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죄다 쓰레기일 뿐이다 [1]
"아, 우산 들고 가기 존나 귀찮네."
"내가 들게."
꼬맹이가 손을 내밀었다.
"그래 니가 들어라. 부수진 말고."
"응."
이제 여름도 깊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1년 중에 가장 싫어하는 기간인 장마철이 찾아왔다는 거다.
이 시기에는 비가 오든 안 오든, 일단 우산은 필수다. 하품 한 번 하는 동안에도, 머리에 수십 발이나 되는 빗방울이 꽂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작년, 그러니까 왕궁에서 일할 때만해도, 장마철에는 별의 별 핑계를 대면서 출근을 거부하곤 했는데, 그땐 나가자며 옆에서 빼액 거리는 꼬맹이는 없었다.
"저 구름 좀 봐라 꼬맹아. 생긴 것만 봐도 좆같지 않냐?"
여관 밖으로 나오자마자, 물을 가득 머금고 있는 구름들이 마을 위에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늦든 빠르든, 오늘 비가 오는 건 이걸로 확실해졌다. 언제 오든 상관은 없으니, 집에 갈 때만 멀쩡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별로."
"내가 너한테 뭘 바라겠냐."
날씨에 둔감한 정도가 아니라 느끼지 못하는 수준인 꼬맹이가 이 기분을 알 리가 없다. 비라는 것이 얼마나 좆같은 현상인지를.
내리기 전엔 습기 때문에 찝찝하지, 내리는 중에는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도 시끄럽지, 맞으면 기분도 더럽지, 냄새도 나지.
정말로 저 하늘 위에 누군가가 살고 있다면, 비는 아마 그놈들이 싸는 오줌이 아닐까 싶다. 비를 처맞는 내 기분이 딱 그렇다.
"으, 땅이 물 처먹어서 질퍽한 거 좀 봐라. 똥 밟는 것 같은데 이래도 기분이 안 더럽냐?"
"응."
"아오, 그냥 스튜 먹고 싶을 뿐이면서 이 악물고 아니라고 하네, 이 새끼가."
"맞아."
간단하게 인정하니까 더 화가 난다.
끼이익
"어서 옵쇼."
"뭐야, 왜 이렇게 많아?"
가게 안에는 벌써 대부분의 등신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여튼 할 짓도 없는 놈들이다. 장마철에는 집에나 좀 있을 것이지, 괜히 자리를 차지하고 더운 공기를 뱉어내고 있다.
"올라올 때 비 맞는 것 보다, 내려갈 때 비 맞는 게 낫잖아."
마부가 말했다. 일전의 일 때문인지, 일 하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가게에 오는 시간을 점점 서두르고 있다. 역시 인간을 바꾸는 건, 몇 천 마디의 말도, 입이 벌어질 정도의 돈도 아니다. 필요한 건 단 한 번의 좆같은 일, 그거면 된다.
"제일 나은 건 안 처맞는 거 아니냐? 맞는 걸 전제로 하면 안 나을게 뭐가 있냐?"
"술을 포기할 순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비 앞에선 좀 망설여지는데."
마침 제리스가 술을 가지고 왔다.
이놈은 요즘도 망원경으로 꼬맹이를 관찰하고 있는 걸까? 비가 와서 땅도 개판일 텐데, 거기에 엎드려서 그러고 있는 걸까? 대체 왜 그렇게 사는 걸까?
"저.. 오로넬씨? 제가 뭘 했다고 그렇게 쳐다보시는.."
"어, 아무것도 아니야. 찝찝해서 그래."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말 해봐야 내 입만 아프지.
쿠르르릉
하늘이 방귀를 뀌었다. 저 소리가 들렸다는 건, 곧 비가 오지게 온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가게에서 밤을 새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르겠다.
"야, 너 이상한 거 잘 만들잖아. 비 안 오게 하는 물건은 없냐? 나한테만 안 와도 상관없는데."
마법사가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내가 무슨 신이냐? 그런 것까지 뚝딱 만들어내게?"
"병신이잖아."
"너 이 ㅆ.. 맞는다?"
"뭐야 근데? 이제 신 믿냐? 그놈이 전지전능한 존재란 걸 인정해?"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직은 보류라고. 전에 나디아 녀석이 보여준 것도 영 미심쩍어."
마법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면 나름 믿을만한 근거 아니었나? 신이라는 놈이 직접 내려와서 '나 신이다.' 라고 해도 안 믿을 거면서.
"아 그래! 그놈이 있었지. 야! 마왕 어디 있냐? 마왕 거수!"
등신들 사이에서 주먹을 쥔 팔이 높게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왕이라는 놈이 외지인 말을 잘도 듣는다.
마왕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놈은 한창 마시고 있던 자리를 뒤로하고, 재빠르게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뒤에는 용사도 같이 딸려왔다.
