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좋은 스승 소린 듣기 쉬워도, 좋은 제자 소린 듣기 힘들다 [2]
"오로넬, 어디 가는 거야?"
"산."
"산에는 왜 가?"
"불구경 하러."
이른 아침에도 꼬맹이의 입은 주절주절 잘도 움직였다. 이 이른 아침부터 외출을 한 건, 산 어딘가에 박혀있을 제리스를 만나기 위해서다.
오늘은 멍청한 제자놈이 죽음을 맞이하는 날. 유감스럽지만 그년의 목적이 날 찾는 것이기에, 가까운 곳에서 그것을 구경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제리스에게는 망원경이 있다. 산의 어디에서, 마을의 어디가 보이는지를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산을 오르고 있는 중인 거다.
"이쪽인가? 2주나 지나서 기억이 안 나네."
기억 속의 지도는 이미 잊혀진지 오래다. 등산로를 따라 걷고 있는데 부자연스러운 발자국이 눈에 띄었을 뿐이다.
확실히, 등산로에서 변태 짓을 하고 있는 건 너무 눈에 띌 것이다. 이놈도 사람새끼라면, 자기만 아는 장소에 박혀서 변태 같은 숨을 헐떡이고 있을 거다.
발자국이 끊어졌다. 명백하게 흔적을 지운 티가 났다. 아마 내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걸 확인하고 도망친 거겠지.
"꼬맹아, 여기서 여관까지 보이냐?"
"응, 잘 보여."
"역시 여기가 확실하구만. 어디보자, 저기가 여관이니까.. 마법사가 있는 곳이.."
콩알만 한 크기의 길을 눈으로 쫓아, 마법사가 머무는 여관을 찾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여관도 마찬가지로 콩알만 한 크기였기 때문에, 이 상태론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망원경."
왼팔을 허공에 뻗었다. 꼬맹이는 뭐하냐는 듯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곧 내 손에는 망원경이 쥐어져 있을 거다.
"망.원.경."
망원경이 귀가 안 좋나 보다. 잘 들을 수 있게 또박또박 큰 소리로 다시 말했다.
텁.
봐라. 망원경이 생겼다. 생각보다 더 먼 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넌 이 짓거리를 대체 몇 시 부터 하고 있는 거냐?"
여관 근처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아직 골빈년이 일어나지 않았거나, 작전을 바꾼 것일지도 모른다.
"해, 해 뜨기 전엔 산에 오르죠.."
"훔쳐보는 건 내 방뿐이냐? 여기서 마을에 있는 등신들은 다 볼 수 있겠는데?"
"훔쳐보는 게 아니라 지켜보는 거.."
"말지랄 하지 말고 대답이나 하시지?"
말장난이 정도가 심하면 말지랄이라고 부른다. 아니면 말고. 그냥 개소리라고 하는 게 가장 편하긴 하다.
"네.. 뭐, 오로넬씨가 식사를 하거나 실내에 들어가시면 마을을 둘러보긴 하죠."
"그럼 마법사가 지내는 여관 쪽도 한번은 봤겠네?"
"아.. 글쎄요. 정말 스쳐지나가는 정도로만 봐서."
"그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빨간 머리를 한 미친 여자는 본 적 없냐?"
"흠.. 빨간머리 여자라.. 못 본 것 같은데요?"
거짓말이다. 2주동안 그걸 한 번도 못 봤을 리는 없다. 거기다 기억이 잘 안난다는 모범 답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까지나 못 봤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저 대답. 설마 이 새끼..
"바닥에 찍힌 발자국이 두 개던데, 그년을 만난 거냐?"
"음......"
망원경을 눈에서 때고 제리스를 쳐다봤다. 가만히 있는 몸과는 다르게, 안구는 눈구멍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것처럼 사방팔방으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네."
그렇게 수 십초 동안 고민한 끝에 제리스가 내놓은 대답은 자백이었다. 역시 하는 짓은 변태 같아도 가게에서 손에 꼽는 현명함을 가진 놈이다.
"뭐라고 하더냐?"
"오로넬씨가 계신 곳을 말해주면, 시키는 건 다 해준다는 식으로 말했어요. 비밀도 보장하구요."
"그래서? 날 팔았냐?"
"아니요, 아니요. 일단 말해준다고 한 뒤에 돌려보냈어요."
보나마나 훔쳐보는데 방해가 되서 보낸 거겠지. 이 새끼한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
"근데 문제가 있어요."
"뭔데."
"약속을 꼭 지키라는 말을 하시고 내려가셨거든요. 이거 제 목숨이 위험한 거 아닌가요?"
"그래? 그럼 살고 싶으면 말해. 근데 이건 알아둬. 너도 당했지? 그년이 갑자기 공격하거나 비슷한 거."
"어, 네.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요."
"왜 그러는 줄 아냐?"
"아니요. 물어보려고 했는데 까먹었어요."
"이유 같은 건 없어. 그냥 하는 거야. 아무런 의미도, 생각도 없이, 그냥."
