지."
"하하하.."
대장놈은 힘없이 웃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 고생을 했는데, 그게 전부 뻘짓이었다고 선고받은 거다. 미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로, 그 허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가져가고 싶으면 가져가. 여기부터 다 고치고."
이미 정신적 충격이 상당할 대장놈에게 한 번 더 뼈를 때리는 마법사였다.
애초에 처음부터 사정을 말하고 열쇠를 찾으러 왔다고 했으면, 술집에서 만난 그날에라도 바로 끝날 수 있었던 일이다.
이 꼴이 난 건, 괜히 그걸 어렵게 만든 저놈 잘못이지. 결국 애꿎은 부하들과 내 배만 곱창을 내놨다.
"여길 전부 고치려면 일주일로는 턱도 없겠군요. 그 뒤에 마가리스로 돌아간다고 해도, 이미 임무는 실패에, 가져갈 열쇠도 쓸모가 없는 물건인 걸 알아버렸으니.. 죽지 못한 게 후회스러울 뿐입니다."
"죽고 싶다면 죽으면 된다. 무엇보다 여기는, 잔악무도한 마왕이 다스리는 서대륙이니까 말이다."
흰놈이 검을 뽑아들고 대장놈에게로 걸어갔다.
콰직!
부서진 갑옷 사이로 보이던, 마가리스의 문양이 부셔졌다.
"이걸로 넌 죽었다. 누군가 널 닮은 사람을 봤다고 해도, 그건 마왕이 만들어낸 인형일 뿐이지. 안 그래, 나디아?"
"으,응 맞아."
"인형이라.. 그래.. 그렇군. 더 이상 쥘 검도, 껴입을 갑옷도 없지.. 무엇보다, 이제 이 짓을 하기엔, 몸이 너무 말을 안 듣는군.."
"나디아, 지금이 몇 시지?"
"몰라. 니가 다 부수는 바람에, 시계고 뭐고 남아 있는 게 없잖아."
"뭐?"
"아.. 아니야, 아무것도. 아마 한 시쯤.. 됐을 거야.."
"흠.. 그래."
검을 집어넣고, 흰놈은 잔해들 사이를 해쳐나갔다. 분명 가게로 가는 거겠지.
"그럼, 이제 우리도 내려갈까?"
용사도 분명 가게로 향할 거다.
"그럴까? 아, 그전에 너. 지크한테 걸린 이상, 도망쳐봤자 다시 잡혀 올 뿐이니까, 딴 생각 말고 일할 준비나 하고 있으라고."
마왕이 대장놈에게 당부했다.
대답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후련한 얼굴로, 텅 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등신 한 놈이 있을 뿐.
"생각보다 별 일 없었네. 그치?"
"넌 아무것도 한 게 없으니까 그렇지, 유사 용사새끼야. 어디 가서 용사라고 하지마라 쪽팔리니까."
"아니, 그건 니가ㅡ"
"!^@$*&&"
물론, 이놈들보다 더 등신 같은 놈들은 세상 어딜 뒤져봐도 없을 거지만.
그 등신들의 부축을 받고 있는 나는, 어쩔 수 없이 오늘도, 술집으로 향했다.
~
똑똑똑
"들어오게."
무겁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가 들어왔다.
11중대가 돌아와야 할 날짜로부터 3일이 더 지났다.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둘 중 하나는 전해져올 시기다.
"의장님 앞으로 편지가 한통 왔습니다.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적혀있지 않습니다."
"알겠네. 책상 위에 올려두게."
비서는 분부대로 편지를 올려둔 뒤, 고개를 숙이곤 방을 나갔다.
"흐음. 이 시국에 편지라.. 좋은 쪽은 아니겠군."
미티스는 어딘가의 왕실에서나 쓸법한, 황금색의 편지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미티스 이 거지같은 년아」
첫 문장을 읽자마자, 누구로부터 온 편지인지는 알 수 있었다. 욕을 하는 걸 보니, 11중대와도 만난 것 같고, 자신의 계획도 어렴풋이 알아챈 듯하다. 참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는 한 문장이다.
「니가 마가리스를 위해 여러 개짓거리를 하고 있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이번만큼은 도가 넘었다. 마가리스 하나를 위해서 동대륙 전체를 날려버리겠다고? 길바닥에 주저앉은 거렁뱅이도 그런 생각은 안 하겠다.」
틀렸다고 생각하는 일은 가루가 될 때까지 까 내린다. 시오는 여전히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아직도 마가리스가 위험하다고 생각해? 아니면 이제 와서 복수라도 할 셈이었나? 이미 몇 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그걸 원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렇다고 그놈들이 한 짓이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똑같이 갚아줘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고.」
미티스의 생각은 달랐다. 이건 복수이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강자로서의 당연한 행동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제국과 공국을 보면 알 수 있다.
제국은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했기에, 공국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먹고 덩치를 불려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적어도,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봐온, 이 시대의 모습은 그랬다.
마가리스도 한때는 먹히는 쪽이었다. 약하고, 가난했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기술이라는 힘이 있고, 그것을 무기로써 휘두를 수 있다. 당당히 포식자들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다.
