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부모님의 은혜는 하늘과도 같아서 [1]
오늘은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를 전하는 날이라고 한다. 어버이날 같은 건 동대륙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서대륙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나 보다.
마침 이번 년도에는 안부편지도 보낸 적이 없었는데, 생각난 김에 발프에게 몇 글자 쓰도록 해야겠다.
"오로넬, 편지 써?"
내가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면, 어김없이 침대를 강탈하여 드러눕는 꼬맹이였다.
"그래."
"오늘은 왜 반짝거리는 종이가 아니야?"
하긴, 여기 앉아서 쓴 편지라곤 왕놈한테 보내는 게 전부였으니, 꼬맹이가 저렇게 생각 할 법도 하다.
"이건 다른 놈한테 쓰는 거다."
"그렇구나."
꼬맹이는 다시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저러고 숨이 쉬어지나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부터 발프놈이 손녀딸이 보고 싶다고 그렇게 땡깡을 부렸었는데, 자기가 결혼해서 낳으면 될 것을, 주워다 키운 나한테 씨를 뿌리란다. 그냥 딸보단 손녀딸이 감회가 다르다면서 말이다.
그래서 이번 편지에는 그놈이 그토록 원하는 손녀딸의 이야기를 해 줄 생각이다. 일단은 꼬맹이니까, 이놈이 하는 짓은 대부분의 애새끼들도 하는 짓들이겠지.
편지를 읽고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날 이딴 곳에 처박아뒀으니, 발프는 영원히 그 실체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보고 싶으면 왕놈한테 귀띔이라도 하던가. 그놈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다. 애초에 그걸 노린 작전이기도 하고 말이다.
"야, 꼬맹아. 니 이름이 뭐였지?"
머릿속엔 분명 들어있는데, 맨날 꼬맹이라고 부르다가 막상 글로 쓰려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데이린."
"아, 맞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라면 보통, 상대에게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은데, 꼬맹이는 그런 거 없다. 그저 덤덤하게 묻는 말에 대답할 뿐.
「아니, 어떻게 반년을 같이 살았다면서 이름을 까먹을 수 있는 것이냐? 머리는 제대로 달려 있는 것이 맞느냐?」
당사자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데, 옆에 있는 제3자가 끼어들었다. 애초에 이놈 이름은 머리에 집어넣지도 않았다.
"시끄럽다. 막대기."
「이몸의 이름은 엔드홀! 엔.드.홀. 이란 말이다!」
"그래, 막대기."
「으으..!!」
"뭐, 어쩔 건데?"
펜을 내려놓고 막대기를 노려봤다. 이놈 때문에 쓰려했던 말을 까먹어서이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막대기는 조용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여기서 더 개겨봤자 자기한테만 피해가 닥칠 것을 알고 있어서이다.
"편지에 내 이야길 적고 있는 거야?"
막대기가 빽빽 대던 자리에는, 어느새 꼬맹이가 와있었다.
"그래."
"누구한테 쓰는 거야?"
자기 얘길 어떤 놈한테 하고 있는지를 묻는 거겠지.
"발프라고, 다 죽어가는 늙은 할배 한 놈 있어."
"그 사람이랑 친해?"
친하냐고 물으면, 그건 좀 애매한데.
"서로 욕 박을 정도는 되지."
이 정도가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그렇구나."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침대로 돌아가는가 싶었는데, 오히려 자리를 잡고 앉는 꼬맹이였다.
이놈도 먹고 싸고 자기만 하는 생활이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한 모양이다.
"발프는 뭐하는 녀석이야?"
그렇긴 해도 질문들이 하나같이 쓰잘데기 없는 것들뿐이다.
꼴을 봐선 이 영감탱이 얘기 하나로, 가게에 갈 시간이 될 때까지 대화를 이어갈 것 같다.
저놈은 앉아서 떠오르는 대로 질문만 하는 거겠지만, 나는 편지를 쓰고 있는 도중이다. 이 대화가 길어질수록 편지의 완성도 길어진다는 뜻이지.
괜히 길게 말하면 다른 질문을 할 여지를 주게 되니, 최대한 짧게 응해야겠다.
"백수."
외교부 장관이라고 해봤자 이놈이 알아들을 리가 없지.
그런데 애초부터 그런 걸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백수가 뭐야?"
이 놈은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일 안하는 놈들."
"그럼 나도 백수야?"
"그래."
말꼬리를 물고 질문을 반복하는 꼬맹이에게, 단답형의 대답을 받아냈다. 이렇게 되면, 꼬맹이는 다음 질문을 스스로 생각해내야 한다.
이 녀석의 빈약한 머리로 뽑아 낼 수 있는 질문은 몇 개 되지 않는다. 나는 조용히 그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시트린도? 시오도 백수야?"
