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과일은 시원할 때 먹어야 제맛이다 [1]
"으어.. 더워.."
계절이 바뀔 때까지 여기에 박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어느덧 달력이 5월에 접어들었다. 분명 5월은 초여름일 텐데, 왜 이렇게 더운 건지 모르겠다.
사람들에게 어떤 계절이 좋냐고 물어보면, 보통 여름일 때는 겨울이라 답하고, 겨울일 때는 여름이라 답한다. 그냥 지금 살고 있는 계절이 마음에 안 든단 소리다.
"꼬맹아, 창문 좀 더 열어라. 바람이 왜 이렇게 안 들어 오냐?"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도 힘겨운 나는, 그나마 조금 더 가까운 곳에 있는 꼬맹이에게 그 일을 맡겼다.
겨울에는 조금만 열어도 칼바람이 들어오더니, 여름에는 활짝 열어둬도 들어오지 않는 게 이놈의 바람이다.
그런데 밖에 있는 나무를 보면 바람이 불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 거지같은 현상은, 아마도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일 것이다.
꼬맹이는 방바닥에 처박고 있는 얼굴을 들어올려, 천천히 일어나서는, 창가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됐어?"
"어.. 됐다. 근데 바람은 1도 안 들어오네. 그보다 지금 몇 시냐?"
"한 시야. 밥 먹으러 가야해."
"더운데 오늘은 여관 말고 다른데서 먹을까.. 좀 시원한 곳에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넌 어차피 뭘 줘도 맛있다고 처먹잖아."
"빨리. 빨리 가자."
"아오, 너만 준비하면 다냐? 나도 나갈 준비 좀 하자."
바깥은 생각보다는 덥지 않았다. 햇빛은 뜨거웠지만 그늘은 충분했고, 실내에선 구경도 못 한 바람도 쐴 수 있었다. 그렇다고 외출을 자주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뭐 먹으러 가는 거야?"
"과일."
"과일이 뭐야?"
"먹는거."
꼬맹이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이 대화가 무의미 하다고 판단해서가 아니다. 진짜로 자기가 알고 싶은 정보를 다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자신이 걷고 있는 것은 과일이란 놈 때문이고, 과일은 먹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게 이 녀석이 알고 싶은 모든 것이다.
과일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어디까지나 시원하다는 가정 하에, 과일만큼 맛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한테는 그걸 시원하게 할 방법이 있다.
마법사가 만들었던 깡통. 그 녀석에게 웬만한 냉장시설보다 더 시원하게 만들 수 있는 기능이 탑재되어있지.
바로 거기에, 과일을 넣어 먹을 거다.
그런데 문제는, 마을 한 바퀴를 다 돌아가는데, 과일가게가 하나도 안 보인다는 것이다. 서대륙에선 과일이란 걸 먹지 않는 건가?
"오로넬.. 밥 언제 먹어.."
꼬맹이가 터덜터덜 힘겹게도 발을 내딛었다. 밥때가 좀 늦어졌다고 오만상을 다 짓는다.
"과일가게가 안 보이는 걸 어떡하냐. 좀만 더 걸어."
진짜로 이 인간들 과일을 안 처먹고 사는 건가? 왜 안 보이지? 동대륙이었으면 과일가게 맞은편에 또 과일가게가 있고, 그 옆에도 또 과일가게가 있었을 텐데..?"
그렇게 희망이 사그라들 무렵에, 모퉁이에 있는 어떤 가게에, 과일이 진열 돼 있는 것이 보였다.
"야, 꼬맹아 다 왔다. 저기다, 저기. 그만 찡찡대."
다왔다는 말에 꼬맹이의 표정도 밝아졌다. 과일을 사서 마법사에게 가기 전에, 일단 그 자리에서 몇 개정도 먹여야겠다.
"어서 오세요.. 어."
"어."
점원의 얼굴이 낯이 익다.
"뭐야, 조. 너 일도 하고 있었냐?"
"아니, 뭐. 가만히 있으려니 심심하더라고."
언제는 귀찮다고 은퇴를 하더니, 이제는 심심하다고 다시 일을 하고 있다. 인간이라는 게 참 간사한 족속들이다.
"여긴 뭐, 이력도 안 보냐? 너 같은 걸 무슨 정신머리로 뽑은 거냐?"
접객이라는 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놈같이 말 타고 사람이나 치고 다니던 무법자를 고용하다니, 사장이 초짜거나, 미친놈이거나, 둘 중 하나다.
"내가 어때서? 오히려 점장이 내 경력을 보고 좋아하던데?"
"니가 사람 치고 다닌 건 얘기 했냐? 그거 때문에 킬러 조라고 불리는 것도 말 했고?"
