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부모님의 은혜는 하늘과도 같아서 [2]
"스튜 한 그릇 더."
"그래~"
가게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구멍이 난 문에서 바람이라도 들어올까 기대를 해봤지만, 여름에 한해서 그럴 일은 결코 없었다.
"아~ 오늘도 덥네. 아저씨, 아무거나 시원한 걸로 한잔만 줘."
"예이~"
두 번째 손님은 용사였다. 문에 난 구멍쯤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열고 닫는 게 이 가게의 수준을 잘 보여준다.
"어? 처음 보는 사람이다."
외지인 두 놈을 발견한 용사가 멈춰 섰다. 말없이 앉아만 있는 두 놈은, 주인장이 던진 식칼을 기적적으로 피했고, 내가 그걸 주우러 가는 길에 열린 문으로 후다닥 달려 들어왔다.
"뭐야 뭐야, 어디서들 왔어?"
용사는 곧바로 취조를 시작했다. 이런 정신 나간 곳에 제 발로 찾아오는 인간들을 보면, 뭔갈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신기하긴 하다.
"동대륙."
"서대륙."
근데 두 놈 다 말하는 게 다르다. 남매 아니었냐 너희들. 아니, 오히려 남매라서 다른 대륙에서 살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같은 땅 위에선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족속들이니 말이다.
"무슨 일을 하다가 온 거야? 어, 고마워 아저씨."
저장고에서 갓 올라온 시원한 술이 용사의 손에 쥐어졌다.
가장 시원한 건 가게 위로 한 번도 올라온 적이 없는 그 폐기물들이겠지만, 그걸 주문하는 놈들은 없다. 주인장도 그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 처분 좀 하지, 언제까지 거기에 내버려둘 셈인지 모르겠다.
"음.. 굳이 말하자면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지..?"
누나놈이 동생놈에게 동의를 구했다. 간단하게 직업 이름을 말하면 되지, 불편하게도 사는 놈이다.
"어.. 그렇지. 한 번씩 조언도 해주고, 물도 주고, 돈도 주고.."
"죽은 사람 길안내도 해주지."
"어 맞아 맞아."
무슨 양로원이라도 운영하는 건가? 저 인성머리로 노인네들 비위를 맞춰 줄 거라곤 생각하기 어려운데. 아니면 자기 남매한테만 저러는 건가.
"오. 무슨 일인 진 몰라도 재밌겠다. 그래서 가게에는 어떻게 오게 된 거야? 너희도 소문 듣고 찾아온 거야?"
"아까부터 소문 소문 거리시는데, 대체 여기가 무슨 소문이 날 만한 가게라고 그러는 거에요?"
동생놈이 말했다. 내말이 그 말이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떠벌리고 다니는 건지, 내가 은퇴를 하는 날엔 어떻게든 그놈을 찾아서 족쳐버릴 것이다.
"어, 소문도 안 듣고 여길 찾아온 거야? 대단하다. 나는 여기에 굉장한 사람들이 많다고 들어서 왔었는데."
나도다 시발. 그리고 그중에 니 이름도 있었지, 망할 용사새끼.
"굉장? 뭐, 아버지가 굉장하긴 하지."
"저희는 아버지가 여기 계시다고 들어서, 어버이날을 맞아 찾아 온 거예요."
갑자기 아빠자랑을 하는 누나놈을 대신해서 동생놈이 요점을 잘 정리해서 말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서대륙은 오늘이 어버이날이라고 했었지? 나디아 녀석은 성 안에 박혀서 이상한 걸 만들고 있던데."
진짜로 이상한 거면 흰놈이 알아서 때려 부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버지, 만났으면 좋겠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닥 재미가 없는지 용사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질문을 그만두었다. 거기에 날씨 탓인가 늘 잡아오는 토끼도 없이 술만 홀짝이고 있다.
