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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화 〉작업은 보는 사람도 답답하고 하는 사람도 답답하다 [2] (58/108)



〈 58화 〉작업은 보는 사람도 답답하고 하는 사람도 답답하다 [2]

"거기서 뭘 하는 거냐고 묻고 있다."

빨간놈 휘하의 병사들이 무장을 꺼내들고 돌아섰다.

등신들은 여전히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 멀뚱멀뚱 그걸 쳐다만 봤다.

"내 관할이 아니라고 주민들의 얼굴을 모를 거라 생각했나? 다른 곳은 몰라도 이곳은 마왕님의 옥체가 머무는 곳이다. 당연히 모든 주민들의 인적 사항은 기억하고 있지. 사령관으로써 당연한 일이다."

"오오..! 대단해. 그쵸 싸부?"

"닥쳐."


"일단 딥다크의 주민이 아닌  확실하고, 다른 마을에서 왔을 가능성도 있지만, 혹시나, 설마 네놈들이 동대륙의 첩자라면.."

"그렇다면..?"


이 멍청한 제자년이 계속해서 추임새를 넣었다. 지금은 노가리를 까고 있는 게 아니라 심문받고 있는 거라고 이 미친놈아.

"..네놈들을 베겠다."

마침내 빨간놈마저 검을 뽑아드는 상황까지 이르렀고, 분위기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수준까지 박살이 났다.


"어이."


그때였다.

"동부는 지낼만한가 보군, 플레임."


흰 머리의 사내가 나타나 주의를 돌려주었다. 역시 마왕을 바지사장으로 써먹고 있는 만큼, 다른 주요 인사들과도 친분이 있는 모양이다.

"지크..! 수배자 신분인 네놈이 감히 내 앞에 나타나? 그보다 400년이나 지났는데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중요한  니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는 거야.."


"지금 당장 죽여주마!!"


..꼭 그런 것도 아닌가보다.


불과 몇  전까지만 해도 칼부림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에 놓여 있었는데, 어느새 그 자리에는 네 명의 등신들만이 남겨졌다.


"무슨 일이냐 이게?"

"그러게."


"그러게요."

"그러니까요."


"응."


꼬맹이에 이르러선 정신도 못 차린듯했다.


"일단.. 가게나 갈까?"


마법사가 제안했다. 정신을 차렸다고는 보기 힘든 말이었지만, 지금 다시 마을로 돌아간다 한들, 할 만한 일이라곤 낮잠을 자는 것뿐이다.


 흰놈이 응전이 아닌 도주를 택했는지는 모른다. 마왕도 이불 마냥 털고 다니는 놈이, 그 부하 한 놈을 이기지  해서 저러는 건 아니겠지.

근처에 등신들이 있어서일 수도 있고, 더 유리한 지형으로 유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후자라면,  위치가 가게 근처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끼이익.


"플레임. 5분 지각이다. 내 시간을 5분이나 허비하게 하다니, 살아서 돌아가기 싫은가보구나."


가게의 분위기는 이상하리만큼 무거웠다. 이 공간에  정도의 무게감이 형성된 것에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다.


무엇보다 저 말을 한 게 마왕이었으니, 내가 위화감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껏 진지한 표정의 마왕의 옆에는, 처음 보는 등신들이 줄줄이 서 있었는데, 보라색, 파란색, 노란색의 알록달록한 머리들을 하고 있었다.


저놈의 부하들을 다 모으면 무지개라도 나오나 보다.

"뭐래 병신이."

평소처럼 시원하게 욕을 박고 자리로 향했다.


분위기가 무겁든 가볍든,  녀석은 여전히 내 기분을 불쾌하게 하였고, 나는 그 기분을 자연스레 입 밖으로 꺼냈다. 그래, 늘 있는 일처럼.


"잠깐."

무언가 서늘한 물건이 내 목 주변을 휘감는 것이 느껴졌다.

"방금  새끼가 마왕님께 지껄인 개소리를 다시   말해 보실까?"

마왕의 옆에 있던 노란 머리 등신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내 뒤에서 검을 들이대고 있는 놈이 이놈인가 보다.


 가지 이상한 건, 그 옆에 있는 파란 머리 등신도 이 노란 머리 등신처럼 화가  표정인데, 또  옆에 있는 보라 머리 등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 검 앞에서는 입이 무거워지시나? 목숨이 아까운가 보지? 네깟 놈이 마왕님께 그 따위 망언을 지껄이다니, 죽음으론 턱 없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게 해 주마."