"그런 쪽으로 초점을 맞추면 안 되지. 내가 도적놈들을 치고 다녔던 건, 고객들을 목적지까지 빠르고 안전하게 데려다주기 위해서였다고. 점장은 그 열정을 높게 산 거지."
"으음.. 뭐, 그렇다고 쳐 두자."
하긴, 내가 여기 간섭해 봤자 뭐 하겠냐. 내 가게도 아닌데.
"그래서, 과일 사러 온 거야?"
"그래. 마을에 과일가게가 하나도 없어서 존나게 멀리도 왔다. 일단, 사과 한 통 얼마냐? 이 새끼 좀 먹이자."
허벅지만한 크기의 통에서, 사과 하나를 집어, 꼬맹이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어떻게 먹는지도 모르면서, 꼬맹이는 다짜고짜 입부터 열었다.
"음.. 맛있어. 근데 좀 딱딱해."
"심까지 처먹으니까 그렇지."
심? 이라고 물어볼 게 뻔한 꼬맹이에게, 사과를 어떻게 먹는 건지 보여주었다. 달달한 즙이 펑펑 터져 나오는 것이, 상당히 맛있는 사과다.
"한 통? 통 째로 사려고? 어떻게 들고 가게?"
"여기서 다 먹을 건데?"
마부가 종잇장에 숫자를 기록하던 손을 멈췄다.
"..이걸?"
"저거 안 보이냐?"
1초에 한 번 씩 사과를 넣고 심을 뱉어내고 있는 꼬맹이를 가리켰다. 어느새 사과통의 절반이 비어 있었다.
"잘 먹네.."
"감탄하지 말고, 딴 것도 좀 팔아보라고."
"어.. 그럼 수박은 어때? 수박도 지금 맛있다던데."
"수박? 수박 괜찮지. 마침 큰놈을 사려고 했는데 잘됐네. 그놈도 먹여야 하니까.. 세 개만 줘."
"잠시만.."
마부는 수박을 찾으러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사과라도 하나 씹을 생각으로 통을 쳐다봤는데, 그곳엔 텅 빈 공간만이 있었다. 통만 한 높이의 사과 심이 옆에 쌓여있는 건 덤이다.
"그거 다 먹으면 빈 통 안에 심이나 담아라."
"알았어."
"아 맞다. 그냥 가져갈 거야, 잘라갈 거야?"
마부가 뛰어나와서는 뭔 이상한 걸 물었다.
"자르는 건 먹기 전에 자르면 되지, 여기서 잘라주는 건 뭐하는 뻘짓이냐? 들고 가면서 다 박살나잖아."
"아니, 점장이 물어보라잖아. 가게 방침인데 어떡해?"
"그래? 이상한 놈이네."
굳이 잘라준다는 게 선택지에 있다는 건, 보기 좋게 조각이라도 해 준다는 건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럼 하나만 잘라 줘봐."
"알았어, 조금만 더 기다려봐."
마부는 다시 가게로 들어갔다.
"이야, 5분도 안 걸렸네."
옆에서는 기어이 통 하나를 비워낸 꼬맹이가, 그 속에 다시 심을 담고 있었다.
"응."
"넌 진짜 내가 안 주워갔으면 몇 번은 버려졌겠다. 이 돼지 같은 새끼야."
"응."
"응은 무슨 응이냐, 팍씨."
"오로넬, 점장이 들어오래."
안에서 마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수박 하나 자르는 걸, 가게 안까지 들어가서 구경해야 하는 건가? 괜히 호기심에 주문했다가 시간만 버리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뭐야, 어디야?"
"이쪽, 이쪽."
가게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안쪽까지 진열 돼 있는 과일들을 넘어가니 깨끗한 복도가 나타났고, 그곳을 가로지르자 홀로 떡하니 놓인 하나의 방이 나타났다.
"뭐 얼마나 대단한 걸 보여주려고 여기까지 손님을 데려 오냐? 기분이 좀 묘한데, 납치 감금은 아니지?"
"아,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마부가 나를 안심시키며 노크를 했다.
그래, 감금이라도 지금 내 옆엔 꼬맹이가 있다. 이딴 벽쯤, 주먹 한방이면 부수고도 남는다.
"점장님, 손님 왔는데요."
"어어, 들어와, 들어와."
그렇게 안내를 받아 들어간 점장의 방은, 과일을 자르는 것과는 동떨어진 방이었다. 아니, 뭔가 자르는 건 맞는 것 같은데, 그 대상이 과일이 아닌 것 같다.
사무실처럼 꾸며진 그 방의 벽에는, 여러 개의 단검과, 자물쇠를 여는데 필요한 도구, 연막 등, 흔히 말하는 뒤쪽 세계의 연장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냥 전시만 돼 있을 뿐이겠지, 이런 걸 모으는 취미가 있겠지, 라고 자신을 달랬다.