남매놈들은 조용히 앉아있었다. 술을 시키지도, 개밥을 시키지도 않고, 그저 의자에 앉은 상태로, 호흡을 하며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아빠라는 놈이 여기 단골이라니, 그놈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른 등신들도 하나 둘씩 가게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용사놈과 똑같은 질문을 두 놈에게 하곤 자리에 앉았다. 등신들은 생각하는 것도 같다.
"아빠 없냐?"
가게가 꽉 찼는데도 두 놈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찾는 놈이 아직 가게에 오지 않았나 보다.
마법사가 무슨 말을 씨불이는 거냐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물론 저 반응을 노리고 물어본 건 맞는데, 나머지 놈들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것 같다. 애초에 이해 할 거라고 기대도 안 했다.
"있어요."
동생놈이 대답했다.
"여기에?"
"네."
"근데 왜 여기 앉아 있냐?"
"지금은 너무 시끄러워서, 저희끼리만 남았을 때 인사드리려구요."
그래도 최소한의 예절은 지키는 놈들인가 보다. 아빠란 놈이 이집 단골이라는 것만으로도 내 안의 평가는 이미 박살이 나있었는데 말이다.
"그럼 뭐라도 좀 먹고 있어라. 등신같이 앉아만 있지 말고."
"등..신..?"
누나놈이 내 말을 되새기며 고개를 돌렸다. 원래 등신한테 등신이라고 해도 반응하지 않는데, 이놈은 자기가 등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여기 있는 등신들한테 다 시험 본 나니까 알 수 있다.
"너 그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라."
누나놈은 내 코앞까지 다가와, 찌를 듯이 노려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등신짓을 하고 있으면 또 등신이라고 하겠지 뭘. 내가 하지 말란다고 안 할 사람이면 여기에도 없었다.
"으에에, 오로넬 이 개새끼야아!"
옆에선 무언가 큰일이 났다는 전조가 일어났다.
"이 새낀 또 왜이래?"
"뭐가 왜이래야, 나 멀쩡하다고!"
마법사의 잔을 확인했다. 아무리 봐도 맥주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자주 맡아본 향과 색이다. 나는 그걸 들고 일어나, 홀을 향해 소리쳤다.
"야! 내가 이 새끼한테 럼주 갖다 주지 말라고 했지! 어떤 새끼가 갖고 왔어, 이거!!"
일단 일에 있어서는 실수하지 않는 제리스일 리는 없다. 남은 다섯 놈 중에 한 놈이겠지. 특히 저 쪼개고 다니는 놈. 작전은 어떻게 수행하고 다녔는지도 의문인, 저놈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근데 아무도 대답이 없다. 받아 마신 놈은 있는데 갖다 준 놈은 없는 모양이다.
"어휴, 일하는 꼬라지만 봐도 대장이 어떤 놈일지 눈에 훤하다. 안 그러냐, 젠?"
"..."
젠놈도 대답이 없다. 후달리면 입 닫고 가만히 서있는 게 마가리스 전통인가보지.
쿵!
의식은 날아가도 몸은 멀쩡한가 싶었더니, 마법사는 그대로 자리에 엎어졌다.
다시 조용해지면 저대로 두고 더 마실 생각이었는데, 시계를 보니 곧 자정이다. 어버이날이 끝난다는 뜻이지.
저놈들이 하루 종일 앉아있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키워준 은혜에 대한 감사를 전한다는데 이 정도 양보는 해 줄 수 있다.
"야, 꼬맹아. 슬슬 가자."
"응."
꼬맹이는 허겁지겁 잔반을 처리했다.
평소 같았으면 마법사놈은 버리고 갔을 텐데, 저놈들이 자기들만 남았을 때 움직이겠다 했으니, 일단은 치워줘야 할 것 같다.
한숨을 쉬며 마법사의 팔을 잡아끌자 바닥에 얼굴이 처박히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마법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야, 이놈들 아빠 만나야 된다니까, 니네도 적당히 마시고 꺼져라. 어버이날 끝나기 전에."
