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1화 〉과거는 늘, 현재를 따라다닌다 [1] (71/108)



〈 71화 〉과거는 늘, 현재를 따라다닌다 [1]

일식. 태양이 무언가에 의해 모습을 감추는 현상. '무언가'가 '무언가'인 이유는, 지역마다 그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딘가에선 멸망의 징조, 왕권붕괴의 징조라며 기피하는 놈들도 있는가 하면, 태양이 피곤해서 쉬는 거라는 단순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놈들도 있다.


"알겠냐? 저건 니 인생이랑 하등 상관없는 거니까, 신경 꺼."


"음.."

꼬맹이는 열심히 태양을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벌써 반이나 사라져있는 태양은,  반짝임을 상실한  인간들의 시선을 허용하고 있었다.

"..알겠어."

"뭘."

"저건 스튜야. 엄청 큰 스튜."

"그래서, 먹고 싶냐?"


"응."

"저까진 어떻게 갈 건데."

"열심히 걸으면 갈  있어."


"에휴, 백날을 걸어봐라. 저길 갈 수 있나."


"..그렇게  거야?"

집요하게도 묻는 꼬맹이였다. 일식을 보고 스튜라고 하는 놈한테 태양이 어디 있는 지를 알려주기란, 그야말로 귀찮은 일이다.


"그래."

그래서 알려주지 않기로 했다. 이 녀석의 텅  머리에 조그마한 지식을 채워 넣는  보다, 내 턱관절이 몇 배는  소중하니까.

"그럼 도리안이 해  스튜 먹을래."

"지금 가고 있잖아."

꼬맹이는 더 이상 태양을 바라보지 않았다. 거지같은 은행들을 터트리며 산길을 오를 뿐. 이 녀석에게 스튜는, 당장 먹을  있는 것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

"어이, 오로넬!"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소에서, 이 시간에, 날 저렇게 부를 놈들은 가게의 등신들뿐이다.

여기서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한다면, 이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리는 것 쯤, 일도 아니지만, 난 굳이 그런 일에 힘을 빼지 않을 것이다.


"야, 부르잖아! 무시해?!"


가만히 있으면, 자기들이 알아서 이쪽으로 오기 때문이다.

"시오, 안녕."


"안녕."

꼬맹이에게 적당히 손을 흔들어준 뒤, 마법사는 자연스럽게 내 옆길에 끼어들었다. 이제 양쪽에서 은행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리겠군.

"그것보다 일식이라고, 일식. 제대로 보고 있어?"


"지금 옆에서 씨부렁거리는 니 면상도  보고 있는데, 저걸 봐야하는 이유는 또 뭔데?"


"은행 밟은 신발로 차이고 싶냐?"


"아니. 한 번만 봐줘."

그것만큼은 안 된다.


"일식 같은 건 살면서  번 보지도 못하는 경험이니까 꼭 봐두라고."


"넌 벌써 몇 번은 봤겠네."


"뭐,  봤지."

"어쩐지. 난 이게 은행 냄새인줄 알았거든? 근데 니 몸에서 나는 쉰 내.."


"이 새끼야!!"


등 뒤에서 빗발치는 은행들을 피해 달린 결과, 꼬맹이의 바람대로 평소보다 빠르게 가게에 도착했다.

끼이익.


-우린 끝났어!

-종말이 도래한다!!

생각보다 미신을 잘 믿는 놈들이었나 보다. 믿는 신도 없으면서 무릎을 꿇고는, 뭐라 뭐라 열심히 중얼거리는 등신들이 한 가득이었다.


"헉.. 헉.. 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흰색 가운을 어깨에 들쳐멘 채, 마법사가 나타났다.

"어, 왔냐? 빨리 왔네."


팍!

머리통에 물렁하면서도 딱딱한, 기분 나쁜 덩어리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씨발.

"어, 오로넬, 시오. 왔어? 평소보다 늦게 왔네."


용사가 자리에서 앉은 채로 손을 흔들었다. 같은 테이블에 있던 걸로 추정되는 등신들은 열심히 기도를 올리는 중이다.


"너  시인 줄은 아냐?"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평소보다 빨리 도착한 상태다.

"시계같은  안 봐도, 밖이 어두우니까 저녁이겠지."


그럼 그렇지.

"넌 대가리란 걸 쓰긴 쓰냐?"


"응? 무슨 말이야?"

"아니, 아무 말도 아니다."

손을 저으며 대화에서 빠져나와, 자리로 향했다. 꼬맹이는 나보다 빠르게 자리로 달려가, 곧장 스튜를 주문했다.


"근데 이게 다 뭐야, 시트린? 왜들 이래?"

"아, 이거? 조지가 무서운 이야기를 해서 그래."


"무서운 이야기?"

"응."

그럼 이게 전부  이야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일인가? 저 종말이니 어쩌니 하고 있는 게? 그렇다면 지금까지 치어 죽인 도적들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뭐야, 내 이야기 무서웠어? 전혀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닌데."

허우적대는 등신들을 가로질러, 당사자인 마부가 나타났다. 하긴, 실화가 아닌 이상, 이놈들의 머리로 '무서운 이야기' 라는  외우고 다닐 리가 없다.


