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과거는 늘, 현재를 따라다닌다 [3]
치이익.
마법사가 막대과자에 불을 붙였다.
"스읍, 후우."
가게 정면의 숲을 모조리 벌목해버린 용사는, 그 개판을 치고도 짧은 심호흡만을 내쉴 뿐이었다.
"역시 용사답군. 잘 봤네, 시트린. 자넬 보니 나도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어."
뭐라는 거야, 이 미친 할배. 닥치는 대로 휘두르는 이 녀석의 검격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여기까지 와놓고.
"노장께서도 만만치 않으셨습니다. 조각도 없이 그 용사와 비등하게 전과를 내시다니요."
내 말이. 그보다 젠놈은 언제 온 거지.
"근데 괜찮아, 몬드 아저씨? 검에 금이 갔는데."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잘도 씨부린다.
"아, 괜찮네, 괜찮아. 원래 이 검은 이렇게 설계 됐거든."
부서지기 위해 설계된 검이라고? 진짜 정신이 나간 건가?
"그보다, 저거. 저걸 처리해야지."
엄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담배로, 하늘에 떠있는 거대한 돌멩이를 가리키는 마법사였다. 아마도 빡빡이들의 본거지는 저기겠지.
마음 같아선 이 등신들에게 죄다 떠넘기고 술을 계속 마시고 싶지만, 이놈들을 오래 봐도 너무 오래봤다. 분명 가만히 내버려 뒀다간 나한테까지 피해가 번지겠지.
게다가..
부스럭. 부스럭.
"들리냐, 꼬맹아?"
"응."
"뭐가?"
"니들한테는 기대도 안 했다. 귓구멍도 근육으로 막아놨냐?"
용사가 얼굴을 찡그렸다. 찡그리면 지가 뭐어쩔거라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면상 펴고 잘 들어. 아직 근처에 빡빡이들이 더 있다고. ..사방에 있으니까 그거 내려놔라 용사년아."
"..."
용사는 말없이 검을 집어넣었다.
빡빡이들은 머리털만 없지, 내용물까지 없는 이놈들에게 무언갈 설명하기란, 대머리에 머리를 심는 것과 같았다.
"..뭐, 대충 이렇게. 알겠냐?"
"음, 그러니까 저쪽으로 가서, 다 헤치우면 되는 거지?"
용사도 알아들을 정도면다 알아들었겠지. 작전이라 해 봐야, 등신들을 몇 조로 쪼개서, 퍼져있는 빡빡이들을 각개격파 하는 것뿐이지만 말이다.
여기서 기다렸다가 일망타진하는 수도있지만, 그랬다간뒤에 있는 이 판잣집이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즉, 이 방법만이, 내가 질부담이 가장 적으면서, 가장 빠르게 술을 마시러 복귀할 수 있는 방법이란 거다.
"헥, 헥, 여러분! 여기 계셨군요!"
빡빡이들이 매복해 있는 방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놈들을 전부 작살내지 않고선 여기까지 올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대체 어떤 등신이지?
"헥, 헥, 힘들다.."
"뭐야, 라보. 너왜 마을 쪽에서 올라와? 너 산에서 살잖아."
개새끼잖아.
"조지 씨를 데리러 갔죠! 저쪽에 성이 무너진 건 보셨어요?"
"응? 성이 무너져? 아니, 그보다 왜 나야?"
"다른 분들은 다 가게에 계실것 같았거든요."
맞는 말이다. 어째 영장류란 놈들이 개새끼 한 마리 보다 못 한 것 같지.
-푸르르ㅡ!
또 뭘 끌고온 건지, 늑대의 뒤에서 낯이 익은 검은 말과, 그와 대비되는 새하얀 말이 걸어왔다.
"로드, 킬?! 이 녀석들은 왜 데려왔어?"
"아, 그게.. 조지 씨 댁을 지나칠 때, 제 뒤를 따라왔나 봐요."
