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없진 않을 것 같지만, 딱히 있지도 않을 것 같은 것.
신. 종교에는 빠지지 않는 존재이자 그 신앙의 근원이 되는 존재.
복수의 신을 믿는 종교도 있는 반면, 하나의 신만을 믿는 종교도 있고, 자기 자신이 곧 신이라는 종교도 있다. 요컨대, 세상 천지에 신들은 널리고 널렸다는 거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두 신은, 아마도 동대륙의 페어와, 서대륙의 블랙베리일 것이다.
왜 신이라는 작자들 이름이 과일 이름과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종교쟁이들은 오히려 이것이 그들이 실존한다는 증거라며 우겨댄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이름이라며 말이다.
아무튼, 저 두 신이 유명한 이유는, 각각의 대륙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국가에서 섬기는 신들이기 때문이다.
동대륙과 서대륙간의 긴 전쟁도, 사실 두 신들의 영향이라고 하는 놈들도 있으니, 참으로 도움이 안 되는 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고 보니, 마왕토벌대는 출정 전에 페어의 가호라는 웬 이상한 물을 처맞고 가는 게 관례다.
내 방 변기통에서도 퍼낼 수 있을 정도로 흔해 빠진 물처럼 보이는데 말이다.
그것이 정말 효과가 있는지는, 지금부터 알아볼 계획이다.
"그래서 넌 그 물 안 처맞았냐? 왕놈이 뿌리잖아. 출정 전에."
맨손으로 토끼고기를 으적으적 씹고 있는 용사에게 물었다. 오늘도 역시 포크와 나이프는 장식에 지나지 않았다.
"응? 무슨 물? 아~ 그거? 맞을 때 기분 진짜 더러웠지. 이상한 냄새도 나던데."
"무려 페어님의 가호인데 그렇게 말해도 되냐? 용사 후보생들은 전부 그렇게 교육받는 걸로 아는데."
"아, 난 후보생이 아니라 선발이었거든. 그래서 그런 건 잘 몰라."
온 대륙에서 오는 후보생들을 제외하고, 마을이나 도시에서 특출나게 뛰어난 자들을 추천 받아, 용사 결정전에 참가 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 그것이 선발이다.
이번 20대 용사 결정전에는 선발이 한 명 밖에 없다고 하더니, 그게 저 놈이었을 줄이야.
"어쩐지, 후보생 출신이라기엔 멍청하다했어."
"멍청하면 어때? 마왕만 죽이고 오면 되는데."
용사가 먹고 남은 뼈를 접시에 떨어뜨렸다. 저런 말도, 실제로 임무에 성공 했으니 할 수 있는 말이다.
"아니, 그럼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되잖아. 도움 안 되네 진짜."
이놈이 선발이라는 것은, 후보생들이 귀에 피가 나도록 들었을 페어라는 작자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찬양을 하나도 듣지 못했다는 말이다.
즉, 이 주제에 있어 이 녀석은 완벽하게 쓸모없다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길래 내가 도움이 안 된다는 거야? 난 용사라고!"
"니네 나라 신."
"니네 나라라니! 너도 왕국 출신이잖아."
"진정해 시트린. 이 녀석이 이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니잖아."
지켜보고 있던 마법사가 용사의 편을 들어줬다.
"근데, 나도 신은 별로 관심이 없긴 해."
용사는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지만.
"니가 쓸모없는 건 알겠으니까, 쓸모 있으려면 저기 흰놈이나 불러와봐. 저놈도 토벌대 출신이니까, 뭘 좀 알고 있을 수도 있잖아."
"으음..!"
용사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곤, 흰놈에게로 걸어갔다. 뭐 어쩌겠는가? 이렇게라도 도움이 돼야지.
근데 오라는 흰놈은 안 오고, 용사의 얼굴만 뾰루퉁해져서는, 터덜터덜 돌아오고 있었다.
"뭐야, 왜 너 혼자 와?"
"지크 아저씨도 관심 없대."
"하.. 내가 말했지? 이거 존나 재미없을 거라고. 신이 있든 없든, 뭔 상관이냐고. 어차피 세상은 좆같고 이놈들은 등신인데."
사실, 이건 마법사가 시작한 화제였다. 아무리 심심했다지만 거기에 대답한 게 실수였다. 애초에 물어 볼만한 놈이 용사와 마왕밖에 없다는 시점에서 이미 글러먹은 기획이었음을 알아챘어야 했다.
그리고 증명이 되지 않은 것을 인정할 수 없다며 아예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마법사와는 다르게, 나는 그냥 믿지 않는 것뿐이다. 신이란 놈이 있든 말든, 내 인생이랑 일절 상관없으니까.