죽음을 운운하는 걸 보니 진심으로 내 목에 날붙이를 꽂아 넣을 생각인가 보다. 빨리 이 새끼를 두들겨 패지 않으면  몸에 이변이 생긴다는 말이지.


응?


그때, 눈앞에서 열심히 고개를 젓고 있는 마왕이 보였다. 옆에 있는 놈들의 눈치를 보며, 들키지 않게 조용히.


나와 눈을 마주치고 부터 고개를 흔들었으니, 나한테 뭔갈 전하고 싶은  같긴 한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나는 개의치 않고 단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흠, 흠. 이봐 스톰."


마왕이 노란놈을 부르자, 노란놈은 하던 것을 멈추고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조아렸다.


그것보다 이름이 신경 쓰였다. 붉은 색으로 도배된 플레임이라는 등신과, 마찬가지로 노란색으로 도배된 스톰이라는 등신. 그렇다면 저 파란머리 등신은 들을 필요도 없이 아이스나 프리즈겠지. 아니면 아쿠아일 수도 있고.

그런데 보라색은..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예, 폐하!"

시끄러운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찡그려졌다. 실외라면 몰라도, 실내에서 저렇게까지 크게 짖을 필요가 있나 싶다.

"무엄하다!! 감히 짐의 앞에서 검을 뽑아들고 피를 보려 하느냐!"


그런데 마왕은 그것보다 더  소리로  귀를 찢으려 했다.


"저 따위 소인배의 실언을 짐이 신경이라도 쓸 것 같으냐? 그러나 방금 네놈이 한 행위는 그것을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네까짓 놈이 짐에게 오명을 씌우려 하느냐!"


"제,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여주십시오!!"


그래, 죽여라 죽여!

"이런 비상사태가 아니었으면 당장에라도 네놈을 죽였을 것이다. 나는  자에게 할 말이 있으니, 썩 꺼지도록 해라. 너희들 전부."


 말에, 가만히 앉아있던 파란놈이 일어나,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는 노란놈을 끌고 가게 밖으로 사라졌다. 어째서인지 이번에도 보라놈은 나가지 않았다.


 등신이 가게에서 멀어지는 소리를 확인한 마왕은, 조용히, 그러면서도 빠르게, 나와 등신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왔다.


"오로넬 미안해!! 화 안 났지? 화 안 난 거지? 제발 지크한테는 말 하지 말아줘!"


역시 부하들 앞이라고 분위기를 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렇다기엔 하나 문제가 있었다.


"야, 저기.  새끼 안 나갔는데?"


그건 바로 멀뚱멀뚱 서있는 저 보라놈의 존재다.

"아, 저건 괜찮아.  녀석은  직속이거든."

직속한테는 이런 비굴한 모습을 보여줘도 되는 건가.


"어, 벨씨. 오랜만이네요."

제리스가 아는 척을 했다. 가게에도  번 와 본 놈인가 보다. 그럼 다 알고 있을 만도 하지.


벨이라고 불린 보라놈은 고개를 숙여 대답을 대신했다. 입을 다물고 있으니 아직까지는 정상인처럼 보인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것보다 너희들, 혹시 마을에서 플레임이라는 녀석  봤어? 빨간 머리에 빨간 망토를 두르고 다니는 녀석인데."

팔까지 휘저으며 말을 이어가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급한 일인가보다.

"그 녀석이라면 아까 지크를 쫓아갔는데?"

어느샌가 혼자만 자리에 앉아있는 마법사였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마왕의 눈과 입이 문짝 만하게 커져있었다.


"뭐..? 지크랑 만났다고..?

아, 저거 때문인가.


"마스터, 여기 맥주  잔.."


"지금 그게 중요해!? 지크랑 만났다고?! 플레임이!?


미친 듯이 마법사의 어깨를 잡고 흔드는 마왕이었다. 마왕의 주의는 저놈이 다 끈 것 같으니 이틈에 나도 앉도록 하자.

"아, 그렇다니까. 난 바로 싸울 줄 알았는데, 지크가 그냥 도망가더라고."


"그래서! 그래서 플레임은!?"

"쫓아갔다니까.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아아악! 어떻게 해야 하지!?"


"뭐가 그렇게 걱정인데? 흰놈은 도망만 치고 있다잖아."

그놈 나름대로의 배려인가? 아니, 그놈에 한해서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다. 분명 이놈이 바지사장인 걸 들키기 싫은 거겠지.


"한 번이라도 닿으면 박살나니까 그렇지! 플레임은 동부전선 책임자라고! 그 녀석이 없어지면 동대륙 놈들이 개미 때처럼 쳐들어올게 뻔하잖아!"


