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좋은 스승 소린 듣기 쉬워도, 좋은 제자 소린 듣기 힘들다 [1]
멍청한 제자놈과의 원치 않는 재회로부터 약 2주가 지났다.
"야, 오로넬!! 니가 시켰지!!"
누군가 이런 반응이 나올 건 예상했지만, 여기까지 2주나 걸린 게 신기했다.
"뭘?"
다짜고짜 달려와서 멱살을 잡는 마법사에게 내놓을 변명이라곤 짧은 질문뿐이었다. 짚이는 게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니가 데려왔던 이상한 여자! 그 여자가 맨날 우리 집 앞에 서 있다고!"
"그게 끝?"
"그게 끝이냐니, 그게 얼마나 좆같은 일인 줄은 알아? 창문만 내다보면 그 여자랑 눈이 마주친다고! 뭔 꿍꿍인진 모르겠는데, 빨리 치우는 게 좋을 거다. 내일도 그 여자가 거기에 있으면, 너나 그 여자나 구멍투성이로 만들어 버릴 거니까!"
조질 거면 그 년만 조질 것이지, 왜 나까지 묶는지 모르겠다. 내가 시킨 일이라는 증거를 제출하긴커녕, 변론도 듣지 않았는데 말이다.
"빡이 단단히 돈 건 알겠는데, 닥치고 내 말 먼저 들어보라고. 아직 아무 말도 안했잖아."
멱살을 붙잡고 있는 손을 떼어내고, 어깨를 눌러 마법사를 의자에 앉혔다.
"그래. 그 골빈년이 매일같이 너네집 앞에 서있다고?"
"그래에! 아침이고 밤이고, 볼 때마다 마주친다고."
"딱히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고?"
"나도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면전에다 욕이라도 해주려고 나가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다고 그 여자."
"미행은? 미행 같은 건 안 당했냐?"
"미행당하는 걸 알면 그게 미행이냐?"
맞는 말이다. 거기다 마법사가 미행을 당했다면, 이미 이 자리에 그년이 있었을 거다.
목적은 암만 봐도 나인데, 미행이 아니라 감시를 하다니, 역시나 골빈년다운 발상이다. 보나마나 되도 않는 이유겠지. 아무튼, 아직 이곳의 위치를 들키지 않았다면 그걸로 좋다.
"후.. 일단 나는 진짜 모르는 일이니까, 구멍을 내든 구멍에 박든, 그년한테만 하라고. 엄밀히 말하면 나도 피해자야, 피해자."
"피해는 내가 보고 있는데 니가 무슨 피해자야?"
"그런 게 있다. 일단 하나 충고하자면, 그년이 미행할 생각을 하기 전에 빨리 처리하는 게 좋을 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그년을 처리하기 위해, 마법사를 부추겼다.
하지만 그년은 두 번씩이나 왕을 암살하려 하고도 목숨이 붙어있는 년이다. 운 하나는 기가 막힌 년이기에, 이번엔 또 어떤 행운으로 살아남을지 알 수가 없다.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야. 어떤 새끼도 지 좆대로 날 감시할 순 없어."
'감시'라는 말에 이상할 정도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아마도 내가 모르는 마가리스에서의 일 때문이겠지. 그리고 이 정도 기세라면 충분히 기대도 해 볼 만하다.
스승으로써 뭔가 해 준 건 없지만, 적어도 마지막 가는 길만큼은 지켜봐 줘야 하지 않겠는가.
악연 하나를 떨쳐버릴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잔에 가득 찬 럼주를 물마시듯 비워냈다.
알딸딸한 취기가 스멀스멀 상쾌하게도 피어올랐다.
~
"흠.. 오늘도 수확이 없네. 싸부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혹시 머무르는 곳은 이 마을이 아니라던가 그런 건가?"
애쉬는 심심했다. 그것도 존나게.
동대륙의 추적자들을 피해 이곳으로 왔다고는 하나, 정말이지 그녀의 정서와는 하나도 들어맞지 않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온화했고, 전쟁 같은 것도 없었으며, 그 흔한 고위층의 자리싸움마저도 없었다. 정말이지 평화롭다 못해 평화에 찌들어진 땅이다.
오죽 심심했으면, 그녀 스스로 관계를 끊어냈던 자신의 스승을 발견하고는 반가워 할 정도였다.
"아니, 그런 것 치고는 집 앞에 나온 것 같은 차림이었지. 옆엔 이상한 꼬맹이까지 데리고."
스승을 만난 다음날부터, 애쉬는 그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미 오로넬로부터 당부를 받은 조지가 무언가를 말해 줄 리는 없었고, 남아있는 유일한 단서인 여관에서도, 좀처럼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그 파란머리 여자.. 여관은 그 여자가 머무는 곳이 확실해. 싸부는커녕, 날 쓰레기장에 버리고 간 남자도 한 번도 나타나질 않았어."
일반적으로 여기까지의 사고가 끝났을 때, 암살자로써의 인생을 살아온 그녀가 택할 선택지는 '미행' 단 하나 뿐이었다.