-네~!
무슨 바람이 분건지 이놈들도 순순히 동의했다. 이런 등신들도 부모의 은혜는 아는 모양이다.
“시발, 이게 뭐냐?”
짜증나는 일은 한 번에 찾아온다더니, 바깥엔 식사를 기다리고 있는 모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바람 같은 건 기대할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우욱."
아 제발.
"우웨에에에엑!"
"아, 시발!"
마법사가 입으로 싼 똥을 쌌다. 반사적으로 똥을 피하기 위해 마법사의 팔을 쳐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계속 끌고 다닐 걸, 괜히 맨땅이라고 부축을 해줬다.
"어."
한창 내리막을 내려가던 중에 힘 풀린 인간을 떨어뜨리자, 공을 굴린 것 마냥 미끄러져 내려갔다. 얼마 전에 깡통을 가져왔을 때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주인이나 피조물이나 한결같은 결말이다.
저걸 구하기엔 이미 틀렸다. 분수에 맞지 않는 술을 마신 대가라고 해두자.
"시오, 안 멈춰도 돼?"
꼬맹이가 물었다.
"못 멈춰 저건. 얼마나 더 빨라질지 구경이나 해라."
그런 발상은 하지도 못했다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꼬맹이는 마법사를 눈으로 쫓았다.
-우웨에에엑!
마법사만큼이나 빠르게, 어버이날의 밤은 그렇게 흘러갔다.
~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소란스러웠던 가게에는 이제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 오로넬의 말을 듣고, 손님들이 자리를 비워줬기 때문이다.
-어버이날은 인정이지.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녀석이 저 녀석들 아버지란 건가?
-에이, 남아서 볼 생각 하지 말고 빨리 나와.
-마스터! 내일 또 올게!
가게에는 세 명만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두 남매와 그들의 아비 되는 자는, 일절의 대화도 없이 묵묵히 서로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째깍.
시계가 자정이 되었음을 알려왔다. 침묵 속에서 어버이날이 끝을 맞이한 것이다.
"이제 갈까."
몇 시간 만에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별을 고하는 말이었다. 동생도, 맞은편에 있는 아버지도, 그것에 개의치 않는듯했다.
"그래, 누나랑 하루 종일 붙어 다니느라 너무 불편했어."
"나는 안 그런 줄 아니? 하여튼 옛날부터 그게 마음에 안 들었어. 항상 자기만 힘들어요."
"마음에만 안 들면 되지, 굳이 동생이 관리하는 땅에 쳐들어와서 피를 봐야 했어? 누나는 그게 문제야."
"미숙한 동생을 위해, 그 땅까지 관리해주려 한 누나의 마음을 모르다니, 아직 멀었구나 동생아."
"자기 땅에서 일어나는 전쟁도 못 막으면서 말은.."
남매는 아버지를 뒤로 한 채 티격태격하며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내년에는 술이라도 좀 마셔라. 싸우지도 말고 이놈들아."
마지막에서야, 아버지는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고 자식들에게 말을 전했다. 자식들은 뒤를 돌아 손을 흔드는 것으로 응답했다.
"또 보자. 블랙베리, 페어."
그날 밤, 불과 몇 분 동안이긴 했지만, 대낮과도 같이 밝은 빛이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갔고, 그 짧은 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 밤거리를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
헤라나 왕국. 왕궁 근처의 으리으리한 대저택들 사이에 끼어있는 소박한 주택 한 채. 그곳엔 한 노인만이 살고 있다.
"발프님! 편지 배달 왔어요!"
'항상 두는 곳에 두고 가!'
첩보계의 대명사, 외교의 신, 달라붙는 수식어만큼이나 그에게 날아오는 편지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대문 앞에는 편지함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지만, 그곳에도 도저히 수용할 수 없을 정도의 편지들을, 배달원을 시켜 집 안까지 가지고 오도록 지시했다. 배달원이 그런 것까지 해줘야 하나 싶겠지만 거액의 돈 앞에선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시발, 깼네."
