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작업은 보는 사람도 답답하고 하는 사람도 답답하다 [4]
"벨..?"
빨간놈은 굳어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제리스와 나는, 개의치 않고 커다란 자루 안에 보라놈을 마저 넣었다.
이건 그저 정신을 잃은 손님을 조용한 곳으로 옮기려는 것뿐이다. 저놈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던,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야, 제리스. 저쪽에 발 빠져나왔다. 내가 그래서 신발은 벗기라고 했잖아."
"아, 죄송해요. 동의 없이 누군가의 신체를 만진다는 게 좀.. 일단 다시 집어넣을게요."
"이, 이 녀석들.. 벨에게.. 벨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내가 무슨 짓을 한 기억은 없다. 이년이 혼자 쓰러진 거지. 따라서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등신들도 같은 생각인지, 가게에는 오랜만의 침묵이 찾아왔다.
"그래.. 전부 한 패라 이거군? 감히 마왕군 간부를 건드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너희도, 이 가게도, 오늘부로 끝이다!!"
드르륵. 드르륵.
등신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이놈들이라도 저 정도로 건방을 떨면 응징을 하는 건가? 간만에 재밌는 걸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기세 좋게 일어난 등신들은 허겁지겁 의자 아래로 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고요 속에서 울려 퍼지는 한 의자 소리에서 찾을 수 있었다.
뚜벅. 뚜벅.
"이 가게를 어쩌겠다고?"
"지크..! 놓쳤다고 생각했더니 여기에 있었을 줄이야. 네놈도 한 번에 없애주마!"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빨간놈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며, 흰놈은 다시 한 번 물었다.
"이 가게를. 어쩌겠다고?"
"너, 너랑 같이.. 없애겠다고.. 했.."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빨간놈의 이마에선 땀이 흐르고, 목에선 딸꾹질이 나왔다. 저 등신들이 저렇게 숨어있을 정도니, 저놈이 느끼고 있을 공포는 말 할 것도 없다.
"조용히 여기서 꺼진다면, 지금 일은 없던 걸로 해 주마."
마지막으로 빨간놈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흰놈은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리고 그때, 그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아아아아악!!"
쿵!
좀 전에 보라놈이 박살내고 떨어진 구멍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통과한 그놈은, 다름 아닌 마왕이었다.
어디서 떨어진 건진 모르겠지만, 발만 디뎌도 떨어지는 자리인 건 확실하다.
"으아아악, 내 허리!"
"역시 마왕님이야, 날 구하러 오셨어!"
아니, 그냥 떨어진 거다. 이 조져진 분위기를 보고나면 죽어라고 내뺄 걸.
"아으으.. 여긴 또 어디야. 뭐야, 가게잖아?"
"나디아, 안녕!"
용사놈은 또 눈치 없게 손을 흔들고 있다.
"마왕님, 마왕님! 저기, 지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녀석들이 지크 녀석과 손을 잡고 벨을.. 벨을..!"
재빨리 흰놈의 팔을 뿌리치고 마왕에게 달려간 빨간놈은, 자기 머릿속에서만 일어났던 일을 주절대고 있었다.
마왕은 이 새끼가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냐는 듯한 눈으로, 빨간놈과 다른 등신들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등신들의 왕인 이놈이 봐도 개소리라고 느낄 정도인가 보다.
"저.. 이건.."
가게를 둘러보며 상황을 분석하고 있는 마왕에게 보이게끔, 마법사가 손을 저었다.
마왕은 짧게 한숨을 쉬고는 흰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팍!
그러고는 빨간놈의 목을 후려쳐 의식을 잃게 했다.
"하.. 일단은 미안해 다들. 작업할 일만 생기면 늘 이렇다니까."
이 새끼한테 사과를 받는 날이 올 줄이야.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그나저나 천장에 구멍은 왜 뚫려있는 거야? 나 때문에 생긴 거 아니지, 이거?"
마왕이 머리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까 벨이 떨어지면서 뚫린 거야."
용사가 대답했다.
"뭐? 그 녀석이? 아, 어쩐지 아까부터 안 보이더라니."
자신이 떨어졌던 자리에 놓여있는, 말 그대로 쪼개져버린 안전모를 바라보며 마왕이 말했다.
"그래서, 그 녀석은 어디 있는데? 뭐 어떻게 됐길래 이 녀석이 난리야."
"여기."
묶어둔 자루를 풀어 얼굴을 보여줬다.