"오, 그건 좀 궁금한데? 이쪽에 와서 자세히 얘기해 달라고. 술 좀 시키게."


마법사의 자리에는 이미 술잔이 나와 있었다. 마부에겐 그닥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닌지, '이걸 또 씨부려야 하나..' 같은 표정을 한 채, 그  자리에 앉았다.


"후.. 진짜 듣고 싶어?"


"어."

"미리 말하는데, 재미라던가 무섭다던가, 그런 거 기대하지 말라고. 그냥 일식 때문에 떠올라서 한 말이니까."

"알았어, 알았어. 재미없으면 내가 알아서 끊을게."

"후.. 그래."


그리고 마부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

그건 내가 마부 일을 시작하기  년 전의 일이었어.

뭐, 그 전에도 말을 타는 건 좋아했지. 그때도 영혼의 동반자가 있었고 말이야.

아무튼, 그땐 군마를 사육하면서 밥벌이를 하고 있었어. 내가 조련한 말들이 성장하는 걸 보면서 뿌듯함을 느끼곤 했지.


게다가 거긴 여러 국가에 군마들을 파는 민간기업이었거든. 고객이 우리 말을 보고 사는 거지, 이런저런 간섭을 하진 못했어. 정말 행복한 나날들이었지.


"어이, 조지. 그거 알아?"

"..헉, 헉. 뭐?"


"저거, 일식이라고 한데. 보기 드문 현상이라던데."

"오오, 되게 말똥 같네."


"..넌 어째 세상 만물이 다 말이냐?  말박이 새끼야."


"조지! 조지, 어디 있나?"

"앗, 여기요, 사장님!"


그땐 말똥을 치우고 있어서, 사장이 부르든, 왕이 부르든, 나갈 수가 없었어. 나갔다 들어오면 다시  냄새에 적응해야 되고, 다시 그 손맛을 느껴야 했거든.

"오, 똥을 치우고 있었구만. 손님이 왔는데, 잠시 괜찮겠나? 일은 다른 친구에게 시켜놓겠네."


"아, 네. 금방 가겠습니다."


평소라면 내가 키우는 말들의 똥이니 내가 책임지고 치웠겠지만, 그날은 냄새가 장난이 아니었어. 전날 카레를 준 게 문제였나 봐. 양말 썩은 내가 나더라고.

그래서 그 일을 맡게 될 '다른 친구'가 누구인지 궁금했는데, 사장 아들이 오는 거야. 이게 진짜 오블리스 노블리주라는 생각이 들었지.


"아, 선생이 바로 조지 씨군요."


"네, 반갑습니다."

좁아터진 사무실에 앉아서  기다리던 건, 평소처럼 군복을 입고 온 자들이 아니었어. 아주 단정한 차림으로 단 한 명, 신사적인 남자였지.


"평소에도 직업상 여러 군마들을 봐왔지만, 이곳의 군마. 특히 선생의 군마들은 격이 다르더군요."

"감사합니다. 그 녀석들은 제 자랑이죠."


"뭐.. 돌려 말하는 것도 실례가 될 듯한데, 오늘 선생을 찾아뵌 이유를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네, 네. 편하실 대로 하세요. 어차피 돌려 말했어도 한 귀로 흘렸을 거니까."


"하하, 솔직하시군요. 제 복장을 보시면 알겠지만, 오늘은 공적인 일이 아니라, 사적인 일로 방문한 겁니다. 바로 축사의 첫 번째 칸에 있는, 그 말을 구매하기 위해서요."


그래. 그 말이 당시의 내 동반자, '스트라이크' 야. 로드와 킬의 어미이자, 세계에 둘도 없을 명마였지.


"..죄송합니다만,  녀석은 파는 게 아닙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이라면, 이 가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돈에도 넘어가지 않으실 테지요."


"알고 계시다면.."

"그래서."

신사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그리고  눈에서는 확신이 느껴졌어. 자신이 제시할 무언가가, 날 반드시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겠지.

"돈이 아닌 다른  준비해 왔습니다. 저도 말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돈으로 후려치는 건 별로 선호하는 방식이 아니라서요."

"..."


난 결단코 흔들리지 않았어. 너무나도 자신을 갖고 말하는 신사의 제안을, 오히려 듣지 않으면 실례인 것만 같았지.


그리고 마침내. 신사의 품속에서 오묘한 색을 띤 호루라기 같은 물건이 나타났어.

"선생은 '조각' 이라는 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조각..?"

"네, 조각.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고고학이나 과학에 흥미가 있는  아닌지라 잊었습니다만,  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요."


"이건 말 그대로 힘입니다. 현실을 뛰어넘는 힘. 일개 인간이 군대를 상대할 수도 있고, 미래를 볼 수도, 과거를 볼 수도 있으며, 날씨를 바꾸는 것조차 가능하지요."

"이 호루라기에, 그만한 힘이 있다는 겁니까?"

