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공포 영화는 몇 번을 봐도 무섭다 [3]
라보의 등에 매달려 휴식을 취한 결과, 가게까지 걸어 올라갈 수 있을 만큼의 체력은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체력보다 다른 것이 더 절실하다.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이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 같은 거 말이다. 죄다 가게의 손님들이라 해도, 아까처럼 갑자기 튀어나오는 건 사양이다.
"라보, 너도 느껴지지? 이 역겨운 냄새."
"네. 아까도 이 냄새 때문에 시트린씨의 냄새를 못 알아 차렸어요."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한 마리는, 천천히 산을 오르며 이후에 마주치게 될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는 실 끝만큼 남아있던 햇빛도 없어졌다. 의존할 건 오로지 구름에 가려진 달빛과, 이 길의 끝에 보이는, 가게에서 희미하게 세어 나오는 빛 뿐.
고개를 들면 바로 눈앞에 가게가 보이는데, 오늘따라 왜 이리 멀게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뒤에 있던 녀석들은 아직 거기에 있어?"
"네. 정말로 오로넬 씨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인데요?"
"그걸 진짜 믿냐? 그 알코올 중독자 녀석이 아직까지 가게에 안 왔을 리가 없잖아."
조지에게 오로넬이란 그런 남자였다.
"그럼 시트린 씨는 왜.."
"이 앞에 뭔가 더 있다는 거지. 거기에 우리 둘만 갔으면 하는 거고."
뭔가가 있다는 걸 알지만, 알기만 해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지는 모르기 때문이다.
차라리 몰랐으면 속도라도 냈지, 모르는 게 약이라는 게 괜한 말이 아니다.
냄새가 더 강해졌다. 앞으로 몇 걸음 내에 누군가와 조우하게 될 미래가 보였다.
"이번엔 쫄지 말라고 라보."
"네. 이번엔 저희가 웃어 주자고요."
둘은 결의를 다졌다.
팍!
나무에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어둠속에 숨어있던 수많은 그림자들이, 달빛 아래로 걸어 나왔다.
~
"오, 뭐야. 저긴 아직 보이네."
나에게는 더 이상 저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이지 않는다.
꼬맹이에게는 티를 내지 않고, 단지 알아서 하고 있으라고만 일러두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꼬맹이가 단검을 던졌고, 나는 보이지도 않는 망원경을 들어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쳐다보는 척을 했다.
원래 못미더운 놈한테 일을 맡겨둘 때는, 내가 언제나 지켜보고 있다는 뜻으로, 확인하는 척을 몇 번씩 해 줘야 한다.
그런데 생각과는 다르게, 희미하게나마 달빛이 닿은 덕분인지, 대충 인간의 형태는 구분이 될 정도였다. 꼬맹이가 단검을 던졌으니, 저건 제 2방어진에 배치된 등신들이겠지.
개인적인 생각으론 몬드 할배가 이끌고 있는 이 2방어진이, 그나마 '공포'라는 주제에 가장 부합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주제를 살려도 너무 본격적으로 살려서 더 역겹다.
과연 저 녀석들은 저걸 보고도 멀쩡하게 넘길 수 있을까.
-우어어어어어ㅡ!
비통한 울음소리가 산중에 울려 퍼졌다.
조용히 망원경을 내리고, 귀를 막았다.
~
"뭐, 뭐야!?"
아래쪽에서 만난 토끼 군단과는 다르게, 이번에 맞닥뜨린 사람들은, 갑자기 튀어나와서 놀래키는 짓은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멀리서부터 나타나, 어디에서 몇 명이 오는지 까지도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냥 걸어오는데요?"
"하, 바람소리랑 헷갈렸나 보네. 우린 여기 있는데 말이야."
-으어어어어..!
그런데 사람들 상태가 좀 이상했다.
몇몇은 다리를 절며 다가오고 있고, 엎드린 채 기어오는 사람도 있다. 게다가 낮게 울리는 신음소리와 질펀한 액체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
아까부터 이 역겨운 냄새가 무슨 냄새인지 떠올리고 있었는데, 이제야 기억이 났다.
뚝. 뚝.
그것은 피의 냄새였다.
"조, 조지씨, 이거 괜찮은 거 맞죠? 저흴 놀리려고 이러는 거죠?"
그런 말을 하면서도 라보의 걸음은 뒤를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
"그, 그래. 다 연기지 연기. 맞죠 여러분ㅡ? 저희 안 놀랐으니까 그만 하시죠ㅡ! 빨리 술이나 마셔요ㅡ!"
