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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화 〉없진 않을 것 같지만, 딱히 있지도 않을 것 같은 것. (54/108)



〈 54화 〉없진 않을 것 같지만, 딱히 있지도 않을 것 같은 것.

신. 종교에는 빠지지 않는 존재이자  신앙의 근원이 되는 존재.


복수의 신을 믿는 종교도 있는 반면, 하나의 신만을 믿는 종교도 있고, 자기 자신이 곧 신이라는 종교도 있다. 요컨대, 세상 천지에 신들은 널리고 널렸다는 거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두 신은, 아마도 동대륙의 페어와, 서대륙의 블랙베리일 것이다.


왜 신이라는 작자들 이름이 과일 이름과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종교쟁이들은 오히려 이것이 그들이 실존한다는 증거라며 우겨댄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이름이라며 말이다.


아무튼, 저 두 신이 유명한 이유는, 각각의 대륙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국가에서 섬기는 신들이기 때문이다.

동대륙과 서대륙간의  전쟁도, 사실 두 신들의 영향이라고 하는 놈들도 있으니, 참으로 도움이 안 되는 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고 보니, 마왕토벌대는 출정 전에 페어의 가호라는 웬 이상한 물을 처맞고 가는 게 관례다.

내  변기통에서도 퍼낼  있을 정도로 흔해 빠진 물처럼 보이는데 말이다.

그것이 정말 효과가 있는지는, 지금부터 알아볼 계획이다.


"그래서 넌 그 물  처맞았냐? 왕놈이 뿌리잖아. 출정 전에."

맨손으로 토끼고기를 으적으적 씹고 있는 용사에게 물었다. 오늘도 역시 포크와 나이프는 장식에 지나지 않았다.

"응? 무슨 물? 아~ 그거? 맞을 때 기분 진짜 더러웠지. 이상한 냄새도 나던데."


"무려 페어님의 가호인데 그렇게 말해도 되냐? 용사 후보생들은 전부 그렇게 교육받는 걸로 아는데."


"아,  후보생이 아니라 선발이었거든. 그래서 그런 건  몰라."


 대륙에서 오는 후보생들을 제외하고, 마을이나 도시에서 특출나게 뛰어난 자들을 추천 받아, 용사 결정전에 참가 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 그것이 선발이다.


이번 20대 용사 결정전에는 선발이 한 명 밖에 없다고 하더니, 그게 저 놈이었을 줄이야.

"어쩐지, 후보생 출신이라기엔 멍청하다했어."

"멍청하면 어때? 마왕만 죽이고 오면 되는데."

용사가 먹고 남은 뼈를 접시에 떨어뜨렸다. 저런 말도, 실제로 임무에 성공 했으니 할 수 있는 말이다.

"아니, 그럼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되잖아. 도움 안 되네 진짜."

이놈이 선발이라는 것은, 후보생들이 귀에 피가 나도록 들었을 페어라는 작자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찬양을 하나도 듣지 못했다는 말이다.

즉, 이 주제에 있어 이 녀석은 완벽하게 쓸모없다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길래 내가 도움이 안 된다는 거야? 난 용사라고!"

"니네 나라 신."

"니네 나라라니! 너도 왕국 출신이잖아."

"진정해 시트린. 이 녀석이 이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니잖아."


지켜보고 있던 마법사가 용사의 편을 들어줬다.

"근데, 나도 신은 별로 관심이 없긴 해."


용사는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지만.

"니가 쓸모없는 건 알겠으니까, 쓸모 있으려면 저기 흰놈이나 불러와봐. 저놈도 토벌대 출신이니까,  좀 알고 있을 수도 있잖아."

"으음..!"

용사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곤, 흰놈에게로 걸어갔다. 뭐 어쩌겠는가? 이렇게라도 도움이 돼야지.


근데 오라는 흰놈은 안 오고, 용사의 얼굴만 뾰루퉁해져서는, 터덜터덜 돌아오고 있었다.

"뭐야, 왜 너 혼자 와?"


"지크 아저씨도 관심 없대."

"하.. 내가 말했지? 이거 존나 재미없을 거라고. 신이 있든 없든, 뭔 상관이냐고. 어차피 세상은 좆같고 이놈들은 등신인데."


사실, 이건 마법사가 시작한 화제였다. 아무리 심심했다지만 거기에 대답한 게 실수였다. 애초에 물어 볼만한 놈이 용사와 마왕밖에 없다는 시점에서 이미 글러먹은 기획이었음을 알아챘어야 했다.

그리고 증명이 되지 않은 것을 인정할  없다며 아예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마법사와는 다르게, 나는 그냥 믿지 않는 것뿐이다. 신이란 놈이 있든 말든, 내 인생이랑 일절 상관없으니까.


