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공포 영화는 몇 번을 봐도 무섭다 [4]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외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들었던 팔을 내리고 , 서로를 꽉 붙잡고 있던 눈꺼풀을 떼어내, 앞을 확인 한다.
이 모든 것이 꿈이길 바라며.
"으엑!"
눈을 뜨고 전방을 확인한 조지는,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코앞까지 뻗어있는 주먹과, 멈춰 서있는 몬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몬드뿐만이 아니다. 다른 시체들도, 그와 같이 활동을 정지한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모.. 몬드 어르신?"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숨조차 쉬지 않았다. 조지는 불안한 기분이 들면서도 그의 몸에 손을 뻗었다.
쿵!
조지의 손이 닿자, 몬드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며 돌처럼 쓰러졌다. 그 충격으로, 뒤에 있는 시체들도 우후죽순으로 지면을 향해 쓰러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조지씨..?"
"모, 모르겠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모, 몬드 어르신이.. 죽은 건가..?"
"조지씨, 저, 저기!"
어둠을 몰고 왔던 구름이 흩어지고, 만월의 빛이 땅을 비추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아래에 있는 무언가와 함께.
"허억..!".
크그그극, 크그그극.
날붙이가 바닥에 부딪히며 끌려 다니는 소리. 그것도 평범한 크기가 아닌, 사람 한 명은 족히 넘어가는 크기의 대검.
"후욱..! 후욱..!"
그 검과 함께 다가오는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피로 얼룩진 칠흑의 갑옷에서 새어나오는 절망의 소리가.
조지와 라보는, 도망치는 것을 그만두었다. 저것으로부터는 벗어날 수 없다. 검에서 흐르고 있는 피와, 주변에 쓰러져 있는 인간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
크그그극, 크그그극.
죽음은 그들을 편하게 보내주지 않았다. 검을 끌며,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이 그들을 향해 가고 있음을, 천천히, 고통스럽게 알려왔다.
"라, 라보.. 사실, 어제 너한테 준 사과.. 벌레 있는 거 알고 일부러 준 거야.. 미안해."
조지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지었던 죄를 친구에게 고백했다. 인간은 누구나 떠날 때가 되면 속세의 짐을 덜어놓고 싶은 법이다.
"괘..괜찮아요. 어차피 저도, 받자마자 버렸어요."
"후욱..! 후욱..!"
이제, 땅이 긁히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것은 오로지 세 명의 숨소리 뿐.
턱.
마침내, 둘 앞에 죽음이 당도하였다.
~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제 3방어진의 담당자인 흰놈도 출격시켰고, 마왕을 요격하는데도 성공했다. 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나서, 드디어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진짜로 마왕 녀석 제대로 처리한 거 맞냐, 꼬맹아?"
"응. 저기 쓰러져있어. 죽진 않았어."
"후.. 그럼 됐고. 내려가기 전에 저 녀석들 표정이나 좀 볼까?"
마침 달빛을 가리고 있던 구름들이 사라졌다. 내려두었던 망원경을 집어 들고, 인적을 찾아 숲을 두리번거렸다.
"야, 저 새끼들 우냐? 진짜 우네. 하하하하."
망원경에 비친 것은, 마법사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을 광경이었다.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두 놈의 눈은, 물을 머금어 퉁퉁 부어있었다.
"이야, 저 정도면 바지에도 지렸겠는데?"
"쟤들 왜 우는 거야?"
"무서우니까 울겠지."
"무서우면 울어? 슬플 때만 우는 거 아니야?"
"원래 인간은 별의 별 이유로 울곤 한단다, 꼬맹아. 나도 가끔 널 보면 울고 싶을 때가 있지."
"내가 무서워?"
"아니, 존나 멍청해서."
"그렇구나."
꼬맹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꼬맹아."
"응?"
"바로 가게에는 못 가겠다."
"왜? 다 끝났잖아."
꼬맹이의 목소리에서 억울함이 느껴졌다.
"저거 장난이었다고 하면 무조건 싸운다. 그래서 가야 돼."
눈가가 저렇게 부울 정도로 놀렸는데, 장난이라고 웃고 있으면 누구라도 주먹을 휘두를 거다.
"싸움은 지크가 말려 줄 거야."
"아니, 구경하러 갈 건데?"
"..그렇구나."