"하하, 그럴 리가요. 이름에서도 그렇듯 이것은 '조각'. 비슷한 물건들이 여러 개가 존재하며, 그 개체마다 행할 수 있는 힘이 각자 다릅니다."

"그래서  호루라기를 준비해  겁니다. 선생께서 아주 마음에 드실만한 힘을 가지고 있거든요. 아, 마침 저기 딱 좋은 실험체가 있군요."

삐익ㅡ!


신사는 사무실 구석에 있는 쥐를 가리켰어. 그러고는 호루라기를 힘껏 불었지. 그리고..


"멈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던 쥐가 멈추더니.

삐익ㅡ!


"이쪽으로 와라."

무언가에 홀린 듯이 신사에게로 걸어왔어.

호루라기를 더 불지 않자, 신사에게 도착함과 동시에 쥐는 도망쳤어. 그게 그 호루라기의 힘이었던 거지.

"자, 어떻습니까? 아, 혹시 헷갈릴까봐 말씀드립니다만, 이건 쥐한테만 효과가 있는 게 아닙니다. 동물이라면, 인간처럼 자아가 있지 않는 이상, 모든 대상에게  힘을 발합니다."


"그것과 제 동반자를 바꾸시자고?"

"이 가방에 든 돈까지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  말은 세계에 둘도 없을 명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그 정도에 동반자를 넘길 인간으로도 보이지 않으실 텐데요."


방 안에는 정적만이 흘렀어. 신사의 눈에서는 살기가 비췄다 사라졌다를 반복하고 있었지. 날 죽이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그 정도로 말에 진심인 사람은 살면서 몇 만나지 못했는데. 이런 이유로 만나지만 않았다면 이 사람과  친구가 됐겠지.

"후...... 알겠습니다. 포기하도록 하죠. 사실  조각도 몰래 가져온 거라, 들키면 꽤 위험했거든요."


그건 세상에서 가장 긴 한숨이었어. 지금까지의 모든 고뇌와 갈등이 쏟아져 나오는듯했지.

"아, 저야말로. 원하시는 게  짝만 아니었다면 흔쾌히 보내드렸을 텐데요. 그.. 대신이라고 하긴  하지만, 한  타보시렵니까? 시승이라면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정말입니까!?!? 부디!!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그 등에 올라타, 대지를 내달릴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찾은 동지인데, 그냥 돌려보낼 순 없었지. 스트라이크가 명마인 걸 알아보는 그에게는 자격이 있었어.


그리고 그때.


쾅!!!!

귀가 멀 정도의 소음과 함께, 나는 허공으로 떠올랐어. 그 단단하던 지면이, 마치 이불을 털듯이 모든 것을 하늘로 날려 보냈지.

"악! 괜찮으세요?"

"네, 쿨럭! 이 정도의 일은 많이 겪어봤다고 생각했는데, 손과 발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군요."

다행히 실내에 있었던 우리는, 천장 선에서 몸을 멈출 수 있었어. 난 밖에 있던 말들이 걱정됐지. 곧장 문을 열고 바깥을 확인했어.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땅을 비추고 있어야 할 태양이, 사라졌거든.

 자리에는 태양과 같은 크기의 새카만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었고, 하늘에는 밤이 온 것처럼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지.

"조지! 손님은? 손님은 어디계시나?"

"여기, 여기에 있습니다!"


"아, 여기에 계셨군. 일단 피신하시지요. 이쪽입니다. 조지, 자네도 어서 오게!"

사장은 이런 상황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손님들과 직원들을 챙겨 대피소로 유도하고 있었어. 하지만 인간만이 생명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

"사장님은 먼저 가세요! 저는 말들을 데려갈게요!"

"말들은 신경 끄게! 일단 자네들이 살아야 그 녀석들을 돌볼 거 아닌가!"


"저 말들이 없으면 사장님이 저희를 돌보기 힘들걸요!"


"조지! 조지! 이봐! 하.. 저 말박이 새끼."


사장과 헤어진 뒤, 곧바로 축사까지 달려갔지만, 거기엔 아무도 없었어. 다행히 숲 방향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 덕분에, 겁에 질려 도망쳤을 뿐이라는 걸 알게 됐지.

-히이이잉ㅡ!!

물론, 스트라이크는 도망가지 않았지만.

"역시  애마야. 기다리고 있었구나. 이제 안전한 곳으로 가자."

쿠구구구구구!


하늘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어. 태양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그것에서, 무언가가, 무언가가 움직이는 듯 했지.

「살아남은 자들에게 고한다.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조각일 뿐, 쓸데없는 살생을 더 늘릴 생각은 없다. 이 이상 주위의 인간들을 말려들게 하기 싫다면, 조각을 가진 자는 신속히 투항하라.」

그것은 거대한 암석. 땅을 향해 내려오고 있는 거대한 암석에서부터 들려온 목소리였다.


땅과 가까워질수록 그것의 크기는  커져만 갔다. 마침내 그것이 스스로 하강을 멈추고, 그 암석 위에 존재하는 수많은 조형물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는 제안이 아닌 협박임을 알리는 바이며..」


새파란 피부를 가진.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란다.」


대머리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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