"왜? 무슨 일이야? 어떤 급한 용무가 있어서 날 불렀지?"
그렇게 말하는 마왕의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분명 잘 놀고 있던 자리에서 빼내온 건데, 이상한 일이다.
-야! 나디아! 시트린! 벌주는 마시고 가야지!!
괜히 달려온 게 아니었다. 설마 하는데 이 새끼들, 나한테 뒤집어씌우려는 건 아니겠지.
"오로넬이 부르는데 당연히 달려가야지! 너희 오로넬 눈 밖에 나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마왕이 소리쳤다.
"어떻게 되는데?"
내가 물었다.
"아이, 좀. 조용히 해봐."
-그,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다음번엔 마셔라!
대체 뭔 개소문을 퍼트려 놓은 거냐. 저 등신들이 벌칙을 물리다니.
"휴, 이제 쟤네랑은 같이 못 마시겠다."
"그러게 말이야."
마왕과 용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잠시 뒤, 아까 그 테이블에서 등신 한 놈이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먹이려던 게 벌주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보다 진짜 무슨 일이야?"
"그보다는 무슨, 저놈들이 왜 내 이름만 듣고 겁먹는지부터 설명 하시지."
"아.. 그, 그건.."
마왕이 눈알을 좌우로 굴려댔다.
"시오가 잡힐 뻔한 게 오로넬 때문이라고 나디아가 그랬대요!"
용사가 대신 대답해줬다. 역시 친구란 놈들은 중요할 때 아무 도움도 안 된다. 별것도 아니구만, 마왕놈은 이게 뭐라고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휴.. 그런 것 보다, 너 지금 그때 했던 기우제 또 할 수 있냐?"
"뭐, 뭐.. 할 수 있기는 한데, 맑은 날은 못 만드는데..?"
이놈도 내가 비를 싫어하는 건 알고 있다. 그때 비를 내리게 했을 때, 멈추라고 수십 대는 맞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상관없어 비만 아니면. 여름인데 눈도 되냐? 눈이 차라리 낫겠는데."
"눈이 비야, 이 바보야."
듣고 있던 마법사가 면전에서 혀를 차며 말했다. 누가 그걸 모르나. 그냥 희망 사항이지.
"무슨 소리야. 어떻게 눈이 비야?"
"맞아. 눈은 눈이고 비는 비지."
아이고 이 병신들.
두 등신한테 설명을 시작하려는 마법사의 어깨를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입만 아플 테니 그만두라는 뜻이다. 마법사는 두 놈을 힐끔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아무튼. 되냐고 눈."
"암, 당연히 되고말고. 블랙베리님의 권능을 얕보지 마."
다시 기세가 등등해진 마왕이었다. 내가 얕보는 건 너 밖에 없다.
"그럼 눈 좀 내리게 해 봐."
"어? 지금?"
"그래, 당장."
눈이 내리려면 날이 추워져야하니, 더위도 어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맞으면 기분이 더러운 비와는 달리, 눈은 쌓여야 기분이 더러우니, 쌓이기 전까지만 산을 내려가면 문제없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으니, 한시라도 빨리 눈으로 바꾸는 게 좋겠지.
쿠르릉!!
"바, 밖에 천둥 치는 것 같은데..? 번개도 떨어질 텐데..?"
"번개 같은 거, 살면서 한 번도 맞기 힘들어. 재수 없게 맞는다 해도, 넌 살아나잖아."
"그, 그렇긴 한데.. 아픈 건 느껴지는데.."
마왕이 손가락을 이리저리 꼬아대며 눈치를 봤다. 나는 한껏 좁아진 그놈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을 이었다.
"야, 하늘이 저렇게 넓은데, 너한테 딱 맞게 번개가 떨어지겠냐? 블랙베리님이 널 지켜주고 계신다며? 안 맞아, 안 맞아."
마법의 단어인 블랙베리를 꺼냈음에도 마왕은 주저하고 있었다. 설마 하니 이놈, 번개에 맞은 적이 있는 건가?
"근데 번개는 보통 높은 곳에 떨어질 텐데."
마법사가 그새를 못 참고 생각 주머니를 열어버렸다. 하여튼 아는 게 많으면 저게 문제다. 자기가 알고 있는 걸 못 말해서 안달이지.
다행히 이놈들이 멍청한 머리로는, 높은 곳이라는 게 어디를 말하는 것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그틈에 마법사의 입을 막고 덧붙였다.
"그래, 이 근처에서 높은 곳이라 하면 마왕성 밖에 없잖냐. 떨어져도 거기에 떨어지겠지. 설령 여기에 떨어져도, 너보다 큰 나무들이 맞아준다니까."
나무에 번개가 떨어지면, 그 근처에도 피해가 가서 죽을 수도 있다.
"그, 그렇겠지? 안전하겠지?"
