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0화 〉짬밥도 배가 고프면 먹을 만하다. (40/108)



〈 40화 〉짬밥도 배가 고프면 먹을 만하다.

길고도 아팠던 일주일이 지나고, 따분하고 지겨운 새 일주일이 시작되었다. 아픈 것 보다야 지겨운  선호하지만,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으니,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느껴야했다.

"야."

"왜?"


"내 방에서 편지봉투 하나가 없어졌던데, 아는 거 없냐?"


거기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경사로운 날에, 방에 있는 물건 하나가 없어져서 기분도 별로 좋지 않다.


"글쎄, 니 물건을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거지?"


"그러게, 왜 너한테 물어보고 있을까? 증거도 없는데."

"그래, 아무나 붙잡고 추궁하는  옳지 않다고."


"근데.."

"이번엔 또 뭔데?"

"요즘 꼬맹이가 담배라도 피는 건지, 꽁초를 버리고 있더라. 아는 거 없냐?"

마법사의 얼굴이 순간 멈췄다. 애초에 편지 같은 문명인들이나 할법한 행위를, 이 등신들이 할  있을 리가 없다.

"그 편지봉투 보급이거든? 정해진 수량만 주는 거라고. 그러니까 뒤지기 싫으면 알아서 만들어 와라. 만드는 건 특기잖아."

"아무리 그래도 재료도 없는  뚝딱 만들어  순 없다고."

"니가 뚝딱  만들어내면 나도 왕놈한테 보고할 수가 없는데? 내 보고서가 도착하지 못하면.. 이번엔 왕국  정예가 오려나? 그때도 과연 내가 널 위해 뭔갈 해 줄까?"

"그땐 내가 막아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뭐가 잘났다고 용사놈이 끼어들었다. 일주일 전까지  녀석이  일이라곤, 마법사가 마왕성에 체류할 수 있게 인간 입장권 역할을 해준 게 전부다.

"넌 빠져라. 한 것도 없는 게."

"하려고 했는데 니가 말린 거잖아! 니가 말리지만 않았으면,  녀석은 지금 저기에 서있을 수도 없었을 걸!"


용사가 가리킨 곳. 온갖 개밥을 만들어 내는 그곳에는, 깨져버린 갑옷 대신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기동대의 대장놈이 있었다.


이름은 젠이라고 하던데, 짧고 껄렁해 보이는 게, 나한테 순식간에 박살났던 그 기분 나쁘게 쪼개고 있는 부하 놈한테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고작 임무 하나 실패했다고 적진에 눌러앉아서는, 저놈들이 시키는 일이나 하고 있다.

특히, 야전에서 요리를 만들어 본 경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저 거지같은 요리를 만들어내는 곳에 집어넣은 게 가장 큰 충격이었다.

"자, 고등어 순살 조림 나왔습니다."


하지만 야전이 어떤 곳인가? 먹을 수만 있으면 뭐든 먹이는 곳이 아닌가?


음식 이름이랑 꼴 좀 봐라. 누가 봐도 먹기 싫게 생겼다.


"스튜 줘. 스튜."

"어.. 그건   모르는데."


"비켜 봐라. 그건 내가 해 줄 테니."

그래도 꼬맹이 덕분에 주인장이 주방을 벗어나는 일은 없어서 다행이다.

-크~ 역시, 순살이라면서 들어가 있는 이 가시들이 있어야지.

-뭘 좀 아는구만 신입!


복무 경력이 있는 등신들을 중심으로, 젠을 신입이라 부르며 야전 음식을 시켜먹는 게 최근 가게의 유행이다.


헌데, 내가 알기론 기동대의 중대장 자리를  먹으려면, 최소 40살은 먹고 와야 한다.

이놈들에게 신입이라 불릴 나이는 아니란 건데, 20년은 어딘가에 갖다 버린 것 같은 동안이라 그런지, 어린놈 취급당하는 것도 이해는 됐다.

-여기 술 한  더!

"예, 알겠습니다!"

대장인 젠을 제외한  명의 따까리들은, 요리를 할 줄 모른다는 이유로 홀에서의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좁아터진 가게에서  놈이나 돌아다녀봤자 복잡해지기만 할 뿐이라, 이놈들은 다섯 명씩 격일로 가게에 나온다.


그렇게 해도 다섯 놈이나 되는데, 제리스는 돈도 받지 않으면서 이 일을 계속 하고 있다. 어지간히도 일이 재미있나 보다. 면상은 안 그렇던데.

뭐, 꼬맹이에겐 잘 된 일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할 일도 없는 제리스가 꼬맹이 근처에서 계속 치근댔을 테니.


"야! 럼주 한잔 갖고 오라니까!"