"난 확실한 게 좋다고. 불을 붙였으면 밝게 불타올라야지, 희미하게 일렁이는 게 좋아? 그럴 바엔 차라리 꺼지는 게 낫지."
"그럼 얘네 둘 한테 물어 보라니까? 신이 만들었다잖아. 솔직히 신 말고 어떤 병신이 이런 걸 만들겠냐?"
나는 꼬맹이와 그 옆의 막대기를 가리켰다.
「이런 ㅂ..!」
"어 그래, 미안."
막대기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반격을 가했다. 사과를 했으니 반격이라 할 순 없겠지만, 말을 끊었으니 내가 이긴 거다.
"얘네도 아는 게 있어야 말이지. 꼬마는 말 할 것도 없고, 이 검 녀석은 아는 것도 없이 찬양만 해대잖아. 시간만 아깝다고."
"그럼 혼자서 계속 하던가. 이제 물어 볼 놈도 없구만."
"아직 나디아가 남았잖아. 그래도 서대륙의 왕인데, 뭐라도 알지 않을까?"
"그놈은 아침에 뭐 먹었는지도 모를 걸."
"하하! 누가 이몸을 찾는가!"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멍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개똥은 약에 쓰려면 보이지 않지만, 호랑이는 제 말만 하면 언제든 나타난다. 필요한 건 죽도록 찾아도 안 보이는데, 보기 싫은 건 말만 해도 나타난다는 뜻이다.
"오, 나디아. 마침 잘 왔어. 빨리 앉아 봐."
마왕은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자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며, 신이 나게 달려왔다.
"그래, 이 몸을 찾다니, 무슨 일이지?"
"서대륙은 그러니까.. 블랙베리? 아무튼 그거 믿지?"
"그거라니! 어딜 블랙베리님께! 옛날이었다면 넌.."
마왕의 목청이 높아지자 흰놈이 고개를 돌렸다. 천적과 눈이 마주친 마왕은 다시 평소처럼 찌그러졌다.
"..말조심하고, 그래서 물어볼 게 뭔데?"
"그거 실존 하는 거야?"
"그거가 아니라 제대로 블랙베리님이라고 부르라고! 니가 밟고 있는 땅은 블랙베리님이 내려다보시는 땅이란 걸 잊지 말란 말이다."
종교를 종교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몰입을 하게 되면, 이렇게 예민해 진다. 마치 신이 제 부모라도 되는 양, 과민반응을 한다.
"그 놈이 널 낳아줬냐, 먹여줬냐? 사소한 걸로 지랄 좀 하지마라."
개인적으로 나도 혐오하는 행위기에 일침을 가했다.
"블랙베리님은 2천 년 전에 날 만드셨고, 왕이 될 수 있도록 키워주셨다."
근데 진짜 부모였다. 나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오오, 그럼 신이라는 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기억나? 기억나지? 이 녀석처럼 아무것도 모른다고는 하지 말아줘. 기대하고 있으니까."
"기억날 리가 없잖아. 2천 년도 전이라고."
"그래, 임마. 너도 천 살이나 처먹었으면서, 천 년 전에 있었던 일이 기억 나냐?"
어쩌다보니 마왕의 편을 들게 됐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마왕을 도운 게 아니라 마법사를 때린 거다. 자기도 할 수 없는 일을 남한테 강요하는 건 처맞아야 마땅한 일이다.
"아아 그럼 어떡하란 거야! 믿는 새끼들은 많은데, 왜 본 새끼들은 한 놈도 없는 거냐고!"
마법사가 생떼를 부렸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들을 항상 마지막에 저런 말을 하곤 한다. 마치 자기가 이상한 거냐고 세상에 물어 보듯이.
그걸 이제야 알았나.
"걱정하지마라 시오. 내가 비록 그분의 존안은 기억하지 못 하지만, 그분의 힘을 보여줌으로써, 그 존재를 너에게 확인 시켜 주마."
마왕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마법사에게 말했다. 마법사는 이제 와서 뭔 개소리를 하는 거냔 눈으로 쳐다보았다.
"보고 싶은 자들은 따라 오거라. 내가 블랙베리님의 자식임을 증명 할 테니."
자리에서 일어선 마왕은, 가게의 등신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자신이 벌일 일을 큰 소리로 선포한 뒤, 유유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마법사는 말 할 것도 없이 따라 나갔고, 뭔 일만 났다하면 구경하기 바쁜 다른 등신들도 빠지지 않고 따라 나갔다.
나와 꼬맹이는 나가지 않았다. 꼬맹이는 먹을 게 남아있다는 것이 이유였고, 나는 관심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비슷한 이유인지, 흰놈도 자리에 남아 있었다.