꼬맹이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꼬맹이만 먼저 보내줄까 하고 생각도 해 봤지만, 불놀이를 할 때는 옆에 물을 두고 하듯이, 싸움 구경을 할 때는 그 놈들보다 센 놈을 옆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 진짜. 그럼 오늘은 여기서 밤 샐 테니까 조금만 더 참아라."
"알았어. 참을게."
또 말도 안 되는 거래를 하고 나서야 꼬맹이의 구겨진 얼굴을 펼 수 있었다.
든든한 경호원을 확보한 나는, 등신들의 격전지로 향하였다.
~
이상한 일이었다.
"후욱..! 후욱..!"
조지와 라보의 앞에 멈춰선 그것은, 거친 숨을 내쉬기만 할 뿐, 그들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몇 분간의 정적에도 여전히 목숨이 붙어있자, 그들의 절망은 서서히 희망으로 바뀌어갔다.
그때였다.
철컥.
다시 갑옷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둘은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자신이 죽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큼 비참한 죽음은 없으리라.
크그그극, 크그그극.
그러나 그 둘은 곧바로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땅을 긁는 소리가 자신들의 뒤를 지나쳐갔기 때문이다.
땡그랑!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이 쥐고 있던 검을 손에서 떨어뜨리고, 갑옷을 벗어던지며, 산길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는, 누군가의 앞에서 멈춰 섰다.
"시트린, 이제 올라가자. 끝났어."
조지와 라보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로 다음 순간, 쓰러졌던 시체들이 다시 일어나 웃음을 터트리기 전 까지.
~
-하하하하하!!!
축제에는 늦지 않게 도착한 모양이다. 누워있던 등신들이 하나 둘씩 일어나며 두 놈을 향해 메아리가 울릴 정도로 크게 웃어댔다.
마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만 할 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것을 알아차리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말이다.
"이 개새끼들아!! 장난도 정도가 있지, 존나 무서웠다고!!"
그러고는 주변에 있는 등신들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며 욕을 해댔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내가 등장하기 딱 좋을 때다.
"하하하하, 이 병신 같은 놈. 그걸 속냐, 하하하!"
이 상황에서 감히 어떤 놈이 자신에게 욕을 하는 거냐는 듯이, 마부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서 나를 노려봤다.
"이 시발. 너는 왜 거기서 나오냐?! 오로넬 아직 안 왔다면서? 저건 누군데, 이 새끼야!"
나는 꼽을 주며 나타난 것뿐인데, 다짜고짜 용사에게 달려가는 마부였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워, 워. 진정하게, 조지."
몬드 할배가 마부의 양 팔을 구속하며 말했다. 사나이의 눈에서 눈물을 뽑아내 놓고 진정하라니, 이렇게 거하게 놀려먹었을 때는 잠자코 처맞아 주는 게 예의인 것도 모르나보다.
"이거 놔!! 다 죽여버릴 거야!!"
마부는 온몸을 비틀며 저항했다.
그렇게 사방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마부와는 다르게, 늑대는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모든 사고를 정지하고, 외부로 부터의 자극을 무시한 채 서있는 그 모습은, 마치 타고 남은 장작을 보는 듯 했다.
"내가 다 기억해뒀어! 너희들이 나한테 한 짓을 다 기억했다고! 반드시 복수할 테다 개새끼들!"
"오, 기억했다니 정말인가? 내 연기는 어땠나? 정말 박진감 넘쳤지?"
짝!
몬드 할배는 붉게 달아오른 뺨을 어루만졌다. 솔직히 저건 처맞을만 했다. 오히려 한 대로만 끝난 게 다행이지. 늙어서 득본 거다.
"자, 자. 남은 싸움들은 가게에 들어가서 하자고. 일하고 바로 올라와서 목마르잖아. 벌주는 얼마든지 마셔줄 테니까, 응?"
좀처럼 분노가 수그러들 생각을 하지 않는 마부의 어깨에 팔을 얹으며 용사가 말했다. 상황을 빨리 끝내겠다는 취지는 좋으나, 다른 놈들의 의사도 묻지 않고 벌주를 마시겠다고 선언한 건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진짜지?"
대체 뭘 넣을 작정인지, 마부는 씩씩거리면서도 흔쾌히 수락했다.
"그럼, 그럼. 뭘 넣든 달게 마실게."