"뭐야, 아무 문제없잖아? 또 보나마나 술 마시고 뻗은 거겠지."
어쩐지 하는 짓이 거침이 없더라니 상습범이었나 보다.
"이리 줘. 이놈이랑 같이 가져갈 테니까."
"에이,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거야, 나디아?"
조용히 사라지겠다던 마왕의 앞을 막아선 것은, 그의 숙적, 용사였다.
"빨리 가서 작업해야 돼."
"에에엥? 진짜? 여기에 떨어진 건 술을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그러지 말고, 작업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한 잔만 하고 가."
누가 마왕이고 누가 용사인지 모를 광경이다.
"아, 잠 잘 곳은 있어야 할 거 아냐! 안 된다고!"
마왕이 소리쳤다. 꽉 쥔 주먹에서는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 녀석 치곤 정말이지 대단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중이다.
그저 술자리를 거부하는 것뿐인데, 저 정도의 의지가 필요하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나디아.. 너.. 진심이구나."
"나도 마시고 싶어! 미치도록 마시고 싶다고! 그런데 성이, 집이 박살난 걸 어떡해! 왕인 내가 머무를 집도 팽개치고 술이나 띵가띵가 마시고 있으면 길바닥에 주저앉은 거렁뱅이랑 다를 게 뭐냐고!"
그러니까 저 피는, 그 상황에서도 술이랑 저울질을 했다는 뜻 아닌가?
"알겠어, 나디아. 니 마음은 충분히 전해졌어."
어느샌가 용사놈도 주먹을 쥐고는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대체 뭐가 전해졌는지는, 내 머리로는 알 수가 없다.
"나디아가 저렇게 힘내고 있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옳소, 옳소!!
마왕의 심금을 울리는 사연을 들은 다른 등신들은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꼴을 보니 수리하는 걸 도와주자면서 너나할 것 없이 성으로 올라갈게 확실했다.
저 '우리'에 포함되기 전에 신속히 자리로 돌아왔다. 새벽까지 여기에 혼자 있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이 자리에서 술을 마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야, 젠."
"왜 그러지?"
"너도 어디 숨는 게 좋을 거다. 저 병신 같은 성을 수리하는 데에 또 끌려가고 싶지 않다면."
"수리라니, 또 부서진 건가? 분명 우리가 몇 배는 더 견고하게 지어 놨을 텐데."
"얼마 전에 존나 큰 운석 쪼가리가 처박혔잖냐. 그거 때문에 작업한다고 난리라고."
"오로넬님 안돼요!!!"
젠 휘하의 따까리들이 허둥지둥 달려오며 내 입을 막았다.
"작..업 이라고..?"
젠의 상태가 이상해졌다. 고개를 숙이고 양손으로 머리를 쥔 채, 작은 소리로 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작업이라는 말이 뭔가를 일으킨 게 확실했다.
"군인의.. 본분은.. 작업이다..!"
"이제 틀렸어!"
"도망가!"
주변에 모여들었던 남정네들이, 앞 다투어 가게의 출구를 향해 달려갔다.
털썩. 털썩. 털썩.
뒤에서 다 큰 성인이 땅바닥에 나자빠지는 소리가 났다. 실내에서 달리기 같은 걸 하니까 저 꼴이 나는 거다.
"그 성에 마지막으로 손을 댄 건 우리다. 웬만한 요새보다 단단하게 보수를 했지. 그런데 운석 따위에 박살이 날 줄이야. 사과라고 하기에도 창피하지만, 우리가 책임을 지고 돕도록 하지."
방금까지 눈앞에 있던 젠의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쓸데없는 저 한 마디에 등신들의 사기가 가득 찬 건 덤이다.
-친구와 함께 마시지 못하는 술에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도 가자!!
-가자!!!
"에휴, 병신들."
하나둘씩 가게를 나서는 등신들에게서 신경을 끄고 잔을 들이켰다.
“흐으!”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이 시원하게 입안을 적셔주었다.
"제리스, 술 한 잔 더."
가게는 조용했다. 누구하나 남지 않고, 무엇하나 남겨두지 않은 채, 그것들은 떠났다.
"..."
잔을 내밀고 있어도 제리스가 나타나질 않는다. 등신들이 어질러 놓고 간 자리를 정리라도 하고 있는 건가보다.
텁.
