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2화 〉과일은 시원할 때 먹어야 제맛이다 [2] (42/108)



〈 42화 〉과일은 시원할 때 먹어야 제맛이다 [2]

"허~억! 암.살.자!"

"아, 손님 조용히! 이거 들키면  된다니까."

암살자님께서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침묵을 강요했다.


"와, 내가 살면서 암살자를 만나다니."

"뭐, 이렇게 대놓고 사업하는 건 업계에서도 이례적이긴 하죠. 하지만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해야 성공한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죠."

남들이 하지 않는 것엔 이유가 있다는 걸 먼저 깨달아야지, 멍청한 놈아.

"그럼 막 지붕 사이도 뛰어다니고, 연막 속에 숨어서 납치도 하고 그러는 거냐?"


"네, 물론이죠. 아무것도 없는 소매에서 단검이 나오는 것도 할 수 있다구요."

"혹시 이런 거?"

나는 늘 소지하고 다니는 단검을 암살자의 눈앞에서 꺼내었다.

"어..! 손님 그거..!"


"이런 건 아무나   수 있는 거 아니냐?"


"그, 그럼요. 그런 건 저도.."

탁!


암살자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당혹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암살자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다 보이는데?"

"어."

갑자기 암살자가 멈췄다. 단검에 찔리기라도 했나보다.


"저.. 손님."

"뭐."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니 이름도  말해놓고 내 이름을 내놓으라고? 퍽이나 말해주겠다."


"아, 그렇죠, 그렇죠. 제가 깜빡했네요."

갑자기 몹시나 태도가 고분고분해진 암살자였다. 멈춰선  순간동안 이놈의 머릿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저.. 애쉬인데요.."


걸걸하던 목소리가, 높고 가는 목소리로 변했다. 거기다 애쉬라는 이름, 그 이름을 듣자, 꿈에서 깨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망설임 없이 눈앞에 있는 등신의 귀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가짜 귀와 함께, 가짜 얼굴이 벗겨졌다.

"미친."

"싸부!! 역시 싸부죠?!"

"아닌데요."


"오로넬 싸부 맞잖아요!  보면 알겠구만! 서대륙엔  계시는 거에요? 일? 와~ 이런 곳에서 싸부를 만나네요!"

모르는 사람이 저 혼자 흥분해선 이리저리 몸을 흔들어댔다.


"야, 꼬맹아. 그냥 나가자. 여기 이상한 가게다."


"잠깐, 잠깐, 잠깐, 제자와의 재회를 이렇게 빨리 끝내면 안 되죠. 여기 계시면 제가 뭐라도 대접.."


"어, 저기."


모르는 사람의 말을 자르고,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을 가리켰다.


빡!!!


그걸 또 확인하려 돌아보는 등신에게, 기절할 정도의 싸대기를 날렸다.

뚝. 뚝.


바닥에 뭔가가 떨어졌다.

"히히..! 싸부라면 그럴  알았죠..!"

정신을 잃기 않기 위해, 혀를 깨문 것이었다.


"아, 시발! 보내달라고!"


아무리 모른 척을 계속 하려 해도, 입구를 막아서고 보내주질 않으니, 욕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절대 안 되죠. 스승을 빈손으로 보내다니요."

여전히 말만 스승이지, 말이라곤 더럽게 안 들어 처먹는 년이다.


"내 손 안보이냐? 과일 샀잖아."

"그건 싸부가 직접 사신 거고. 제가 더 챙겨 드린다니까? 먹고 싶은 거 없어요?"


기회다. 적당히 아무거나 부르고, 그 틈에 도망치도록 하자.

"아, 이러면  되지. 그 틈에 도망치실 거죠?"


시발.


"방에 있는 걸로 드릴게요. 차  잔 마실 시간은 있으시잖아요?"

"하.. 그래. 딱 한 잔이다. 딱 한 잔."


이쯤 되면 타협을 할 때다.

집요함으로 이 년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인생을 통틀어 봐도, 아무리 통틀어 봐도, 다섯을 넘지 않는다. 괜히 내가 다짜고짜 기절부터 시키려 한 게 아니다.