조지는 달빛 아래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무리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조..지..! 라..보..!
둘의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느린 속도로 다가오고 있을 뿐.
두 수컷 모두,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다.
지금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건, 가게에서 항상 마주쳐왔던 사람들임을. 그리고 이건 그저 질 나쁜 장난이란 것을.
그러나, 그들의 눈과, 코와, 귀가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은, 피 칠갑을 하고 썩은 내를 풍기며, 자신들에게 가까워지고 있는 저 사람들을, 그저 움직이는 시체들로 인식할 뿐이었다.
"조, 조금 느낌이 이상한데요, 조지씨..?"
'라, 라보. 일단 소리를 줄이고 천천히 뒤쪽으로 내려가자.'
다행히, 그들의 속도는 느렸다. 도망치려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다.
그러나 여느 동물들이 그렇듯, 갑작스런 반응을 하게 되면, 이쪽으로 달려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은 자극을 하지 않고,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책이다.
팍!
어디선가 또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가 들려온 다음엔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났지만, 지금의 둘에겐 그것을 떠올릴 틈도 없었다.
-으어어어어어!!!
시체들이 멈춰서더니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둘은 시체들의 행동을 경계하며 제자리에 섰다. 뒷걸음질을 치던 게 그들을 자극 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름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쿵! 쿵! 쿵! 쿵!
"왜, 왜이래!? 뭐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자신들을 배신하지 않던 땅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흔들림은 점점 크게, 점점 빠르게, 그 힘을 과시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이쪽으로 다가 오고 있었다.
쾅!!
"으아악!!!"
조지와 라보는, 비명을 지르며 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장작처럼 쪼개진 눈앞의 나무 때문이 아니다.
그 나무를 쓰러뜨린 무언가를 괄목했기 때문이다.
머리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못이 박혀있는, 거구의 남자를.
~
'쾅!!'
"어우 시발!"
갑자기 들려오는 큰 소리에, 하마터면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다.
"뭔 일이냐?"
즉시 꼬맹이에게 상황 설명을 요구했다.
"몬드가 나무를 넘어뜨렸어."
"그 할배, 아주 자기 역할에 제대로 심취했구만. 가게에서도 신음소리만 내더니, 나무까지 부수냐? 괜히 미치광이라고 불리던 게 아니네."
가게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몬드 할배의 시체 부대 때문이었다.
비슷한 놈들끼리 뭉치는 건지, 그놈들도 각자의 역할에 미쳐있는 상태였고, 그걸 위해 순록의 피까지 뒤집어썼다고들 한다.
그중에서도 제일 기억에 남는 미친놈은, 다리가 잘린 설정이라면서 땅바닥을 기어 다니던 놈이었는데, 무려 그 꼴로 가게에서 저기까지 내려갔다.
물론, 제일 역겨운 건 대장인 몬드 할배다. 뭘 어떻게 한 분장인지는 모르겠는데, 말뚝만한 못에 꿰뚫려 있는 머리통에, 피까지 뒤집어쓰고 있으니, 시각적 역함과 후각적 역함이 모두 느껴지는, 역겨움의 완전체라고 할 수 있겠다.
'으아악!!!'
누가 동물이고 누가 사람인지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비명이었다.
그래. 그래도 저건 이해한다. 한밤중에 저런 괴물이 나무까지 박살내면서 튀어나왔는데, 비명만 나온 게 어디냐.
뭐, 다른 게 더 나왔는지는 여기 있는 내가 확인할 순 없지만.
"이제 흰놈한테만 신호주면 끝이냐?"
"응."
"그것까지 하고 빨리 내려가자. 저놈들 오기 전에 뭐라도 먹어야지, 나중에는 냄새 때문에 못 먹는다."
"알았어."
허기가 배를 울리다 못해 걷어차고 있었다. 가게에 가도 음식을 먹는 건 아니지만, 항상 넣어주던 술조차도 없으니, 뭐라도 넣어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지쳐가는 꼬맹이의 사기를 북돋아 주고, 보이지도 않는 망원경을 돌리며 시간을 때웠다.
~
"허억.. 허억..!"
"저게 뭐야, 저게 뭐냐고!!"
쿵! 쿵! 쿵! 쿵!
조지와 라보는 올라왔던 길을 고스란히 내려가고 있었다. 돌연히 나타난 거구의 남자와 함께, 시체들이 질주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마에는 땀이 맺혔지만, 더위를 느낄 틈은 없었다. 오히려 피부에는 소름이 돋아 차가워진 상태였다.