그래, 아무리 늦어도 이 정도 되면 올 때가 됐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그런데 제리스의 목소리가 아니다. 더 낮고, 강압적인, 군인의 어조였다.
"제리스까지 데려간 거냐? 일 하는 놈들까지 데려가선 뭐하자는 짓이지?"
주위를 둘러보니 제리스는 커녕, 마법사도 보이지 않았다. 이놈이 일을 하겠다고 갔을 리는 없고, 잡혀갔거나 거래를 했거나, 둘 중 하나다.
"작업에 예외는 없다. 당신도 함께 가줘야겠어."
"지랄하지 말고, 날 끌고 가고 싶으면 저 새끼부터 끌고 가보시지. 설마 자기보다 센놈이라고 못 끌고 가는 건 아니지? 작업에 예외는 없다며?"
유일하게 남아있는 인간인 흰놈을 가리켰다. 주인장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코고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아니, 사실 있다. 바로 장애인이지. 특히 팔 다리에 결함이 있는 자들, 그래서는 돌덩이를 옮기는 것에도 제약이 따르지."
"내가 양손을 다 써도 저놈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내가 봐도 그렇지만, 규정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 잠자코 따라오도록."
"음.. 싫은데?"
규정은 뭔 놈의 규정. 저놈은 이제 군인도 아니고, 여기는 마가리스도 아니다.
"가게를 둘러 봐라. 점원들은 차출되었고 점주는 취침중이다. 술도 없고, 옆 자리의 스튜도 비었는데, 여기에 계속 앉아 있는다고 뭐가 달라지지?"
"작업을 안 할 수 있지."
"음.. 그렇군. 그럼 작업을 하지 않는 일이라면? 육체적 노동은 일체 없이, 그저 지시만 하면 되는 일이다. 사실 당신을 데려가려는 것도, 당신이 아니라 당신 옆에 있는 꼬마가 필요한 것뿐이다. 당신한텐 관심도 없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건데 그 경사를 오를 필요는 더더욱 없지. 협상이란 건 상대가 원하는 걸 제시해야 성립하는 법이거늘, 기초도 모르는 놈이 잘도 날 설득하려 한다.
"아, 그리고 위쪽에는 새참용 음식들과 술이 있다. 가게에 남은 술은 당신이 마신 그 술이 마지막이겠지. 그렇게 작업을 하기 싫다면 돌아가도 좋다만, 어떻게 할 거지?"
"허억.. 허억.. 존나 덥네. 대체 성을 왜 이딴 산꼭대기에다가 지은 거냐 그 새낀?"
"곧 도착이다. 조금만 참아라."
"그걸 누가 모르냐? 얼마나 뒤에 도착할지 아니까 더 좆같은 거 아니냐고."
"젠, 멍청해."
"..."
굳이 대답이 필요한 말이 아니라면 여전히 이를 악 물고 침묵을 유지하는 젠이었다. 이젠 하다하다 꼬맹이마저 욕을 하는데도, 그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어이 이쪽, 이쪽!
-이거 어떤 놈이 만든 거야?!
어찌어찌 도착한 정상에는, 커다란 문만이 그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 외의 부분은 삽으로 퍼 내린 모래성과도 같이 함몰된 채, 성의 위치만을 간신히 지켜내고 있었다.
"어, 오로넬도 왔네. 너도 술 때문에 온 거지?"
구석에서 기분 나쁜 연기를 뿜어대며 마법사가 걸어왔다.
"여기 안 그런 놈이 있겠냐? 죄다 술에 미쳐가지곤, 술 한 번 같이 마시겠다고 집 짓는 것까지 도와주고 있네."
"하하, 그건 그래."
"그래서, 너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일이냐? 나한테는 그러던데."
"뭐, 대충 감독만 해달라던데? 이 두뇌를 가지고 막노동을 하라는 게 더 이상하긴 하지."
"지랄하네. 그것보다 술은? 난 그것만 있으면 되는데."
"아마.. 저쪽일걸? 같이 가자. 나도 머리를 쓰기 전에 한 잔 할 생각이었거든."
"빨리 앞장이나 서."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요!!"
대체 일하지 않고 먹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기에, 그런 말이 생겨난 걸까?
"..로넬씨, 시오씨!!"
아직 술에는 입도 대지 않았는데, 그 답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오로넬씨, 시오씨, 돌 굴러가요!!"
바람보다도 빠른 속도로 굴러오고 있는, 집채만 한 돌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