"하.. 그래. 옛날부터 끈으로 묶는 건, 이 녀석들한테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
마부가 대견한 듯 말들을 쓰다듬었다.
추가된 전력은 늑대 하나에 말 둘, 늑대는 몸집만 봐도 충분히 싸울 수 있을 법 하고, 전력에서 제외시켰던 마부도, 저 말들만 있다면 싸울 수 있을 거다.
싸울 놈들이 늘어난 건 내가 할일이 적어지니 반길만한 일이지만, 저놈들이 노닥거릴 시간을 준 건 실수였다.
척. 척.
"야, 오로넬."
"알아, 시발."
퍼져있던 빡빡이들의 포위망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하늘에 떠있는 저 돌멩이에 얼마나 많은 빡빡이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대부분이 전투원이라는 건 확실해 보인다.
"그럼, 못 싸우는 사람은 들어가 있는다? 잘들 놀다 오라고."
꽁초를 던지며, 부서진 문 안으로 들어가는 마법사였다. 그 꽁초가 떨어진 바닥에는, 죄다 나보다 몇 배는 커 보이는 놈들이 엎어져 있었다.
시발.
용사가 이놈들을 가볍게 학살하는 걸 보고, 잠시 머리가 맛이 갔었나 보다. 이 새끼가 말도 안 되게 강한 거지, 저놈들이 약한 게 아닐 텐데 말이다.
역시 지금이라도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게..
"이제 어떡하나, 오로넬?"
전직 사령관이란 놈이 일개 첩보원에게 묻고 앉았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좆 됐구만. 포위망도 존나 촘촘하네. 이거 등신 몇 명으로 뚫을 수는 있는 건가?
"어쩌긴 뭘 어째? 아까 말 한대로 해야지. 내일도 이 판잣집에서 술을 마시고 싶으면 열심히 유인하면서 뛰라고."
시발.. 될 대로 되라지.
복부의 상처가 쑤셔왔다. 대체 내가 왜 또 이 지랄을 해야 하는 거냐. 가게에 흰놈만 있었다면 이딴 빡빡이들 쯤, 순식간에 파란색 물감이 됐을 텐데. 왜 이런 날에만 없는 거냔 말이다, 이 개 같은 놈아.
「저놈들이다! 포위망을 유지하면서 일제히 달려들어라!」
"가세나!!"
"이따 봐 얘들아! 죽으면 안 돼!"
-히히히이이잉ㅡ!!
"다들 조심하세요!"
"시바아아알!"
~
쾅! 쾅!
-으아아악!!
「저긴 재밌겠구만.」
양쪽 허리춤에 검을 차고, 어깨에는 기다란 창을 맨 채, 남자는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방금 전까지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며 솟아있던 성채의 잔해들이 굴러다니고 있다.
「피넛님.이렇게 박살이 났는데, 정말 생존자가 있을까요?」
잔해를 뒤지고 있던 무리들 중 한 명이 걸어와 의문을 표했다.
「있든 말든, 장로님이 하라고 하시잖냐. 안 하면 너네가 어쩔 건데?」
절벽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피넛의 눈이, 남자의 안구를 향해 방향을 바꾸었다.
「아, 앗. 죄송합니다.」
「빨리 가봐.」
잔해로 달려가는 남자를 바라보며, 피넛은 다시 한 번 그 파편들과 마주했다.
「하긴, 그 영감의 그걸 맞았는데 깔끔하게 성만 박살날 리가 없지.」
덜컹! 덜컹!
그가 주시하고 있던 파편 하나가 들썩거렸다. 부하들은 일제히 그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피넛님! ㅇ..」
「보고 있어. 뒤로 조금만 더 물러서라.」
파편의 들썩거림은 점차 멎어 들어갔다. 폭풍 전야의 바다가 가장 고요하다는 걸 알고 있는 그들이기에, 그 등골을 타고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적막이 최고점에 이르렀을 때.