근처를 지나가던 따까리 녀석 중 하나를 불러 세웠다. 주문한지가 언젠데, 내 자리에는 아직도 빈 잔만이 놓여있다.

"예! 알겠습니다! 오로넬님에게 럼주 한잔!"


기분 나쁘게 웃고 있던 그 장발놈이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이 일단락 되고나서 깔끔하게 머리를 자르고는, 나에게 일일이 존칭을 써가며 깍듯이 대한다.

-오로넬님에게 럼주 한잔!


봐라. 열 놈 전부 이 꼴이다. 알아서 모시는 건 딱히 기분 나쁠 일이 아니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날 죽이려던 놈들이 저러고 있으니 비꼬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기분이 묘하다.


"여기 있습니다!"

장발놈, 아니 이제 장발이 아니니 장발 아닌놈이라고 불러야 하나? 귀찮으니 그냥 그대로 부르자. 아무튼, 장발놈이 잔을 갖다 주고는, 옆에 서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뭐."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가 아니고 꺼지라고. 나한테 바라는 거라도 있냐?"

"아, 그.. 그게.."


뒷말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뭔가 있는 게 확실하다.


"오로넬님께 백병전을 배우고 싶습니다!"


"뭐?"


"그러고 보니 당신, 이 녀석들 상대로 압승을 거뒀었지. 훈련받은 군인 열 명을 아무런 무기도 없이 제압하다니, 대체 뭐하는 인간이야, 당신?"


주방에서 불쑥 젠의 머리가 튀어나왔다. 백병전이라길래 뭔가 싶었는데, 그때 있었던 일을 말하는 모양이다.


"대장인 니가 그렇게 약한데, 부하들은 당연히 그것보다 약하지. 생각을  하고 말해라."


"..."


"그리고 명색이 대장이란 새끼가 깔끔하게 혼자 책임질 것이지, 부하들까지 끌어들여서 여기서 일을 시키고 앉았냐?"


"적에게 패배한 지휘관이 무슨 낯짝으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겠나? 대장의 자격을 잃은 나는, 그저 연장자로써 각자의 뜻대로 하라고 했을 뿐이다."


묻는 말에만 대답하는, 전형적으로 시비 거는 맛이 없는 놈이다. 그런 놈들 대부분이 군인이긴 하지.


"오로넬님께 백병전을 배우기 위해 남았습니다! 부디 저희를 지도해 주십시오!"

"백병전을 뭐 하러 배우는데? 니네들 어차피 이제 못 돌아간다니까? 집에  간다고."

"상관없습니다! 저희에겐 백병전이 더 중요합니다!"

"아니, 여기 규칙 못 들었냐? 싸우면 안 된다고. 니네 대장도 줘 터졌잖아. 쓸데도 없는 걸 배워서 뭐 할 건데?"

"그.. 멋있지 않습니까."

너무나도 완벽한 대답에 이마를 쳤다. 답이 없다, 이건.

대체 내가 싸워봤자 얼마나 멋있게 싸웠다고 이러는 거냐? 숫자도 딸려서 얍실하게 싸운 건데.


아니 애초에, 모래로 연막을 쳐뒀는데 뭐가 보이기라도 했나?

"야. 니들, 그 얘기 누구한테서 들었어."


"자, 잘 못 들었습니다?"

"니네가 그 모래먼지 속에서 날 봤을 리는 없잖아. 죄다 한방에 엎어져놓고."

"그, 그.. 대장님이.."

"그럴 줄 알았다, 이 새끼. 뭐? 패배한 지휘관? 아주 혼자 남기 싫어서 부하들한테 약을 팔았구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젠에게 삿대질을 했다.

저  때문에 내가, 이 땀내 나는 남자 놈들한테서 이딴 눈빛을 받고 있었던 거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이 새끼, 모르는 척 하는  봐라? 하긴, 사람 한명 찔러놓고도 사과도 없이  사람이 있는 가게에 들낙 거리는 놈인데, 뭘. 마가리스 특산품은 얼굴에 까는 철판인가보지?"

"..난 내가 봤던 걸 사실대로 말해 줬을 뿐이다."

"이것 봐라? 마가리스 얘기가 나오니까 바로 말을 바꾸네? 무서워서 돌아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고향은 고향이란 거냐?"

쿵! 쿵! 쿵!

갑자기 젠이 도마를 치우고 그곳에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보통 저런 짓을 하면 주변에서 말려주는  암묵적인 규칙이긴 한데, 장소를 잘못 찾았다. 말려줄만한 놈들은 죄다 의자를 뒤로 빼고 그걸 구경하고 있으니 말이다. 애지중지 키웠다던 부하 놈들조차 미동도 하지 않는 걸 보니, 벌써 이놈들도 물들어 버렸다.