"난 확실한 게 좋다고. 불을 붙였으면 밝게 불타올라야지, 희미하게 일렁이는 게 좋아? 그럴 바엔 차라리 꺼지는 게 낫지."


"그럼 얘네 둘 한테 물어 보라니까? 신이 만들었다잖아. 솔직히 신 말고 어떤 병신이 이런 걸 만들겠냐?"

나는 꼬맹이와 그 옆의 막대기를 가리켰다.

「이런 ㅂ..!」

"어 그래, 미안."

막대기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반격을 가했다. 사과를 했으니 반격이라 할 순 없겠지만, 말을 끊었으니 내가 이긴 거다.

"얘네도 아는 게 있어야 말이지. 꼬마는  할 것도 없고, 이 검 녀석은 아는 것도 없이 찬양만 해대잖아. 시간만 아깝다고."


"그럼 혼자서 계속 하던가. 이제 물어  놈도 없구만."

"아직 나디아가 남았잖아. 그래도 서대륙의 왕인데, 뭐라도 알지 않을까?"


"그놈은 아침에 뭐 먹었는지도 모를 걸."


"하하! 누가 이몸을 찾는가!"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멍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개똥은 약에 쓰려면 보이지 않지만, 호랑이는  말만 하면 언제든 나타난다. 필요한 건 죽도록 찾아도 안 보이는데, 보기 싫은 건 말만 해도 나타난다는 뜻이다.


"오, 나디아. 마침 잘 왔어. 빨리 앉아 봐."


마왕은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자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며, 신이 나게 달려왔다.


"그래, 이 몸을 찾다니, 무슨 일이지?"

"서대륙은 그러니까.. 블랙베리? 아무튼 그거 믿지?"

"그거라니! 어딜 블랙베리님께! 옛날이었다면 넌.."


마왕의 목청이 높아지자 흰놈이 고개를 돌렸다. 천적과 눈이 마주친 마왕은 다시 평소처럼 찌그러졌다.

"..말조심하고, 그래서 물어볼  뭔데?"


"그거 실존 하는 거야?"

"그거가 아니라 제대로 블랙베리님이라고 부르라고! 니가 밟고 있는 땅은 블랙베리님이 내려다보시는 땅이란 걸 잊지 말란 말이다."


종교를 종교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몰입을 하게 되면, 이렇게 예민해 진다. 마치 신이 제 부모라도 되는 양, 과민반응을 한다.


"그 놈이  낳아줬냐, 먹여줬냐? 사소한 걸로 지랄 좀 하지마라."

개인적으로 나도 혐오하는 행위기에 일침을 가했다.


"블랙베리님은 2천 년 전에  만드셨고, 왕이 될 수 있도록 키워주셨다."


근데 진짜 부모였다. 나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오오, 그럼 신이라는 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기억나? 기억나지? 이 녀석처럼 아무것도 모른다고는 하지 말아줘. 기대하고 있으니까."

"기억날 리가 없잖아. 2천 년도 전이라고."


"그래, 임마. 너도 천 살이나 처먹었으면서,  년 전에 있었던 일이 기억 나냐?"


어쩌다보니 마왕의 편을 들게 됐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마왕을 도운  아니라 마법사를 때린 거다. 자기도 할 수 없는 일을 남한테 강요하는 건 처맞아야 마땅한 일이다.


"아아 그럼 어떡하란 거야! 믿는 새끼들은 많은데, 왜  새끼들은 한 놈도 없는 거냐고!"


마법사가 생떼를 부렸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들을 항상 마지막에 저런 말을 하곤 한다. 마치 자기가 이상한 거냐고 세상에 물어 보듯이.

그걸 이제야 알았나.

"걱정하지마라 시오. 내가 비록 그분의 존안은 기억하지 못 하지만, 그분의 힘을 보여줌으로써, 그 존재를 너에게 확인 시켜 주마."

마왕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마법사에게 말했다. 마법사는 이제 와서 뭔 개소리를 하는 거냔 눈으로 쳐다보았다.


"보고 싶은 자들은 따라 오거라. 내가 블랙베리님의 자식임을 증명 할 테니."


자리에서 일어선 마왕은, 가게의 등신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자신이 벌일 일을 큰 소리로 선포한 뒤, 유유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마법사는   것도 없이 따라 나갔고, 뭔 일만 났다하면 구경하기 바쁜 다른 등신들도 빠지지 않고 따라 나갔다.

나와 꼬맹이는 나가지 않았다. 꼬맹이는 먹을  남아있다는 것이 이유였고, 나는 관심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비슷한 이유인지, 흰놈도 자리에 남아 있었다.

'자! 톡톡히들 봐라!"


