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할배들은 대개, 손자는 좋아하지만 자식은 싫어한다 [2]
"저 새낀 뭐냐?"
노친네에게서 즉각적으로 반응이 왔다. 저런 놈한테도 일일이 반응해 주면, 가게에서는 끝이 없을 텐데.
"당신이야말로 뭔데 데이린한테 집적대는 거야! 이 변태새끼가!"
니가 할 말은 아닌데.
"뭐!? 이 시발, 얼굴도 처음 보는 새끼가 개소리를 지껄여!!"
쾅!!
두 변태가 격돌했다. 적지 않은 갯수의 식탁과 의자들이 벽이나 바닥으로 흩어졌다.
눈 뜨고 가게가 박살나는 걸 두고 볼 생각이 없는 여관주인이 뛰어나왔지만, 곧 나에게 저지당했다. 정확히는 내가 내민 돈에 말이다.
저 두놈을 말리겠다고 누구 한 명이 피해를 보는 것 보다, 가게에 일어나게 될 피해보다 많은 돈을 쥐어주는게 서로에게도 좋은 일일 것이다.
"이 새끼가..! 어떻게 비쩍 마른 몸뚱아리로 이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는 거냐?"
두 변태는 서로의 손으로 깎지를 낀채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제리스는 보나마나 조각을 쓰고 있을 테고, 저 노친네는 저런놈한테 조각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하겠지.
그만큼 희귀한게 조각이라는 물건이다. 그 1할 이상이 이 마을에 있다는 게 문제지.
응? 잠깐, 그러고 보니 제리스가 여기에 있다는 건..
"싸부~! 좋은 아ㅊ..!"
쾅!!
내 발에 찍힌 채, 골빈년은 가게 밖으로 날아갔다.
"우어컼억! 오늘은 또 왜요! 아직 잘 못 한 것도 없는데!"
언제는 이유가 있어서 맞는 줄 알았나 보다. 그냥 꼴도 보기 싫어서 팬 거 였는데. 하지만 오늘은 이유가 있다. 이 녀석이 내 주변에 얼씬 거리지도 못 할 이유가 말이다.
"야."
"왜요?"
"너 서대륙으로 도망온 이유가 뭐라고 그랬냐?"
"아우, 쪽팔리게 그걸 또 물으세요?"
"그래. 쪽팔리라고 묻는 거니까 대답해봐."
"..국왕 암살에 실패해서요."
"왜 실패했지?"
"싸부가 알려줬던 개구멍이 막혀서요."
"그걸 누가 막았다고?"
"누구였지? 발.. 뭐시기였는데."
"발프."
"네, 맞아요! 발프! 역시 싸부. 제자의 말을 다 기억하고 계신 거군요."
"바로 뒤에 있거든."
바닥에 뻗어 있는 골빈년의 멱살을 붙잡아 이르킨 뒤,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두 변태는 이쪽엔 신경도 안 쓰는 듯 했다.
"뒤에 있다고요? 뭐가요? 저건 제리스인데요?"
"저 놈이 혼자 힘자랑 하는 거 처럼 보이냐?"
"아, 옆에 누가 있긴 있네요. 할아버지.. 인가요? 몸이 노인네 몸이 아닌데?"
"저놈이 발프야."
"네?"
"저게 발프라고. 널 쫓으라고 병사들을 푼 놈."
"진짜 본인이에요? 말 한마디로 왕궁에 출입하는 모든 인간을 죽일 수 있다는 그 발프? 국왕 라이돌의 최측근으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다는 그 발프!?"
"그래! 그 발프라고! 권력이고 돈이고, 심지어 나이까지 처먹을 대로 처먹어놓고 뒤지지도 않는 그 미친 노친네 새끼라고!"
"아. 전 그렇게 까진 말 안했는데.."
"아무튼! 그 새끼가 여기 있으니까, 니가 어떻게 해야 되겠냐?"
"아, 싸부. 뒤, 뒤에."
"뭐?"
바닥에 그늘이 생겼다. 몇 분 사이에 해가 졌을 리는 없을 거다.
"이 후레새끼야. 너 뭐하냐?"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노친네의 위치와 표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애비라는 인간이 생판 처음보는 놈한테 처맞고 있는데 넌 뭘 하고 있냐고."
머리가 몇가닥 뽑힐 각오를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산과도 같이 우뚝 솟아있는 노친네와, 그 뒤에 메달려 아프지도 않을 주먹을 열심히 꽂아대고 있는 제리스의 모습이 보였다.