"그래."
두 번째 질문도 단답으로 끝났다. 연속으로 질문을 쥐어짜려는 꼬맹이의 표정이 한껏 찌그러졌다.
지금이라도 날 가만히 놔둔다면 편지만 쓰고 가게로 올라갈 수 있을 텐데, 자기가 하고 있는 짓 때문에 그게 늦어지고 있는 건 알고 있을까?
"왜 전부 백순데 오로넬만 일 해?"
묵직한 질문이 들어왔다. 뼈를 맞은 것만 같다. 듣고 보니 그렇다. 왜 저런 놈들도 일 없이 노는데, 나는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냐.
꼬맹이라고 얕봤더니, 질문 하나로 내 기분을 잡칠 줄이야. 역시 되는대로 씨불이는 것만큼 강한 무기가 없다.
"그러게. 왜 나만 일하냐? 존나 억울하네."
이것은 질문에 질문으로 답함으로써 질문자와 답변자의 입장을 역전 시켜버리는 금단의 기술이다.
거기다 마지막에 자신의 심정을 덧붙여, 문장 자체가 독백으로도 보일 수 있어, 대화를 끝내 버리는 것도 가능한 무시무시한 기술이지.
"그럼 오로넬도 일 안 하면 되잖아."
와.. 이건..
하지만 그것조차도 꼬맹이에게는 통하지 않았고, 말인지 똥인지 모를 대답이 튀어나왔다.
하기 싫으면 때려치우라니 이걸 어떻게 받아치란 거냐.
"..."
이건 대꾸하기도 좆같은데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건가? 그래, 가게에 빨리 가기 위해서니 여기서 그만 끝내도록 하자. 그러는 게 꼬맹이도 좋아할 거다.
나는 다시 펜을 집고 편지를 이어 쓰기 시작했다.
"왜 대답 안 해, 오로넬? 일 계속 하고 싶어?"
어우, 이 미친놈.
"내가 일을 안했으면 니가 그렇게 처먹을 수 있었을 거 같냐? 여기서 두 발 뻗고 잘 수 있었을 거 같아? 니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내가 일을 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거라고, 이 멍청한 꼬맹이야."
"오."
한 순간이라도 열을 냈던 내 자신이 병신 같아지는 순간이었다. 상대가 신경질을 내는 것을 보고도, 눈앞의 이 콩알만 한 꼬맹이는, 이해했다는 듯이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그럼.."
"아! 가게 갈 거니까, 닥치고 준비나 해라."
이 근본 없는 화법을 파훼할 수 없음을 깨달은 나는, 편지를 치우고 항복 선언을 했다.
애초에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 놈을 대화로 이기려 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싸움도 아니었던 거다.
기다렸던 말이 내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꼬맹이는 세면대로 사라졌고, 나는 치웠던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
오늘 쓴 걸 보내기로 다짐했으니, 이거라도 보내야지.
원래 편지란 건, 쓰기로 마음먹은 그때에 다 끝내지 못하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진전이 되지 않는 법이다.
어차피 안부 차 쓰는 것이었으니, 맨 첫줄에 쓴 잘 지내냐는 말 하나로 목적은 완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숙소에서 출발한 시간은 2시, 이 시기에 가장 더울 시간이었다.
그늘 하나 없는 마을을 가로질러 편지를 부치고, 모기들이 지배하고 있는 산을 올라 가게에 도착했다.
"누나가 열라니까!"
"아니, 내가 먼저 왔으니까, 니가 열어!"
입구에는 처음 보는 남녀 한 쌍이 서로에게 문을 열라며 떠넘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뭐야 당신들?"
-으어억!?
싸우느라 주변도 보이지 않았던 건지, 몇 분 동안 옆에서 지켜보다 마지못해 말을 걸었는데, 기습이라도 당한 듯 깜짝 놀라는 둘이었다.
"아, 아무 일도 아니니까 가던 길 가거ㄹ.. 아니, 가세요."
검은 머리의 여성이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긴, 내가 몇 분 동안 옆에서 봤다니까.
"아니, 누나.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말본새가 그게 뭐야? 초면에 죄송합니다."
남색 머리의 남성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사과할 일은 아닌데, 이 가게에 뭐 볼일이라도 있냐? 뭔 이상한 소문 듣고 온 거면 그냥 가라. 니네가 상상하는 그런 곳이 아니다, 여긴."
내가 처음 본 인간이면 가게에 처음 오는 인간이 확실하다.
나는 그들이 아직 문을 열지 않았을 때, 조용히 돌아갈 것을 권했다. 이 문을 넘으면 누구나 병신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대도 바깥에는 아직까지도 전설의 술집이라는 되도 않는 소문이 돌고 있는 모양이다.