오늘은 늦잠을 자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배달원의 목소리 때문에 잠기운이 날아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노인은 창문을 열어 맑은 공기를 마신 뒤,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었다. 개운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이것은, 몸에 배면 좋은 습관 중에 하나다.
"뭔 편지가 이렇게 많아."
현관에 놓인 편지를 보며 노인은 말했다. 최근에 받은 편지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많은 양이었다.
심심하면 날아오는 온갖 첩보기관의 초청장과 각종 행사들의 초대장, 이것은 봉투만 봐도 구별이 가기 때문에, 발견하는 즉시 난로에 던져 땔감으로 사용한다.
"은퇴한지가 언젠데 강의 좀 해달라고 지랄이야, 지랄은."
난로 앞에 앉아, 데운 우유를 마시며 편지를 확인하고 있는 노인이었다. 늙어서 그런지, 여름임에도 아침에는 항상 춥다.
"어? 이건 뭐야."
자신에게 날아오는 고급진 봉투들과는 다른, 흔히들 똥종이라고 부르는 싸구려 소재를 쓴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노인은 그것을 개봉해 내용을 확인했다.
「오로넬이다. 거긴 좀 따뜻하냐? 누구 덕분에 나는 존나 잘 지내고 있다.」
"하, 씹새끼가."
여기서 말하는 누구는, 분명 자신을 말하는 것이리라. 노인은 우습기만 한 양아들의 편지를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얼마나 잘 지내고 있냐면, 니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손녀딸까지 얻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뭐!? 손녀딸이라고!?"
노인의 결혼 계획은 수틀린 지 오랜지라, 양아들의 결혼을 적극 장려해왔다. 그도 그럴게, 이미 할아버지가 된 이 나이에 아빠라고 불리는 건 아무리 그래도 쪽팔린다. 차라리 할아버지가 낫지.
그 꿈을, 드디어, 속만 썩이던 양아들 놈이 해낸 모양이다. 거기다 사내새끼도 아닌 딸아이라고 한다. 노인은 가슴이 뛰는 걸 주체할 수 없었다.
「애 이름은 데이린이라고 하는데, 먹고 싸고 자기만 하는 돼지새끼야. 얼마 전에는..」
"그래, 얼마 전에 뭐!"
「질문 : 백수가 뭔지, 자기도 백수인지, 시트린, 용사, 죄다 백수. 단답형 둘.」
"뭐야 이게?"
노인은 자리 옆에 둔 안경을 꺼내,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았다. 그러나 몇 번을 확인해도 자신이 읽은 글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암호인가 싶어 온갖 것들을 다 대조해 봤지만, 일관성 있는 문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노인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일단은 뒤에 있는 내용도 마저 읽어보기로 했다.
「일 하기 싫으면 하지 마. 미친 놈. 편지 끝. 오로넬 씀. 」
이건 그거다. 확신이 왔다.
쓰다 만 편지다.
적혀있는 것들도 암호나, 은어가 아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서 필기를 해 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걸 발프에게 그대로 보낸 거다.
노인은 편지를 구겨 쥐었다.
"씨바아아알!! 손녀딸이 어쨌냐고오!!!"
그날, 발프는 타국의 귀빈을 맞이하는 중요한 자리에, 3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유례가 없을 정도로 화가 나있는 그의 얼굴에, 상대가 주눅이 들어 유리한 조건으로 조약을 나눈 건 뜻밖의 횡재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며칠 후, 오로넬은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새빨간 봉투에 든, 새빨간 편지를 받았다.
그것이 품고 있는 뜻은, 널 죽여 버리겠다는 의미였다.
오로넬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그것을 보관함에 넣었다.
"안부 편지는 잘 갔나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