미티스는 그저, 제국과 공국이 가진 어금니보다, 마가리스의 어금니가 더 강력하다는 판단 하에, 둘을 먹어치울 계획을 세웠을 뿐이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편지를 쓰는 걸 보면 감이 오지? 니가 보낸 놈들이 어떻게 됐을지.」
서대륙에 대해선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따라서 최악의 상황으로 죽음까지 고려해야 했다. 그리고 그 정도의 임무 수행이 가능 한 건, 11중대밖에 없었다.
그 11중대라는 정예 중에서도, 죽음을 각오한 열 명의 정예를 더 추려낸 것이 이번 임무에 지원한 자들이었다. 설령 임무는 실패할지라도, 목숨을 잃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완벽하게도 틀렸다.
최전선에서 일어나는 일을, 안전하고 편안한 곳에 앉아있는 자신이 헤아리는 것은 오만이었다. 그 오만 때문에, 열 한 명이나 되는 마가리스의 인간을 잃었다.
「아, 마지막으로, 나한테서 열쇠를 뺏어 갔어도, 니 계획대로는 안 됐을 걸? '그 방'은 너희들 의회를 속이기 위해 꾸민 거짓말이었으니까.」
"..."
명치를 맞은 것만 같았다.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지금껏 그 말에 속아, 마법부에게 꼼짝도 못하던 의회로써는 잘 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말이 진실일 것이라는 일말의 의심도 없는 믿음을 토대로 모든 계획을 구성한 그녀에게는, 그 모든 것이 백지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시발.. 지름길인줄 알았더니, 막다른 길이었나.."
미티스는 서랍을 열어 하나밖에 남지 않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끊은 지는 몇 년이 지났지만, 한 번이라도 피워 본 적이 있는 사람은, 힘들거나 짜증나는 일이 생길 때, 언제나 이것을 찾게 된다.
툭
성냥을 꺼내기 위해 몸을 움직일 때, 편지 사이로 무언가 떨어졌다.
종이로 만든, 손바닥만 한 무언가가.
"이런 걸 보내다니, 완전히 놀리는 거군. 이젠 어떻게 하던 건지 기억도 안 난다고."
미티스는 책상 한편에 놓인 작은 상자를 열었다. 그 속에는 눈앞에 떨어져있는 것과 같은 모양의 종이가 있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탓인지, 누렇게 되는 것을 넘어, 몇몇 부분은 가루가 되어 버렸지만, 미티스는 여전히 그것을 간직하고 있었다.
가족도, 집도, 발언권도, 빼앗길 뿐이었던 그녀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타인에게서 건네받은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뭐라고 불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요상한 모양의 종이와 함께, 편지의 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추신. 동3 북6 서2 남5」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 종이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머리로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손과 눈이,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멋대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종이 사이에 끼워 넣고, 적혀있는 숫자만큼 상하좌우로 움직이며, 숫자의 앞에 있는 방위와 같은 곳에 쓰여진 글자를 읽는다.
"길은.. 많다.. 천천히.. 가라.. '길은 많다, 천천히 가라.' 하!"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 길을 막은 장본인이, 잘도 저런 소리를 한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 멋대로 사는 인간이다.
'어디서 출발해서 어디로 가든, 길은 있어. 막다른 길도 엄연한 길이지. 혹시나 막다른 길을 만나더라도 포기하지 마. 지나쳐왔던 갈림길들을 쑤시면서, 다시 출발점까지 걸어가면 돼. 니가 걸음을 멈추지 않는 이상, 목적지는 반드시 니 앞에 나타난다고."
수 십 년도 전, 같은 모양의 종이를 주며,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디서 많이들은 것 같으면서도, 확실하지는 않은, 그런 흔하디흔한 명언.
담배연기가 방 안을 가득 메워갔다. 재가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데도, 그녀는 묵묵히 앉아, 연기를 내뿜을 뿐이었다.
"후.. 또 먼 길을 되돌아가야겠군."
이튿날, 미티스 의장은 회견을 열어, 자신이 하려고 했던 일과, 열 한 명의 희생자에 대해 빠짐없이 고백했다.
이에 대한 책임으로, 그녀는 의장직을 사퇴하고, 합당한 처벌을 받겠다고 했으나, 재판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그녀는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런 그녀에게 내려진 처벌은, 15일간의 가택구금과 의장직으로의 복귀였다.
계획이 미수로 끝난 것과, 순직한 병사들의 자발적인 지원이 그 이유였으나,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그녀가 사라지는 것이 마가리스에게 더 큰 손실이었기 때문이다.
이 땅은, 마가리스는 기억하고 있다.
자신에게 자유를 가져다 준 것이 누구인지를.
그걸 위해 평생을 노력한 것이 누구인지를.
15일 뒤, 다시 찾은 의장실에는, 무수한 편지들이 놓여있었다.
그녀가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또 한 번 잘못된 길에 들지 않도록, 격려와 꾸짖음이 담긴 시민들의 편지가.
갑자기 담배가 당겼다. 15일 동안 할 짓도 없이 흡연을 했던 탓이다.
읽던 편지를 올려두고 서랍을 열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텅 빈 담뱃갑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아.. 금연부터 다시 시작해야겠군."
담뱃갑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미티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목적지를 향해, 마가리스는 다시 출발점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