어째 점점 나한테 화풀이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런 놈을  하러 여기까지 불렀는데?"


아까도 노란놈에게 비상사태라고 했으니, 이 국가의 중대사가 걸린 일이란 건 확실하다.

"부서진 성 좀 고치려고."

"얼마 전에 운석 처맞고 박살난 거?"

"응."

"그거 고치겠다고 동부전선의 책임자를 불렀다고?"

"그래."

"그래 열심히 해라."

진심으로 더 이상 할 말을 못 찾겠다. 단순노동에 최고 지휘관을 데려온다고? 나라를 이 따위로 굴리는데도 반란 하나 일어나지 않는  가히 기적이다. 나라면 진작에 갈아 엎었을 텐데. 이 나라의 고위인사는  정도의 변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건가?


"열심히 해라가 아니라 뭔가 계책을  봐! 이러다가 나 혼자 작업해야 될 지도 모른다고!"

"그것도 괜찮겠네. 혼자서 돌덩이를 나르면서 생각해 보라고. 대체 이 나라의 문제가 뭔지. 그리고 그 성은 애초에  집이잖아, 니 일은 니 스스로 하라고."


"아니 나는..!"


쾅!

마왕의 충직한 심복들이 지키고 있을 문이 거칠게도 열렸다.  가게에 그놈들을 때려눕힐 수 있을 놈들은 널리고 널렸겠지만, 굳이 그걸 실천하며 가게에 들어올 놈은 하나 밖에 없다.

"나디아..!"


"히익! 지, 지크!"

밖에는 널브러져있는 파란놈과 노란놈, 그외 기타 등등의 잡졸들이 보였고, 흰놈의 하나뿐인 팔에는 몇 분 전까지 그토록 소리를 지르며 열을 내던 빨간놈이 다소곳이 안겨 있었다.

털썩.


빨간놈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흰놈은 성큼성큼 가게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내가 분명히 말 했을 텐데..!"

"미안해, 미안해!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미안해! 내가 사과할게!!"

필사적으로 사과하는 마왕, 그리고 직속이라면서 끝까지 그걸 지켜보기만 하고 있는 보라놈. 이 공간에서는 왕도, 신하도, 그저 하나의 목숨으로 바뀔 뿐이다.

"수배서 좀 파기하라고!!"

너덜너덜한 종잇장과 함께, 흰놈의 주먹이 마왕의 면상에 직격했다.

그렇게 날아간 마왕은,  개의 테이블을 박살내고, 벽에 희미한 금을 내고서야 멈출 수 있었다. 의식을 잃은 건 별개의 문제였지만.

딸그랑.

"맥주."


수리를 하고도 남을만한 돈을 주방으로 던지며, 흰놈은 자리에 앉았다. 바로  옆의 벽에 붙어 서있는 보라놈의 몸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다.


"벨이냐. 오랜만이군."

"ㄴ,네. 오랜만입니다. 지크님."


같은 마왕군 소속임에도, 마왕에 비해 확연히 태도가 달랐다. 설마하니 이놈, 여자에게는 관대하자는 주의인가? 아니, 그러기엔 저 떨림이 설명되지 않는다. 저건 맞아본 놈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증상이다.

"작업 날이 오늘이었나? 이놈이고 저놈이고 일찍도 모이는군."

"일찍 끝내야 저희가 지크님의 눈에서 빨리 사라져 드리죠."

"그것도 맞군. 그럼 빨리 저거 들고 밖으로 꺼져. 여기서 시답잖은 소리나 하지 말고."

"네, 네. 빨리 꺼지겠습니다. 마왕님께도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래. 빨리 가라고. 네놈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만큼 기분 나쁜 일은 없으니까."

보라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히 마왕을 견인해,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 나디아 움.."

"닥치고 스튜나 처먹어라."

이 미친 꼬맹이. 눈은 쓸데없이 좋으면서 눈치는 왜 이렇게 없는 거냐.


혹여나 흰놈이 들었나 싶어 고개를 돌려 반응을 확인 해 보았지만, 맥주에 심취해있을 뿐, 별다른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기절해 있는 마왕도, 안심한  한숨을 쉬며 가게 밖으로 끌려 나갔다.


끼이익.

그리고 마침내 열려있던 문이 닫히고, 가게에는 정말 오랜만의 평화가 찾아오나 싶었다.


'자, 오늘의 작업에 대해, 내가 직접 설명하겠다!'

약 3초간의 평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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