밖에선 기어이 무슨 일이 일어나려 하는 듯하다.

하필이면 그때, 내 아랫도리에서도 무슨 일이 일어나려 했다.


"아, 쉬바. 하필 지금 오줌이 마렵냐."

지금 오줌을 싸겠다고 나가면, 뒤늦게 구경하러 나온 거냐고 마왕 놈이 으스댈게 뻔하다.

그 놈 좋은 일 해줄 바에야 조금 참고 말지.

'#@#^@^^#^!!'

근데 웬 잡소리만 계속 들려오고, 등신들이 돌아올 기미가 안 보인다. 구라인 게 걸려서 처맞기라도 하고 있는 건가?

어찌됐든, 내 물통이 먼저 한계가 온 것 같다. 이 쯤 됐으면 내가 구경하러 나온 게 아니란  알겠지.


밖에 나가서 확인해 보니, 마왕놈이 처맞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모여 있는 등신들의 앞에 서서 아직까지 알아듣지도 못 할 개소리를 하고 있었을 뿐, 대체 뭘 보여주려고 저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놈들을 등진 채 가게 모퉁이를 돌아, 구석진 곳에서 물통을 비워냈다.


술도 마시고, 참기까지 해서 그런지, 힘 찬 물줄기가 수십 초 동안 이어졌다. 해가 저물고 있지만 않았다면 무지개도 보일 정도였다.

'..당신의 아들 나디아가 청하옵건대, 당신의 힘으로 비를 내리시어, 불신자들의 눈을 뜨게 하소서!!'

메아리가 울릴 정도의 외침을 마지막으로 개소리가 멎은 걸 보니, 일련의 의식이 끝난 모양이다.

고함 한 번 지른다고 비가 내렸으면, 농부들은 그 고생 안 한다. 개나 소나 밭에서 고함이나 지르고 있었겠지.


뚝. 뚝. 뚝.


어?


그런데 이놈의 기우제가 성공해버리고 만 것인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닭똥만한 물방울들이 기분 나쁘게 머리를 두드렸다.

"와하하하하!! 봤느냐,  불신자들아! 블랙베리님을 찬양하라!!"


바로 뒤에서는, 가게 제일의 등신이, 물방울만큼이나 기분 나쁜 목소리로, 다른 등신들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시이발, 멈춰어어!!"

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이 재앙을 멈추기 위해, 등신들의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

한편, 그 시각 가게에서는, 바깥에서 일어나는  보다,  배는 더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수개월 간, 이곳을 왕래하며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엔드홀이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적어도 아직 까지는.

「거룩한 자여, 당신께서 이곳에 와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엔드홀은 그저 자아가 있는 검에 불과했기에, 누구를 바라보고, 누구에게 이야기 하는지,  도리가 없었다. 어쩌면 드디어 미쳐버렸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당신께서 맡기신 원대한 사명을 완수하지 못해,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천한 자의 목숨을 거두어 가소서.」

"아까부터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 거냐, 너."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있는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엔드홀이 말을 전하고 있는 대상은 그 남자가 아니었다.


"아니, 이젠 그럴 필요 없어. 너도 봤잖아. 데이린이 끼고 있던 목걸이. 그건 분명 페어의 짓이야."

몇 천  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고결하고, 부드러웠다.

"그 목걸이는 너와 데이린이 결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지, 아마?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녀석들도 결국 내가 만든 세상이 마음에 들긴  모양이야."

「하, 하지만..」


"그러니까 너도, 이제부턴 데이린처럼 자유롭게 살도록 해. 이제 와서 부숴버리기엔, 나도 이곳에 정이 많이 들었거든."


남자는 웃고 있었다. 검 주제에 목숨을 내놓겠다는 엔드홀이 같잖은 것도, 이 상황이 웃긴 것도 아니다.

그저,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기에, 그는 웃고 있었다.

"으아아악! 비다! 비가 존나게 온다!"

바깥에 있던 손님들이 불이라도 난 듯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야, 꼬맹아. 그만 처먹고 빨리 가자. 이 새끼, 내리게는 할 수 있는데 멈추지는 못하겠데. 우산도 없는데 땅이 더 미끄러워지기 전에 출발해야 된다고."

가장 선두에 서서 욕을 뱉으며 들어온 남자가, 데이린의 손을 잡아끌었다. 데이린은 남은 한 손으로 그릇을 들어, 건더기들을 마저 비웠다.


"야! 막대기! 가만히 서있지 말고 빨리 오라고! 뒤진다?!"


데이린에 의해 끌려가며, 엔드홀은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손을 흔들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다.


한 톨의 미련도 묻어나지 않는, 몇 천 년 전에도 봤었던,  미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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