괜히 내가 골빈년이라 부르는 게 아니다.
"그런 놈을 가게에 풀어놓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냐? 무조건 흰놈한테 걸린다고. 그런 병신이라도 일단은 제자야. 제자가 뒤지는 걸 보고 싶은 스승이 있겠냐?"
여기 있다.
"아.. 그런 깊은.."
"아니, 요전에 쓰레기장에 버리라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쳇.
"그건 빨리 정신 차리고 동대륙으로 돌아가라는 따끔한 훈계였지. 쓰레기장에 버리고 간다고 죽는 건 아니잖아."
"근데 그때 분명, 이래야 확실하게 죽는다고.."
"어허! 지금 날 모함하는 거냐?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아.. 아니요, 아니요. 제가 잘 못 들었나 보네요. 그.. 그럼 전 어떡하는 게 좋을까요? 죽기는 싫은데."
"후.. 일단 집으로 보냈다고?"
제리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골빈년이 죽는 건 몰라도, 제리스가 죽는 건 곤란하다. 가게의 등신들을 막을 사람이 없어질 테니 말이다.
역시 제자의 문제는, 스승이 해결해야 하나보다. 내 스승놈은 그러지 않던데, 왜 나는 제자일 때나 스승일 때나 피해만 보는 건지 모르겠다.
"이제 어디 가?"
산길을 내려가며 꼬맹이가 물었다.
"과일가게."
"과일 먹으러 가?"
"그래, 넌 그거나 먹고 있어라."
"응."
똑같이 멍청해도, 꼬맹이는 말은 잘 듣는다. 무엇보다 이 녀석은 말이 적다. 나는 지금껏 이런 에이스를 폐기물 취급하고 있었던 건가.
"어, 오로넬. 또 과일 사러 왔어? 오늘은 이 멜론이 맛있는데.."
"점장은? 안에 있냐?"
"방금 왔는데, 왜? 아, 그것보다 알고 있었어? 우리 점장, 남자가 아니라 여자야. 왠진 모르겠는데 변장을 하고 있었다더라고."
"그건 알고 있고. 난 잠시 점장놈좀 만나고 올 테니까, 저놈 먹고 싶다는 것 좀 다 먹이고 있어봐. 돈은 나와서 줄게."
"어.. 그래."
"쟤 왜 저래?"
"몰라."
뻔히 들리는 마부와 꼬맹이의 대화를 무시하고, 골빈년의 방으로 향했다. 쓸데없이 긴 복도가 짜증을 더했다.
철컥철컥!
잠겨있다. 안에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지야? 무슨 볼일인데?'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열이 받는데, 대답해줄 생각은 없다.
쾅!
그대로 문을 걷어찼다.
"뭐, 뭐야?! 누구야?"
"나다, 이 새끼야."
"싸부?! 무, 무슨, 여긴 왜..?"
그렇게 찾으려고 지랄을 했으면서, 막상 눈앞에 나타나니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놈이다.
"스승이 제자를 보겠다는데 이유가 필요하냐? 오랜만에 얘기를 좀 해야겠으니 먹을 것 좀 들고 와라. 빨리!"
"어어엇, 네, 네!"
턱.
접시에는 껍질을 깎은 사과가 올라왔다. 사람 목은 수도 없이 따 왔으면서, 사과는 껍질도 제대로 못 깎는 게 참 모순적이다.
"그래서? 이제 뭘 할 건데? 날 찾았잖아? 아주 2주 동안 열심히도 찾았다면서? 덕분에 멱살도 잡히고, 내가 아주 제자를 참 잘 뒀어!"
"헤헤.."
"쪼개지 말고 빨리 말 하지? 여기 다시 온 것만으로도 기분이 아주 나쁘거든?"
"아.. 그러니까, 이게 그, 말로 하려니까 참 어려운데.. 싸부 혹시.. 창관 같은 데에 다니는 거에요?"
"뭐?"
이런 미친 새끼.
"아니 그.. 아~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그러니까, 싸부 기분이 뭔가 옛날보다 좋아 보여서, 저도 좀 좋아지고 싶어서요."
"그럼 내가 창관에 다닌다고 하면, 너도 다닐 거냐? 쑤셔 박을 것도 없는 게?"
"이참에 새로운 도전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죠."
낙관과 멍청함이 만나면 저렇게 된다. 아마 저놈은 똥이 맛있다고 해도 일단은 먹어 볼 것이다.
"여전히 동대륙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고?"
"에이, 전 아직 죽고 싶지 않다고요."
"그래도 이 마을에 있는 것 보단 그게 훨씬 재밌을 걸?"
"거짓말 하지 마세요. 싸부가 뭔가 즐길만한 걸 찾으셨다는 건 알고 있어요."
"뭘 근거로?"