'자! 톡톡히들 봐라!"
밖에선 기어이 무슨 일이 일어나려 하는 듯하다.
하필이면 그때, 내 아랫도리에서도 무슨 일이 일어나려 했다.
"아, 쉬바. 하필 지금 오줌이 마렵냐."
지금 오줌을 싸겠다고 나가면, 뒤늦게 구경하러 나온 거냐고 마왕 놈이 으스댈게 뻔하다.
그 놈 좋은 일 해줄 바에야 조금 참고 말지.
'#@#^@^^#^!!'
근데 웬 잡소리만 계속 들려오고, 등신들이 돌아올 기미가 안 보인다. 구라인 게 걸려서 처맞기라도 하고 있는 건가?
어찌됐든, 내 물통이 먼저 한계가 온 것 같다. 이 쯤 됐으면 내가 구경하러 나온 게 아니란 건 알겠지.
밖에 나가서 확인해 보니, 마왕놈이 처맞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모여 있는 등신들의 앞에 서서 아직까지 알아듣지도 못 할 개소리를 하고 있었을 뿐, 대체 뭘 보여주려고 저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놈들을 등진 채 가게 모퉁이를 돌아, 구석진 곳에서 물통을 비워냈다.
술도 마시고, 참기까지 해서 그런지, 힘 찬 물줄기가 수십 초 동안 이어졌다. 해가 저물고 있지만 않았다면 무지개도 보일 정도였다.
'..당신의 아들 나디아가 청하옵건대, 당신의 힘으로 비를 내리시어, 불신자들의 눈을 뜨게 하소서!!'
메아리가 울릴 정도의 외침을 마지막으로 개소리가 멎은 걸 보니, 일련의 의식이 끝난 모양이다.
고함 한 번 지른다고 비가 내렸으면, 농부들은 그 고생 안 한다. 개나 소나 밭에서 고함이나 지르고 있었겠지.
뚝. 뚝. 뚝.
어?
그런데 이놈의 기우제가 성공해버리고 만 것인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닭똥만한 물방울들이 기분 나쁘게 머리를 두드렸다.
"와하하하하!! 봤느냐, 이 불신자들아! 블랙베리님을 찬양하라!!"
바로 뒤에서는, 가게 제일의 등신이, 물방울만큼이나 기분 나쁜 목소리로, 다른 등신들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시이발, 멈춰어어!!"
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이 재앙을 멈추기 위해, 등신들의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
한편, 그 시각 가게에서는,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 보다, 몇 배는 더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수개월 간, 이곳을 왕래하며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엔드홀이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적어도 아직 까지는.
「거룩한 자여, 당신께서 이곳에 와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엔드홀은 그저 자아가 있는 검에 불과했기에, 누구를 바라보고, 누구에게 이야기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어쩌면 드디어 미쳐버렸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당신께서 맡기신 원대한 사명을 완수하지 못해,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미천한 자의 목숨을 거두어 가소서.」
"아까부터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 거냐, 너."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있는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엔드홀이 말을 전하고 있는 대상은 그 남자가 아니었다.
"아니, 이젠 그럴 필요 없어. 너도 봤잖아. 데이린이 끼고 있던 목걸이. 그건 분명 페어의 짓이야."
몇 천 년 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고결하고, 부드러웠다.
"그 목걸이는 너와 데이린이 결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지, 아마?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녀석들도 결국 내가 만든 세상이 마음에 들긴 한 모양이야."
「하, 하지만..」
"그러니까 너도, 이제부턴 데이린처럼 자유롭게 살도록 해. 이제 와서 부숴버리기엔, 나도 이곳에 정이 많이 들었거든."
남자는 웃고 있었다. 검 주제에 목숨을 내놓겠다는 엔드홀이 같잖은 것도, 이 상황이 웃긴 것도 아니다.
그저,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기에, 그는 웃고 있었다.
"으아아악! 비다! 비가 존나게 온다!"
바깥에 있던 손님들이 불이라도 난 듯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야, 꼬맹아. 그만 처먹고 빨리 가자. 이 새끼, 내리게는 할 수 있는데 멈추지는 못하겠데. 우산도 없는데 땅이 더 미끄러워지기 전에 출발해야 된다고."
가장 선두에 서서 욕을 뱉으며 들어온 남자가, 데이린의 손을 잡아끌었다. 데이린은 남은 한 손으로 그릇을 들어, 건더기들을 마저 비웠다.
"야! 막대기! 가만히 서있지 말고 빨리 오라고! 뒤진다?!"
데이린에 의해 끌려가며, 엔드홀은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손을 흔들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다.
한 톨의 미련도 묻어나지 않는, 몇 천 년 전에도 봤었던, 그 미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