그러나 이 파란머리의 여자는 달랐다. 무려 '그 스승'이, 땡볕 아래를 헤치고 가 수박을 건네줄 정도의 인간이다.
어중간한 미행은 십중팔구 간파당할 게 뻔했고, 그 뒤에 자신이 안전하다는 보장도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감시만이 최선이었던 것이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그 남자, 그 남자는 싸부가 쌀쌀맞게 대했었지? 그 남자라면 그렇게 강하지도 않아 보였고, 싸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지 몰라. 문제는 그 남자가 어디에 있냐는 건데.."
머릿속을 쥐어짜고 쥐어짜서, 애쉬는 그날의 기억을 간신히 떠올려 낼 수 있었다.
"그래, 산! 산에서 망원경을 쓴다고 했었어! 좋아, 내일은 산을 돌아봐야겠어."
~
"흠, 흠흠~ 오늘도~ 데이린을~ 볼 수 있네요~"
제리스는 오늘도 산을 오르고 있었다.
등에 맨 가방에는 감시 장비 뿐 아니라, 여러 기후를 고려한 장비들과 식사까지 수납되어 있어, 가히 군장에 다다르는 무게임에도, 그에게는 전혀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응?"
못 보던 발자국이다.
이 길은 통상적인 등산로에서 한참은 어긋난 길이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외부인이 출입할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가장 우려되는 건 오로넬의 행차지만, 발자국은 한 사람 분이다. 데이린과 함께 다니는 그일 리는 없다.
제리스는 몸을 낮추고 조용히 배낭을 내려두었다.
등산로와 동떨어진 이곳은 그야말로 야생의 영역. 지금껏 수많은 야생동물들과 혈전을 치러 온 그였다.
모든 것은 이 명당자리를 사수하기 위해. 상대가 인간이라도 그것은 바뀌지 않는다.
쉬엑ㅡ!
무언가 가느다란 것이 빠르게 떨어지는 소리. 제리스는 전방으로 몸을 던졌다.
캉!
"오~ 허무하게 죽지는 않네? 역시 싸부라니까."
눈앞에 보이는 건 짧고 가벼운 단검과, 그것을 쥐고 있는 빨간 머리의 여성.
명백하게 공격성을 띤 말투와 행동,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제리스는 왼쪽 눈의 의안에 정신을 집중했다.
'어라, 힘이..?'
검을 쥔 손에 틈이 생겼다. 검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지고, 자세가 흐트러졌다. 상대의 왼쪽 눈에선 금빛 안광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조각..!'
그녀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리고 뛰쳐나갔다. 눈앞의 남자가 스승의 곁에 설 자격이 있는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순식간에 목표에 다다른 그녀는, 몸을 회전시켜, 역날로 쥔 검을 남자의 흉부를 향해 내질렀다.
퉁!
엄청난 가속도를 얻은 검을, 남자는 어렵지 않게 저지했다. 마땅한 무장도 없는 맨손으로, 검을 쥔 그녀의 손을 쳐내서 말이다.
모든 힘을 왼손에 쏟아 부은 그녀의 자세는 무너져 갔지만, 왼팔을 움직였을 뿐인 남자는, 곧바로 팔을 감아, 팔꿈치로 그녀의 턱을 가격했다.
쿵!
기울어져가는 몸에 급소까지 맞은 애쉬는, 발악 한 번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땅으로 고꾸라졌다.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 해 봐도,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몸과, 전신의 근육들이 혼선을 일으켜, 말을 듣지 않는다.
"무거우시죠? 아마 일어나기 힘들 거에요. 당신의 노력과 재능을 훔쳐 쓰고 있는 제가 잘 알아요."
"아, 하하! 대단한데? 넌 그 사람의 옆에 설 자격이 있어. 이렇게 순식간에 털린 건 그 사람 이후로 처음이야!"
"그 사람이라구요? 누굴 말씀하시는 거죠?"
제리스는 조각의 힘을 계속 사용하는 채로, 배낭에서 끈을 꺼내 거수자를 구속했다.
"누구긴 누구야, 오로넬이지. 우리 전에 한 번 만났잖아?"
나무에 매달린 채, 애쉬는 대답했다. 팔과 다리를 뒤로 묶고, 배가 지면을 바라보는 터무니없는 자세였지만, 두 사람 모두 신경 쓰지 않았다.
"저랑 만난 적이 있으시다구요? 전혀 기억에 없는 걸요. 살고 싶어서 그러시는 거라면 헛수고에요."
제리스는 수풀 사이에 떨어진 단검을 찾아 뒤적이고 있었다.
"잠깐, 오로넬씨라구요?"
"그래. 몇 주 전에 파란 머리 여자의 집에서 만났잖아. 니가 날 쓰레기장에 버리고 갔지."
그제서야 제리스는 허리를 펴고 일어나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그때 뵌 분인가 보군요. 전 통성명을 하지 않은 사람은 바로 머릿속에서 지워버려서요."
단검을 찾는 것을 그만두고, 제리스는 배낭에서 꺼낸 접이식 의자를 펼쳐, 애쉬의 맞은편에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그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만 봤다.
"저기, 신원파악이 끝났으면 좀 내려줬으면 하는데. 설마 이상한 짓 하려고 이렇게 걸어둔 건 아니지?"