"네? 그런 곳이라니, 어떤 곳을 말씀하시는 거죠?"
남자가 세상 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소문을 듣고 온 게 아니라면 이런 산 구석에 가게가 있다는 것조차 알 수가 없을 텐데 말이다.
"구라치지 말고. 전설의 술집이니, 뭐니, 이상한 소문 듣고 온 거잖아."
남자 쪽으로 턱을 튕겼다. 저 모르는 척이 거짓말이면 배우급의 연기고, 사실이라면 고고학자급으로 숨겨진 걸 잘 찾는 괴짜다.
어느 쪽이든, 가게 손님으로 어울릴 것 같은 놈이긴 하다.
"소문이라뇨, 저흰 여기에 아버지가 계시다고 해서 찾아 온 것뿐이에요."
"바보야!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런 걸 말 하면 어떡해!"
아까부터 계속 싸워대더라니, 남매였던 모양이다.
남매는 딱 두 부류다. 서로에게 일체의 관심도 주지 않고 없는 사람 취급하며 살아가는 부류와, 시도 때도 없이 서로에게 간섭하며 호시탐탐 목을 딸 기회를 엿보는 부류.
어찌됐든 남매는 서로를 죽이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거다. 존재를 지우든, 실체를 지우든.
"그럼 들어가서 아빠든 엄마든 찾으면 되지, 왜 문 가지고 싸우고 있냐? 문이 니네한테 욕이라도 하든?"
"그래, 이거 가지고 싸울 필요가 어딨어? 가녀린 누나가 들어갈 수 있도록, 당연히 동생이 문을 열어 줘야지. 웃어른을 공경하란 말이야."
"아니, 윗사람이 오히려 모범을 보여야지. 누나가 되서 동생을 위해 문하나 열어주는 것도 못 해?"
생각보다 많이 중증인데. 가게에 들어가는 걸로도 이 정도면, 당장 칼부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 맞아. 당신, 여기서 만난 것도 무언가의 운명인데, 당신이 정해줘. 저 문을 열어 마땅한 자가 나인지, 동생인지."
그래도 누나 쪽이 연장자답다고 해야 하나, 본인들만으로는 절대 끝나지 않을 싸움에, 제 3자를 개입시켜 승패를 정할 것을 제안했다. 내 의사는 묻지 않고 말이다.
"하.. 일단, 동생 쪽도 찬성 하냐?"
나는 마지막 탈출 수단으로 동생의 뜻을 물었다.
보통 철없는 동생이라면, 어차피 내 말이 맞는데 그런 걸 왜 하냐는 식으로 말 해 줄 것이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나는 두 사람의 방해가 되지 않도록 곧바로 가게 안으로 도망쳐 줄 것이다.
"네, 부탁드립니다. 솔직히, 제가 뭐라고 하든, 누나는 우기기만 하거든요."
누나의 의견을 수용하면서도 공격을 하다니, 남동생도 상당한 고수였다.
"뭐?! 너는 안 우기냐? 증거를 보여줘도 끝까지 우기는 게!"
[email protected]%#@%@%!!
하.. 이 남매는 답이 없다. 바닥에 박혀있는 돌을 보고도 싸울 놈들이다.
명분도 논리도 없는 개소리의 현장으로부터 도망쳐, 몰래 가게로 들어갔다.
사실 몰래도 아니었다. 그냥 그놈들 옆을 돌아왔을 뿐인데, 싸우는데 몰두한 두 놈이 이쪽에 무관심했을 뿐이다.
"어서옵쇼."
가게에 다른 등신들은 없었다. 팔짱을 낀 주인장만이 주방에서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내가 1등이구만. 그보다 주인장, 밖에 시끄러운 소리 안 들려?"
"마침 너한테 물어 보려고 했어.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렇게 묻는 주인장의 양 손엔, 고기를 손질할 때나 쓰는 예리한 식칼이 쥐어져 있었다.
"몰라. 뭔 남매 하나가 아빠를 찾아서 여기까지 왔다는데, 가게엔 안 들어오고 문 앞에서 지들끼리 싸우고 있더라고."
주인장은 밖에서 들려오는 짜증나는 소음을 홀린 듯이 엿들으며 얼굴을 구기고 있을 뿐, 내 말 같은 건 듣고 있지도 않았다.
'#$#$%^#@#!!'
"아오! 들리지도 않고 시끄럽네 진짜!!"
콰직!
무슨 소린가 했더니, 가게의 문이 뚫리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들린 뒤로, 바깥에선 더 이상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제야 조용해졌네."
그렇게 말하며, 주인장은 손을 털었다.
아까까지 있었던 두개의 식칼이, 그 손에서 사라진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