"허억..! 몬드 씨의 얼굴에, 박혀 있는, 못, 봤어요?!"
"얘기하지 마, 구역질 나오려 하니까!"
"진짜, 진짜로 죽은 거 아니에요?! 대체 누가..!"
"닥치고 뛰기나 해! 일단 우리부터 살고 나서 얘기하자고!"
그렇게 몇 분을 뛰어 내려간 그들의 눈앞에는 시트린이 이끄는 토끼 군단의 뒷모습이 보였다.
"시트린ㅡ!! 튀어ㅡ!! 몬드 어르신이 이상해!!"
충분히 들릴만한 거리와 음량에도, 시트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지 않는 이상, 이 처절한 절규에 응답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지는 잊고 있었다. 시트린과 몬드가 한 패라는 것을.
그만큼 그가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은 심각했다.
"이봐! 빨리 도망치라고! 저거 안 보여?! 이봐!!"
그래도 눈앞에 있던 사람들을 못 본 척 할 수 없었던 조지는, 자신이 따라잡힐 수 있는 상황임에도, 뛰는 것을 멈추고 후열에 있는 토끼 인간에게 다가갔다.
털썩.
그러나 토끼 인간은 그의 손이 닿기도 전에, 힘없이 지면으로 쓰러졌다.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스며들고 있는 붉은 액체가 보였다.
"이게.. 무슨.."
털썩. 털썩. 털썩.
쓰러진 건 이 한 명만이 아니었다. 후열에서부터 전열로, 차례차례 토끼 인간들이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시트린 마저도.
"으어어어어ㅡ!!"
바로 뒤에서는, 귓가에 대고 외치는 것 같은 큰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코앞까지 다가온 몬드가, 나무를 넘어뜨린 그 주먹을 들어, 자신들을 향해 내지르고 있었다.
"으아악!!"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이제 비명을 지르는 것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더 이상 뛸 체력도, 도망칠 자신도 없었다.
모든 걸 체념한, 그 순간이었다.
스릉!
날카롭게 베어 들어가는 금속음이 공간을 가로질렀다.
~
"아, 됐다. 이제 내려가자."
"응."
마지막 신호를 무사히 전달하고, 남은 단검을 챙기며 내려갈 채비를 했다.
"드디어 끝났네. 대체 이 마법사 새끼는 자기가 하자고 해놓고 어디서 처 놀고 있는 거냐?"
내려가면 그놈부터 잡아 패겠노라 다짐했다.
"어. 야, 꼬맹아. 저거 뭐냐?"
나는 한창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곳과는 반대 방향에 있는, 어두컴컴한 산길을 가리켰다. 마왕성과 연결된 그 길에서 희미하게나마, 무언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나디아야."
혹시 몰라서 꼬맹이에게 판독을 맡긴 건 정답이었다.
저 두 놈을 놀리는 데에도 저 지랄을 하고 있는데, 한 놈이 더 추가 된다면, 오늘은 술의 향기조차 느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건 나를 위해서기도 했지만, 가게 안에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을 점원들을 위해서기도 했다.
그놈들은 돈도 받지 않으면서 손님들의 시중을 드는 걸 즐기는 변태들이니까, 지금쯤 발작을 일으키고 있을 지도 모른다. 즐겁게 술을 마시기 위한 가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둘 수는 없지 않겠는가?
"꼬맹아."
"응?"
"이거, 저 새끼한테 던져."
나는 챙기고 있던 단검들을 꼬맹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꼬맹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어디에?"
"저 새끼. 대가리."
생각해보니, 저 녀석에겐 부활이라는 힘이 있었다. 즉사 시켜버리면, 오히려 깨끗하진 상태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어디까지나 가게에 오지 못하도록, 적당히 조지는 게 관건이었다.
이미 단검을 든 팔을 머리 뒤로 넘기고 있는 꼬맹이의 팔을 붙잡고, 주문을 추가했다.
"대가리에 던지는데, 살살 박아. 뒤지지는 않게. 딱 그 정도만. 할 수 있겠냐?"
꼬맹이는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꼬맹이의 팔을 놓아주었다.
"던져.”
그리고 조용히, 발사 명령을 하달했다.
마왕 나디아. 악감정은 많지만, 살아줘야겠다.
달빛을 머금은 백은의 단검이, 그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