마시고 싶지도 않은 차를 마시기 위해, 편해보이지도 않는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자, 여기. 시원한 물이랑 과자. 어차피 싸부,  같은 거 안 좋아 하잖아요."

그건 맞는데, 저년에게 알려준 적은 없다.

"과자."

꼬맹이는 이미 과자에 넘어갔다. 사과  통으로는  녀석의 배를 채우기엔 모자랐나 보다.


...


 안은 조용했다. 눈앞의 골빈년은 말도 없이 쪼개고 있을 뿐이고, 나는 물을 홀짝이고 있을 뿐이다.

"막상 앉으니까 할 말도 없지?"

"..네, 그러네요.."


"가도 되냐?"

"그거 다 마실 때까진 안 돼요! 뭐라도 해볼 테니까 기다려 보라구요."


"하.."

이 골빈년의 이름은 애쉬. 지금은 이름 좀 날리는 것 같지만, 예전에는 기척조차도 숨기지 못하던 애새끼였다.


그런 애새끼가, 돈을 준다는 말에 혹해서, 왕을 암살하러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때 내가 땡땡이를 치고 있어서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녀석은 빼도 박도 못하고 처형당할 운명이었다.

그리고, 마침 왕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는, 이 녀석을 통해 그것을 이루려 했고, 그걸 위해 온갖 기술들을  녀석에게 가르쳤다.

그런데 이년은, 배울  다 배우고 나자, 큰 절을  번 박고는, 두 번 다시 왕궁에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하러 자기를 키웠는데, 정말이지 은혜를 원수로 갚는 년이다.


"과자 더 없어?"


"아니, 이제 간다."

또 과자로 배를 채울 때까지 앉아 있으려는 꼬맹이였다. 물 잔을 비우고,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는 할 말이나 좀 생각하고 막아라, 시간도 없는데 다짜고짜 틀어막지 말고."

"으으.."


골빈년은 말이 없었다. 나는 그대로 출구로 향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세시가 되었다. 그늘이 가장 적고, 햇빛이 가장 센 시간이지.


"이런, 시발."

길바닥을 불태우고 있는 태양빛을 보자 고운 말이 절로 나왔다.


"어, 오로넬. 이제야 나왔네. 점장이랑 그 좁은 방에서  얘길 했길래 이렇게 오래 걸린 거야?"

마부가 수박이 담긴 봉지를 건네주었다.


"말해봐야 나도 좆같고, 너도 좆같을 거니까, 모르는 게 낫다."

"그렇게 말하니까 듣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시네."


"저 새끼 제정신 아닌 건 확실하니까, 혹시 월급을  준다거나 그러면 나한테 말하라고."

"어, 어.. 고마워."

마부나, 저놈이나, 나란히 세워놓고 보면 우열을 가릴 순 없겠지만, 그래도 이놈들은 일단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관계가 아닌가.


등신이 등신에게 일을 시키는 건 그러려니 해도, 등신이 등신을 등쳐먹는 건, 참을 수가 없는 일이다. 마치 길거리 한복판에서 똥을 싸는 인간을 보는 기분이랄까.

"어휴, 그럼 난 간다."


그늘을 벗어나자마자 땀이 흘러내리는 기적을 체험하며, 점점 따뜻해지는 세 개의 수박을 안고, 마법사의 집으로 향했다.

"거지같은  하나 더 늘었구만."

~


오늘도 구름은 맑고, 태양은 밝으며, 데이린은 귀엽다.


날이 더워지니 창문이 열려있는 시간이 길어져, 데이린을 바라볼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좋다.


오해할까봐 미리 말해두지만, 이 행위에 한조각의 흑심도 없다. 요즘은 자택에서도 범죄를 당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그래, 이건 어디까지나 데이린을 지키기 위해서다.

누워있던 데이린이 일어나더니 창문을 완전히 개방했다. 뒤에 누워있는 오로넬씨까지 훤히 보일 정도로, 창문이 가리고 있던 공간은 컸다.

한순간 데이린이 이쪽을 쳐다본 것 같지만, 기분 탓일 거다.

왜냐하면 여긴, 여관 맞은편의 산이니까.

지난번에 데이린의 뒤를 지켜보고 있던 것을 오로넬씨에게 들키고, 한 번 더 걸리면 목숨을 장담할  없다고 경고를 받았다.