용사는 마부의 어깨를 토닥이며 한발자국씩 가게를 향해 올라왔다. 다른 등신들은 기능을 정지한 늑대를 들쳐 업고 둘의 뒤를 따랐다.
"그래서 넌 대체 어디 있었냐? 이상한 냄새도 안 나고 가면도 안 썼네."
마부가 나를 보고 물었다.
"나? 난 방금 왔는데?"
"지랄하지 말고. 넌 직접적으로 나서진 않은 것 같으니까, 벌주 안 먹일게."
대놓고 거짓말을 했는데, 마부가 거래를 제안했다. 이 조건이라면 흔쾌히 입을 열고말고.
"저놈들한테 너희가 왔다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
원하는 대로, 사실을 말해 줬다.
"..너는 내가 그 자리에서 똥을 싸서라도 먹인다."
역시 구두계약은 믿을 수 없다.
"아, 그러지 말고. 내가 더 좋은 걸 알려줄게."
"뭔데?"
"그건ㅡ"
끼이익.
가면을 쓴 등신들과 앞다투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에 온지 몇 시간 만에, 드디어 술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몬드 할배를 비롯한 시체들은, 가게 뒤편에서 분장을 씻고 오기로 했다. 오늘 몬드 할배가 한 일중에 가장 잘 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가게에 들어온 나는, 맨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을 보고, 주먹을 휘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시간동안 그 고생을 하고 왔는데, 자기 자리에 앉아서 태평하게 술이나 마시고 있는 마법사 새끼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 어어어! 잠깐만, 잠깐만! 나 할 말 있어, 할 말!"
마법사가 몇 대를 처맞더니 할 말이 있다고 한다. 애석하게도, 내 차례가 끝이 아니기 때문에, 들어줄 수 없는 요청이다.
"처맞으면서 해."
그래도 발언권은 줬다.
"여기서, 쿠헠! 기다리다가, 쿠헠! 너무 심심해서 쿠헠! 한 잔만 마셨는데, 쿠헠! 멈출 수 없게 돼버려서 그만.. 쿠헠!"
잘도 이딴 말을 변명이라고 씨불인다. 그냥 들었으면 더 때렸을 것 같은데.
"어흐.. 술 마셨는데도 아파.."
마법사는 바닥에 주저앉아 퉁퉁 부운 볼을 만졌다.
"일어나 이 새끼야. 아직 너한테 볼일 있는 인간이 있다고."
"으엥?"
"안녕 시오."
"아.. 안녕? 조지..? 오랜만..이네?"
마부는 웃고 있었다. 소름이 끼칠 만큼 환하게.
나도 오랜만에 만나니까 기쁘네. 요즘 어떻게 지내?”
뭐, 오랜만이긴 했다. 하루에 한 번씩 만나던 놈이 하루 하고도 2시간 뒤에 나타난 것이니.
으응.. 잘 지내..지. 소, 손에 든 건 뭐야?”
손에는 반듯하게 생긴 나무막대가 쥐여져 있다.
"이거? 너한테 줄 선물."
둔탁한 소리가 경쾌하게 가게 안을 메웠다.
마부와의 볼일이 끝났음에도, 마법사는 자유를 얻을 수 없었다. 등신들로부터 두 시간의 추방형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유는, 같은 계획을 공모한 동료들과 함께 마시지 않고, 혼자 술을 마셨다는 것이다. 참으로 그놈들 같은 이유다.
“스튜 한 그릇 더.”
“갑니다~”
꼬맹이는 참았던 만큼, 가게의 식량창고를 거덜 내고 있었다.
더 이상 역겨운 분장을 한 놈은 없었지만, 술에는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다. 마부와 늑대가 오만 걸 넣어서 만드는 벌주 때문에, 눈과 코가 끊임없이 공격받고 있어서이다.
마법사는 불쌍한 눈을 한 채, 창문 너머로 등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개도 아니고, 저런다고 누가 들여보내줄 줄 아나보다.
저벅..저벅..
괜한 동정이나 사려고 창가를 바라보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그런 쪽팔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으어어어.. 시..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무언가를, 좀 더 일찍부터 눈치 챌 수 있었을 것이다.
턱.
"응?"
머리에 단검이 꽂힌 채, 새빨간 선혈을 뿜어내고 있는 남자를 말이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역시, 누군가를 담그려면 자신 또한 담가질 각오를 해야 하는 법이다.
산중에 울려 퍼지는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그것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