"근거는 싸부 얼굴이죠. 옛날엔 그런 표정 짓지도 않았거든요? 무섭게 쳐다보기만 했지."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당연히 얼굴이 변하지 임마. 너 그 표정 유지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
"아 그러지 말고 알려 줘요~ 진짜 말 잘 들을게. 시키는 데로 할 게요."
어째 많이 들어본 대사다.
"그거 아침에 만난 놈한테도 한 말 아니냐? 넌 대체 주인이 몇 명이냐, 이 노예 새끼야."
"아. 거기서 오신 거에요?"
"네, 거기서 왔습니다."
"아.. 그러니까 그건.. 없던 일로 할게요. 싸부 말만 들으면 되죠, 뭐."
이래서 계약서를 작성하는 거다. 구두 계약 하는 놈들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
"네. 이번에는 진짜, 전문가로써 약속할게요."
"내가 시키는 대로 한다고?"
"네."
"동대륙으로 돌아가."
"아! 그건 반칙이죠!"
"이것 봐라? 말 안 듣네?"
"그건 죽으라는 거잖아요!"
"안 되겠다. 종이 가져와라."
"..네."
이건 계약서를 작성하겠다는 뜻이다. 다른 건 제대로 배워 처먹지도 않은 년이지만, 계약서의 무게만큼은 제대로 각인 시킨 걸로 알고 있다.
그게 아니면 저 나이가 될 때까지 암살자 일을 해먹을 수도 없었고, 국왕 시해라는 큰 축제에 초청 되지도 않았을 거다.
"자, 이걸로 됐지?"
아무튼, 여기서 제대로 된 해답을 내지 않으면, 다음엔 마법사에게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다.
내키진 않지만, 가게에 등신 한 명을 더 들이는 꼴이 되었다. 그렇다고 걱정은 하지마라. 아직 남아있는 비장의 수가 하나 있으니.
계약서에는, 가게에서 해서는 안 될 일과, 내가 보기 싫은 일들이 적혀 있고, 이를 어길시, 동대륙으로 돌아가겠다는 내용 또한 적혀 있었다.
지금부터 가게 될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골빈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찍어. 난 그다음에 찍을 테니."
골빈년은 단검을 꺼내 엄지를 찔러, 그 피를 계약서에 기입했고, 나도 그 뒤를 따라 지장을 찍었다. 이런 류의 계약서를 작성하는 건 참 오랜만이다. 손가락이 아픈 건 여전하지만.
"그럼 이제 거기에 데려다 주는 거죠? 싸부가 노는 곳."
"그 전에 마지막으로 해야 될게 있다. 이것만 끝내면 바로 갈 수 있어."
"아, 또 뭔데요? 빨리 말해 주세요. 후딱 해치우게."
"니가 2주 동안 괴롭힌 여자. 그 여자한테 사과하고 와라. 어차피 거기서도 볼 수 있긴 한데, 갈등은 미리 해소해 두는 게 좋잖아?"
"그거라면 쉽죠. 당장 갔다 올게요."
"그래? 그럼 난 먼저 가고 있을 테니까, 알아서 따라와라?"
"뛰시면 안 돼요. 알겠죠?"
"알았다고. 빨리 꺼져."
뛰지 않겠다는 대답을 거듭 확인하고 나서야, 골빈년은 방을 나갔다. 뛰지 않기로 했으니, 나도 서둘러 가게를 나가야겠다.
"끝났어? 점장은 저쪽으로 미친 듯이 뛰어가던데."
"상관없어. 그나저나 넌 오늘 빨리 퇴근하겠네."
"뭐 그렇지."
진열대는 마치 개장 전인 것 마냥 깨끗하게 비어 있었고, 그 구석에는 다소곳이 앉아있는 꼬맹이가 있었다.
"이거 전부 얼마냐?"
"글쎄, 중간부터 계산을 안 했는데. 지금 니가 가진 돈은 얼만데?"
"이 정도."
"절반만 줘. 그 정도면 점장도 모르겠지."
이런 놈이 종업원이라니 제자놈도 인복이 지지리도 없다.
나오려는 한숨을 꾹 참고 꼬맹이를 불렀다.
"야, 빨리 가야 돼. 일어나."
"응."
"가게에서 봐~"
마부에게 두어 번 손을 흔들어 주었다.
구름이 햇빛을 가리고 섰다. 바닥에는 땡볕 대신 그늘이 펼쳐졌다. 하늘도 내가 저년으로부터 도망치기를 바라고 있는 모양이다.
탕!탕!탕!탕!
여관 쪽에서 천둥과도 같은 굉음이 들려왔다.
'으아아아! 싸부, 살려줘!!!'
뒤에서는 멍청한 제자놈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뛰지 말라더니 어지간히 가게에 빨리 가고 싶나 보다.
"뛰어!"
제자를 위해, 나도 달려주기로 했다. 결코 저년의 뒤에 있는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게 아니다.
"싸부!! 싸부 살려줘!! 야!! 오로넬ㅡ!!!"
마을에는 미친 여자의 비명과, 나의 이름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