"그래. 그리고 이건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놈들을 위해서기도 하다고. 술 마시고 집에 가는 길이 비 때문에 미끄러우면 누가 다칠 수도 있잖냐. 왕으로써 뭔갈 보여줘야지."
"맞아. 난 왕이야. 난 왕이라고!"
마왕의 용기가 가득 찼다.
"그런데. 왕인 내가 왜 너희의 말을 들어야 하지?"
너무 가득 찬 것 같다. 물리적 치료를 통해 용기를 약간 덜어줬다.
"가, 갔다 올게, 갔다 올게!"
자, 다시 내가 아는 마왕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근데.. 혼자.. 가야 돼..?"
"가고 싶은 놈 있으면 데리고 가던가."
"시트린, 같이 갈래..?"
"아니."
그것은 확고하고 완고한, 더이 상 붙들 기미도 주지 않는 거절이었다. 같은 등신이지만 용사가 마왕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게 이런 것이다.
확실하게 알아먹은 건 아니지만, 아까 마법사의 말을 듣고, 지금 밖이 위험하다는 것을, 이놈은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다.
"그, 그럼 혼자 다녀올게.."
홀로 떠나는 마왕을 향해, 나와 용사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마왕은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곤, 문밖으로 나가 하늘 아래 발을 딛고 섰다.
'#$%[email protected]#%@%$!!'
그러고는 또 요상한 소음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나가면 어떻게 되는 거야, 시오?
용사는 마왕이 나가자마자, 어떻게 참았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마법사에게 물었다.
"번개 처맞지."
마법사는 덤덤하게 대답해줬다. 용사가 뚱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알고서 보냈냐는 뜻인 것 같다.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무조건 처맞지는 않는다고. 그럼 산에 사는 사람들은 다 뒤졌게?"
"으음.."
그래도 용사는 쳐다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야, 그리고 번개 맞는다고 다 죽는 것도 아니야. 몬드 할배한테 물어보라고. 그치 할배?"
"음? 날 불렀는가?"
할배의 입에서는 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삼계탕만 주구장창 먹어대고 있는 할배인데, 이 꿉꿉한 날에도 진심으로 땀을 흘리고 싶은 건지 의문이 든다.
"할배 번개 맞은 적 있다며? 이놈한테 좀 말해줘. 맞아도 안 죽는다고."
"아, 그거 말인가? 내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이었지. 땅에 꽂아뒀던 검이 아니었다면 죽었을 거라더군. 하하!"
"거봐라, 괜찮대도. 그렇게 걱정되면 같이 나가던가."
"아니야, 여기 있을래. 그냥 궁금했던 것뿐이야."
용사가 얼굴을 펴고 잔을 들었다. 평소에 하도 멍청한 짓을 해대니 연기인지 진심인지 알 수가 없다.
"야, 근데 밖에 갑자기 조용한데?"
"내가 말했지? 번개 처맞는다고."
마법사는 아까부터 번개를 맞는다는 소리밖에 안 한다. 한 번만 더 저 소릴 씨불이면 원하는 대로 때려줘야겠다.
"근데 천둥소리는 안 들렸어."
이제 용사의 목소리에서도 관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모르는 일' 의 범주에 들어간 것이다.
"가서 보면 알겠지. 내가 갔다 온다."
물론, 문 밖으로 나가지는 않을 거지만.
문을 열고 주변을 둘러 볼 것도 없이, 바로 눈앞에 마왕이 서 있었다. 탄 것 같지도 않고, 몸도 계속 꿈틀대고 있는 걸 보니, 번개를 맞은 건 아니다.
그저 그 요상한 주문을 외우지 않고 있을 뿐인데, 꿈틀대는 자세가 좀 묘하다.
"야! 저 새끼 똥 싼다!"
마치 똥을 싸는 듯한 그 자세는, 등신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아니나 다를까, 1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등신들이 내 뒤로 모여들었다. 역시 지능이 낮을수록 똥 얘기에는 껌뻑 죽는다.
"아! 뭐하고 있어! 보지 마!"
시선을 느낀 마왕이 뒤를 돌아봤고, 눈이 마주친 등신들에게 고함을 지르며 얼굴을 붉혔다. 그 와중에도 자세를 바꾸지 않는 걸 보니, 의식에 꼭 필요한 자세인 모양이다.
-에에, 나디아 똥 싼대요!
-으윽, 냄새!
이놈들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겠지만.
또독. 또독.
"응? 뭔 소리냐?"
작은 알갱이 같은 것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또독. 또독.
처음엔 땅에서만 들리던 그 소리들이, 어느샌가 가게 지붕에서도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즉, 이 소리의 출처가 가게 보다 높은 곳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 소리,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
이걸 뭐라고 부르더라. 분명 머리에 들어있는데,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딱!
그래!
무언가에 맞아 뒤로 고꾸라지는 마왕을 보며, 그것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것은 우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