"다섯 번  해."


물론, 나도  정도로 봐줄 생각은 없다. 괜한 자존심을 내세워선 자기 목을 스스로 조르는 놈이다.


쿵쿵쿵쿵쿵


젠은 머리 다섯 번을  찍고 나서야 다시 요리를 하러 돌아갈  있었다. 이것도 많이 봐준 거다. 용사나 마왕이었으면, 망설임 없이 물구나무를 선 채로 머릴 박으라고 했을 거다.

"아무튼, 니들이 들은 건 죄다 구라니까, 그딴 걸 배우려면 다른 놈들한테나 찾아가라고. 나보다 센 놈들 많잖아, 여기."

"에이, 그럼 구라가 맞는지 직접 보여주십쇼."

따까리 한 놈이 큰일 날 소리를 했다. 이놈은 조만간 규칙을 어겨서 흰놈에게 숙청당할 기분이 든다.


"지랄들 하지 마시고. 저어기 옆자리에 계신 20대 용사 시트린씨한테나 가보세요, 패잔병 새끼들아."

"요, 용사라면 그 용사님이십니까? 진짭니까?!"


아무래도  놈들, 여기 단골들이 뭐하는 놈들인지 하나도 모르는  같다. 왕놈이 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제외하곤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은 거겠지. 아니면 미티스라는 양반이 사기가 떨어질까 봐 입을 다물고 있었던가.


"그 용사님 맞습니다. 빨리 꺼지세요."

"ㅇ, 예! 꺼지겠습니다!"

일하고 있다는 자각도 없이, 다섯 놈의 패잔병들은 용사에게로 달려갔다.

역시 가게에는 제리스가 없으면 안 되나 보다.

"야, 그나저나 너. 그 열쇠."

방해꾼들을 치우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마법사에게 말을 걸었다.

"열쇠가 왜?"


마법사는 그새를 못 참고 젠의 요리를 주문해, 포크로 이곳저곳을 찔러보고 있었다.

아무리 호기심 때문이라 해도, 저걸 먹고 싶을까, 진짜로.

"니 발명품을 다른 나라에 팔지 못하게 하려고 만든 거라며."


"그래. 우욱.."

결국 그걸 입에 넣고 만 마법사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저것 역시 먹을 게 못 된다는 것을 온몸으로 알렸다. 똥을 굳이 먹어봐야 아는가보다.


"근데 헤라나 왕국에는 보내도 되냐?"

"무슨 소리야?"

"시발, 너 까먹었지? 내가 분명 저놈들에게 끌려가지 않게 해주는 대가로, 한 달에 한 번씩 니가 만든 물건을 내놓으라고 했을 텐데."


"아.. 그거? 물론 기억하고 있지. 기억하고 있어."


"이제 와서 개소리  생각 하지 마라? 니가 승낙했다는 건 이미 왕놈한테 보고 해뒀으니까."

"음.. 그전에 한 가지만 확실하게 하자."

"뭔데?"

"내가 만든 물건이면 아무거나 상관없는 거지?"


역시, 이쪽으로는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다. 말장난 따위로 빠져나갈 줄이야.

그래도 이건, 정확히 기재하지 않은 왕놈의 잘못이다. 나는 명령대로 움직일 뿐, 주제넘게 그걸 고칠 생각 따윈 하지 않는다.

"그래, 아무거나 줘. 똥을 주던, 오줌을 주던, 어차피 받는 건 왕놈이니까."

"으, 아무리 그래도 그런  안 주지. 뭐 적당히 가지고 놀 만한 걸로 줄게."

"최대한 쓰레기 같은 걸로 주라고. 엿  먹이게."

"대체 너한테 왕이란 게 어떤 존재인지 궁금하다. 왕궁에서도 그러고 다니냐?"

마법사가 놀랍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 왕궁이라고 그놈을 안 씹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일을 목숨까지 걸어가며 하겠는가.

"후.. 이걸로 뭐, 대충 전후처리는 끝났네. 뒤진  없고, 끌려간  없고, 왕놈이 갖고 싶어 하는 것도 얻었고."

"등신이 열한 놈이나 늘어난 건 조금 내키지 않지만, 이 정도 수확에 이 정도 대가는 지불해야지. 안 그러냐?"


"몰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평소처럼 술만 마실 수 있으면 됐지."

마법사가 잔을 들었다.

"지랄하네."


코웃음을 치며,  잔을 받아쳤다.

다른 등신들도, 덩달아 잔을 들었다.


-건배!!


서대륙의 끝, 거대한 고성이 솟아있는 절벽의 아래.


나무로 가득 찬 숲의 깊숙한 곳, 그곳에 있는 자그마한 가게에는, 오늘도 여전히 헛소리와 웃음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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