"아니요. 신원파악이 끝나지 않았을 뿐이에요. 아직 그쪽의 이름을 듣지 못했거든요."
"애쉬야, 애쉬. 직업은 암살자에, 여기선 과일가게를 운영하고 있고, 지금은 변태한테 붙잡혀 있어. 그리고 오로넬의 제자이기도 하지."
"암살자라면서 묻지도 않은 걸 너무 많이 말씀해 주시네요. 혹시 제가 당신을 풀어주고 나면 없애실 생각이신가요?"
취조를 하면서도 제리스의 손은 안절부절 하지 못하며 망원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곧 데이린이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거 안 해. 애초에 니가 없으면 싸부의 소재를 파악 할 수가 없잖아."
"네? 무슨 말씀이시죠?"
"방금 다 들었다고. 니가 '오로넬씨' 라고 말한 걸 말이야. 너 싸부랑 아는 사이지? 지금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 지도 알고 있는 거지?"
제리스는 떠올렸다. 오로넬에게 직접 당부 받은 건 아니지만, 조지에게 하는 말을, 그 또한 듣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로넬은 이 여자와 만나는 것을 피하려 하고 있다.
"그걸 알아서 어쩌시려구요?"
하지만 이미 개기는 데에는 도가 튼 제리스다. 이 여자를 도왔다는 게 들통나면 어떤 일이 닥칠지 까지도 훤히 내다보였지만, 이제 와서 딱히 그것이 두렵지도 않았다.
"싸부가 그렇게 풀어진 얼굴을 하고 있는 건 처음 봤어. 전혀 그런 얼굴이 아니었다고 그 인간. 분명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 이 따분한 마을에 그 인간을 만족시킬 뭔가가 있는 거라고!"
"..그래서요?"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나도 거기서 놀 거라고! 더는 심심해서 못 살아! 수박에다 칼 던지고 노는 것도 이제 질렸단 말이야!!"
애쉬가 묶인 채로 바둥거렸다. 줄이 끊어지면 땅바닥에 배치기를 하게 될 텐데, 걱정도 되지 않는가 보다.
"흠.."
"고민하고 있구나? 알고는 있다는 거네? 교섭이라면 환영이야. 어떤 조건에도 응할 준비가 돼 있어. 니가 정보를 제공했다는 사실은 일채 말하지 않을 거고, 앞으로 니가 원하는 게 있다면 언제든지 처리해 줄게."
"넌 그저, 날 이 따분함 속에서 꺼내주기만 하면 될 뿐이야. 손해는 전혀 없고, 이득은 날 쓰기 나름이지. 자, 골라. 날 풀어주면 긍정, 두고 가면 부정으로 받아들일게."
"흠..."
이 파격적인 제안에 고민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제리스도 일단은 사람이었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 주제는 방금 열린 오로넬가의 창문을 망원경으로 보느냐 마느냐였지만 말이다.
"흐음..!"
"어, 어렵게 생각하지 마.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잖아."
사실상 노예 선언과 다름없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시간을 끌자, 애쉬는 초조해졌다.
"으음, 그래도 사람이 있으면 좀.."
제리스는 '관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뭐? 우리 말고 사람이 더 있어? 아니, 누가 보면 어때? 다른 사람 눈치 같은 건 보지 말라고!"
"흐음..!!"
딱히 눈치를 보는 건 아니었다. '관찰'에 있어, 제 3자의 존재는, 그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는 더욱 고민하는 것이다.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자신을 두고 가라고 하는데, 명당자리인 이곳에서 떠난다는 건, '관찰'을 포기하겠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그렇다고 그녀를 풀어주고 제안을 승낙하자니, 그녀의 질문 공세가 몰입을 방해할 것이 뻔했다.
1초라도 더 빨리 데이린의 얼굴을 보기 위해, 그는 최선의 수를 고민해야만 했다.
"제가 이걸 풀어드리면, 거래가 성립한다. 맞죠? 저는 오로넬씨의 소재를, 그쪽은, 애쉬씨는 쉽게 말해 제 편의를 봐주신다는 거죠."
"그래 맞아."
애쉬는 안도했다.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하죠. 오로넬씨의 소재는 반드시 알려 드릴 테니, 지금은 일단 제 눈앞에서 사라져 주시는 걸로. 급한 용무가 생겨서요."
"뭐? 그냥 한 마디만 해 주면 되잖아. 그게 그렇게 어려워?"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 싫으시다면 저기 있는 단검으로 절 찌르시던가요. 원하는 건 평생 찾지 못하게 되시겠지만."
아까보다 더욱 진지해진 얼굴로, 제리스는 말했다. 애쉬는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약속.. 지키라고."
남자는 더 이상 대답이 없다. 자리를 깔고 엎드려선, 숨을 죽이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을 뿐. 지금은 말 뿐 만인 약속을 믿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혼자가 된 남자는, 수첩을 펼치고 펜을 쥐었다.
'오늘도 구름은 맑고, 태양은 맑으며, 데이린은 귀엽다ㅡ'
변태의 일과와 함께, 세상의 아침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