그때도 나름, 육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로는 최대였을 텐데, 어떻게 날 찾으셨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제는 절대 들키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망원경을 들고 아침마다 산으로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점심때가 되었으니 데이린은 식사를 하러 내려갈 것이다. 여관 식당은 이 각도에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나도 이틈에 점심 식사를 해둔다.

"응?"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오로넬씨가 데이린에게 점심도 주지 않고, 여관을 나와,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오로넬씨의 돌발행동들은 빠짐없이 기록해두었지만, 식사도 하지 않고 데이린을 데려가는 건 처음이다.

챙겨왔던 주먹밥을 다시 배낭에 넣고, 곧바로 움직일 채비를 했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 산봉우리에서 마을의 6할 정도는 관찰 할  있으니까.

해가 점점 솟아오르더니, 수목이 만들어낸 수많은 그늘들을 없애고는 나를 내리쬐었다. 땀이 시야를 가리고 온몸을 타고 흘렀지만,  사람은 아직도 마을을 방황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데이린은 이제 배가고파서 한계일 텐데, 오로넬씨는 여전히 목적지도 불분명한 채 걸음만을 재촉했다.

그렇게 몇 분을 더 걷고 나서야, 오로넬씨는 어떤 곳을 가리켰다. 최근에 생긴 마을 유일의 과일 가게인, '죽여주는 과일' 이다.

지금까지의 방황은 전부 과일 하나를 위해서였나?


과일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곳은 저곳이 유일하지만, 과일을 사는 것뿐이라면 여관 앞의 채소 가게나, 심지어는 정육점까지, 먹을 걸 파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팔고 있는데, 설마 오로넬씨가 그걸 모를 리는 없고, 데이린을 굶겨서까지 저곳에 향한 이유가 뭘까?


가게에 도착한 오로넬씨는 곧바로 데이린에게 사과를 사주었다. 굶주렸던 데이린은 사과 한 통을 순식간에 없애갔다.


자세히 보니, 가게 점원이 조지씨다. 요즘 가게에 오는 시간이 평소보다 늦어지신다 싶더라니, 일을 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오로넬씨는 조지씨를 만나기 위해 저곳으로  건가? 그렇다기엔 한 시간 이상 마을을 헤맨 것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


가게로 들어간 조지씨가 수박을 가지고 나왔다. 아마 오로넬씨의 목적은 저거였던 것 같다.


그러든 말든, 여전히 사과를 먹고 있는 데이린이 귀여웠다.


수박을 건네받는가 싶더니, 갑자기 조지씨가 수박을 들고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분이 지나도 조지씨는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데이린과 오로넬씨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주 긴 시간 동안, 그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뭐지? 무슨 일이지? 과일 가게 안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지?


아, 분명 여관까지 돌아가려면 더울 테니, 그 자리에서 수박을 먹고 가려는 거다. 포장을 하던 조지씨가 제안했겠지.


거기까지 몇 분이나 걸린 건 의문이지만.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조지씨가 가지고 들어갔던 수박 세 개를 들고 나와, 과일들을 보관하는 물에 담그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데이린과 오로넬씨는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과일 가게에서 과일을 사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귓가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생각해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래, 그거다. 지금 나가봐야 그늘도 없이 태양 아래를 걸어야 할 뿐이다.

오로넬씨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때를.

하지만 몇 분뒤, 오로넬씨는 태연하게 가게에서 나와, 수박을 받아들고 태양 아래를 걸어갔다. 또 보기 좋게 추측이 빗나간 것이다.

대체 그 안에서  하고 있었던 거지? 오늘 일어나는 일들은 전부 기록에는 없는 일들뿐이다.

"어! 저거..!"


오로넬씨의 행동을 기록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위화감을 느꼈을 때, 조금이라도 빨리 산을 내려갔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달려가면 늦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데이린을 지켜보고 있지 않았으면, 두 사람은 영문도 모른 채 봉변을 당했겠지.


이번에야말로 오로넬씨도 날 인정해줄 거다.


두 사람의 뒤를 쫓고 있는,  빨간 머리의 변태를, 내 손으로 붙잡음으로써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