"음.. 이거? 이건 그러니까.. 어! 꼬맹아 밥 다먹었냐?"
-뭐라고!?
두 변태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그리고 여전히 묵묵하게 식사를 진행중인 꼬맹이를 발견했다. 내가 거짓말은 한 것이었지만, 그 비난의 화살이 나를 향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더러운 눈으로 데이린을 쳐다보는 걸 그만 하라는 겁니다, 변태씨! 그 나이 먹고 창피하지도 않나요!"
"이 새끼가 진짜! 니 새끼야말로 내 손녀딸에게 무슨 변태같은 짓이냐!"
변태들이 다시 싸우는 동안, 나는 골빈년에게 충고를 건넸다.
"봤지? 저딴 좆도 아닌 일에도 뒤질 듯이 설치는거."
"네. 듣던 것 보다 더 미친 노인네네요."
"그러니까 저 양반한테 걸리기 싫으면 당분간 눈에 띄지 말라고. 오늘은 가게에도 간다니까 오지말고."
"당분간이요? 그게 얼마동안인데요?"
"몰라."
"네에에에?! 저한테 기약도 없이 숨어있기만 하라고요?"
"그럼. 뒤지고 싶냐?"
"아, 아니.. 그건 아닌데. 가게에 그냥 앉아만 있는 건 너무 지루하다고요."
"니 가게 관리나 좀 해라. 맨날 조지만 세워놓고 술이나 처 마시지 말고. 대체 관리도 안 하는데 왜 매출이 나오는 거냐?"
"글쎄요. 조지한테 알아서 하라고 해 두긴 했는데, 진짜 알아서 잘 팔더라고요."
"그것보다, 그럼 변장은 어때요? 그때 했던 남장. 그 정도면 저 노인네도 못 알아보지 않을까요?"
귀띔이라도 해주려고 한 내가 병신이지.
"진심이냐?"
"네! 전 언제나 진심이라고요!"
"그럼 하나만 약속해라. 뒤질때 내 이름은 절대로 꺼내지 않기로."
"왜, 왜 그러세요.. 벌써 들킨 것 처럼."
"아니 자신 있으면 약속 하라니까? 난 해줄 말은 다 해줬다."
"아 알았어요, 알았어. 당분간 숨어 지내면 되잖아요. 그래도 그 당분간이 언제가 될지 모르니까, 그때까지 싸부 뒤좀 밟을게요."
"언제는 안 한 것 처럼 말하네, 이새끼가. 참고로 미행할 생각이면 똑같이 약속 해야되니까 알아서 하고."
"아! 대체 저 노인네가 뭐라고 미행도 안 되는 건데요!"
"니 스승의 스승."
"하.. 알았어요. 마왕성이나 가야지."
제자놈은 마지막 한 마디에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나 조차도 한 번도 이기지 못 한 놈이, 내가 한 번도 이기지 못 한 놈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제 주제를 알아야지.
"잠깐만, 손녀딸이라구요? 누구의?"
이제서야 노친네의 말을 머리속에 입력한 제리스였다.
"당연히 데이린이지, 이 멸치 새끼야."
제리스는 주먹질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봤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들었냐는 눈으로. 물론 저놈에게 해 줄 말 따위 없는 나는, 그 눈에 중지를 세겨줄 뿐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구요, 오로넬씨! 진짜 저 이상한 변태가 데이린의 할아버지인 거에요?! 그럼 아빠는? 아빠는 대체 누구란 거죠!?"
치켜세워진 중지를, 본 채도 안하고 내 몸을 흔들고 있는 제리스에게선 광기마저 느껴졌다. 대체 저 꼬맹이가 뭐라고 이 지랄들을 하는 걸까? 손녀딸을 바라던 저 노친네야 그렇다 치고, 이 새낀 대체 왜?
"아빠는 당연히 거기 그놈이지. 그리고 내가 그놈의 아버지니까 데이린의 할아버지가 되는 거다."
노친네가 이겼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분한 건지, 미쳐버린 건지, 제리스는 몸을 떨고 있었다.
"오로넬씨, 당신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어요."
"난 아무말도 안 하고 있었는데."
"지금까지는 보호자라는 걸로 넘어가주고 있었지만, 아버지를 자처하다니.. 더 이상은 용납 할 수 없어요."
"시발, 듣고 있지도 않네."