"오오, 내 사업장에 온 걸 환영하오. 나는.. 음.. A라고 불러주면 고맙겠소."
이쪽을 등진 채 기울어져 있는 의자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중후한 목소리에,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A? 이름은 뭐 하러 숨기는데?"
"고객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이쪽 업계에선 이름을 쉽게 댈 순 없어서 말이오.
"과일 가게 사장이잖아. 언제부터 과일 가게 사장들 이름이 그렇게 비밀스러워졌냐? 니가 그냥 쪽팔린 거 아니냐? 과일 장사가 창피해!?"
"어, 으음.. 저기, 조지? 이 손님들 정말로 자르는 거 주문한 거 맞아?"
사장이 마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말이 속삭인다지, 목소리가 너무 커서 들으라는 건지 듣지 말라는 건지 모르겠다.
"맞는데요? 수박 세 개 중에 하나만 잘라달라고 했는데?"
"아니, 아까는 수박 하나 잘라달라고 했잖아."
"그러니까요. 세 개중에 하나 잘라달라고 했으니까, 점장님이 하나만 잘라주면 되잖아요."
"그렇게 말하면 의미가 다르다니까! 진짜 과일을 자르는 게 아니라, 은어라고 은어! 진짜 과일 사러 온 손님인지, 다른 걸 사러 온 손님인지 구별하는 은어!"
"크흠."
닥쳐라는 뜻이 담긴 기침소리를 냈다.
"아, 손님이 계신대 실례했군. 일단, 조지 너는 다시 가게나 보고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예~"
마부는 사장의 고함소리에도 주눅 드는 일 없이 방을 나갔고, 이제 방에는 나와 꼬맹이, 그리고 사장만이 남았다.
의자 옆으로 삐져나온 붉은 색의 머리가 희미하게 스쳐지나갔다.
아까 '자른다.'가 어쩌고저쩌고 한 걸로 봐선, 평범한 과일가게 사장은 결단코 아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그쪽 계열 사업 밖에 없는데, 그래도 명색이 서대륙의 수도인데, 미치지 않고서야 이렇게 대놓고 그쪽 일을 할까?
"으음.. 일단.. 뭐.. 손님께서는 그.. 진짜로 과일 때문에.. 오신.. 거죠?"
말투가 영 통일되지 않는 놈이다.
"그래, 수박 잘라준다며? 도대체 얼마나 예쁘게 잘라 주려고 시간도 없는데 여기까지 끌고 온 거냐? 마음에 안 들기만 해봐라, 그 수박 째로 니 머리통에 던질 거니까."
"으흠, 그.. 손님께서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제 본업이 좀.. 공연히 들어낼 수 없는 일이라서요.. 자른다는 건 그.. 업계 용어라..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아, 이거 그거다. 내가 생각하는 그거가 맞는 것 같다. 이 놈은 미친놈이 맞다.
"본업이 뭔데?"
"그.. 마음에 안 드시는 분이 있으시면, 눈앞에서 좀.. '치워주는?' 그런 일이죠."
"오오, 그런 일을 하고 있다고? 마침 좀 보기 싫은 놈들이 몇 명 있긴 한데.."
"정말이십니까? 아~ 이거 잘 찾아오셨네. 저한테 의뢰하시면, 첫 고객이시기도 하니, 반값으로 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명 당 이정도 가격에.."
과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금액이, 의자 너머로 넘어왔다. 그러나 여전히 의자는 이쪽을 돌아보지 않는다. 굳이 불편하게 팔을 꺾어서는 힘겹게 종이 쪼가리를 던져놓을 뿐이다.
"오, 괜찮네. 근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내 눈앞에서 치워주는 거지?"
"그건 손님이 원하시는 대로 진행하실 수가 있구요. 뭐, 물리적으로 완전히 '치워' 버릴 수도 있고, 아니면, 제가 그분을 데려 와서, 손님께서 직접 '치울' 수도 있죠."
"요즘 업계에서 가장 많이 선호되는 건, 그분께서 스스로 본인을 '치운' 것처럼 보이게 하는 거죠. 아무도 의심 받을 사람이 없어서 손님들에게도 좋고, 저희들에게도 좋거든요."
"이야~ 이렇게 좋은 일을 해주는 일이 있어? 그래서 이게 무슨 직업인데?"
"하.. 돌려 말하기도 힘든데, 그냥 당당하게 말해도 되겠습니까? 진짜 이거 아무한테도 말 하면 안 되는데.. 손님께서 비밀만 지켜주신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까지 눈치 못 채는 놈이 더 이상할 것 같은데 염병을 떤다.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말해봐."
뒤를 향해있던 의자가 정면을 항하며, 조용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암살자는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사실 저, 암살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