"데이린은 누구의 딸도, 손녀도 아니야! 데이린은 모두의 데이린이다!!"
제리스의 왼쪽 눈이 더욱 밝게 빛났다. 조각의 힘을 더 강하게 발동 시키고 있는 모양인데, 힘의 재분배라는 특성상, 여기서 가장 약한 나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
"이, 이건 시발 설마.. 조각인 거냐?"
긁어모은 힘을 양손에 집중시켜 주먹을 쥐는 제리스. 대화의 흐름대로라면 그 주먹이 향해야 할 곳은 이쪽일 텐데, 어째서인지 조준은 노친네를 향하고 있었다.
"우오오오!!!"
그리고 그 일격이 노친네를 향하기 직전, 그 녀석이 입을 열었다.
"그거. 하지마."
바로 이전부터 힘을 빨리는 느낌이 싫다고 말해왔던 꼬맹이였다.
"허억, 데이린..! 아, 알겠어."
그 말을 들은 제리스의 얼굴에 황홀함이 피어오르더니, 곧바로 조각의 발동을 멈추고는 점잖은 자세로 손을 내밀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어르신."
"대체 뭐 하는 새끼냐, 이거?"
동감이다.
"제가 잘 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든, 할아버지든, 어르신과 제가 데이린을 생각하는 마음은, 그 미소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은 모두 같잖아요?"
지금까지 저놈이 웃은 적이라곤 한 번도 없는데 무슨 개소리지?
"..!"
노친네의 동공이 커지더니, 화가 단단히 난 팔을 내밀어, 그 손을 꽉 붙잡았다.
"젊은 놈들은 입에 발린 소리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군. 그 눈, 마음에 들었다. 이름이 뭐냐, 멸치?"
"제리스라고 합니다."
"좋다, 멸치. 지금부터 이 마을 어딘가에 있다는 전설의 술집에 갈 예정인데, 따라올 테냐?"
"제가 그 술집의 점원입니다."
"뭐..?"
노친네가 이쪽을 쳐다봤다. 습관적으로 중지를 올릴 뻔했지만,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고개를 끄덕여줬다. 습관의 가장 무서운 점이란, 바로 상대를 가리지 않는 것이다.
"뭐, 아무래도 좋다 그딴 건. 오히려 길을 헤멜 걱정은 안 해도 되니 잘 됐군. 내가 가든 말든, 저 후레새끼가 길을 알려줄 리는 없었을 테니까"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니 새끼는 내가 뒤질 때까지 여기서 빼달라는 개소리는 지껄일 생각도 하지마라."
"어차피 국왕 폐하놈한테 말 할 생각도 없었잖아? 그럼 난 이만, 당신이 귀여워해 마지않는 손녀와, 시원하게 낮잠이나 때리러 가도록 하지."
음식이 아닌 음식을 다 먹어치운 꼬맹이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보이며 노친네를 도발했다.
이를 갈고있는 노친네를, 아까 까지 주먹을 맞대고 있던 제리스가 말리는 것은, 참으로 해괴한 광경이었다.
"그 좆같은 입을 언제까지 놀릴 수 있나 보자고..!"
"멀리 안나갑니다, 아버지."
예상보다 가게가 더 많이 박살나는 바람에, 여관주인에게 돈을 더 지불해야만 했다. 물론, 그 몫에는 내가 부순 것도 포함 돼 있긴 하지만, 저놈들이 원인이니 아무튼 저놈들 탓이라 할 수 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아직도 안 갔냐! 좀 꺼져라 제발! 이번엔 또 뭔데!?"
여관주인과의 까다로운 협상 끝에, 겨우 방으로 돌아가는 계단을 밟은 순간에, 진작에 사라진 줄 알았던 노친네가 고개를 내밀었다.
"거기, 럼주 있냐?"
"내꺼 있으니까 그거나 처먹고 있으라고!"
"빨리 안 오면 다 마신다, 십새끼야!"
노친네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오늘 올라가면 마법사에게 다음 발주를 서두르라고 일러둬야겠다.
'야, 꼬맹아. 혹시 집에 럼주 가진 거 있냐? 존나게 독하고 좆같은 술인데.'
다 무너져가는 건물 속, 다 뒤져가는 애새끼에게서 술을 찾는 남자.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병신같은 남자는 그 애새끼에게서 럼주를 찾고 있다.
"하여튼, 개버릇은 뒤질 때까지 못 고친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