쾅!!
주위의 잔해들을 날려 보내며 나타난 무언가가,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
숲의 여기저기에서 무너지는 소리와, 부서지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막아라! 조각을 빼앗아라!」
"비켜ㅡ!!"
쾅!!
-으아아악!!
그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게 산을 깎아내고 있는 곳은, 바로몬드와 시트린이 돌파하고 있는 구역이었다.
「죽어라!!」
나무 위에서 기회를 엿보던 침략자들 중 하나가, 몬드를 향해 도약하며 검을 내려찍었다.
몬드는 두 다리를 멈추고, 곧바로 그것을 축으로 삼아, 주먹보다 빠른 속도로 그 목을 낚아채어 움켜쥐었다.
「지금이다!!」
노련한 침략자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지만, 노장의 목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쿵!!
힘없이 늘어진 그들의 동료가, 투석기에서 발사된 돌처럼 날아와 전열을 무너뜨렸고, 가까스로 노장에게 도달한 자들은, 그가 휘두르는 대검에 무참히 쓰러질 뿐이었다.
"아저씨 숙여!!"
쾅!!
그리고 그 대검에서 목숨을 건져냈다 해도, 어딘가에서 날아온 검격이, 지우개질을 하듯, 그들의 목숨을 거둬갔다.
그들은, 그야말로 재해와도 같았다.
-으어억..!
털썩.
그들을 가로막은 포위망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데에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변이 조용한 걸로 봐선, 다른 손님들도 무사히 포위망을 박살내고,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러 간 것으로 보인다.
"아저씨 목적지는 여기 앞이었지? 내가 저 위고."
"그럴 걸세. 요즘 건망증이 심해져서, 내 것만 외우는데 급급해서 말이야. 정확하지는 않다네."
"음.. 오로넬이 마왕성 쪽으로 가라곤 했는데, 마왕성으로 가란 건지, 그쪽 방향에 뭐가 있단 건지 잘.."
피슝ㅡ!
"시트린, 엎드리게!"
팅!
시트린을 향해 날아온 투사체는, 몬드의 대검에 가로막혔음에도 그 힘을 잃지않고, 스스로의 힘에 못 이겨 일그러지고서야 비로소 땅으로 떨어졌다.
"괜찮나, 시트리.."
캉!!
몬드가 몸을 돌릴 새도 없이, 거대한 검이 나타나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대검보다 몇 배는 크고, 무거운. 마치 기둥과도 같은그것의 뒤에서, 희미한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멋진 걸 당신? 도저히 늙은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반응 속도야.」
지대가 낮아 힘겨루기에서의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몬드는, 아래로 찍어 누르고 있는 상대의 검을 흘려보내며, 검과 덩달아 아래로 미끄러지는 그 안면을, 자신의 두부로 세차게 들이박았다.
「아아악! 뭐하는 짓거리야! 검을 들었으면 검만 쓰라고!!」
피가 흐르는 코를 부여잡고 뒤로 물러서는 남자의 어깨너머로, 무언가 재빠른 것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위험해 아저씨!"
팅!
시트린이 튕겨낸 것은, 자신이 막아내었던 화살과 같은 물건.
즉, 적과 아군이 일직선상에 놓여진 상황에서도, 망설임 없이 시위를 당겼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실력에 대한 절대적인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행위이다.
눈앞의 저 거한이 상대라면, 둘이든 셋이든, '여기는 맡겨라' 는 멋들어진 말을 했을 테지만, 현실과 낭만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몬드는 알고 있다.
"시트린! 저격수를 부탁하네!"
"알겠어, 아저씨! 위에서 봐!"
시트린은 망설임 없이 달려 나갔다. 그녀 또한 알고있다. 자신의 콩알만 한 검으론, 저 남자와의 싸움에서 불리하다는 것을. 조각의 힘으로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자신이, 저격수를 맡아야 한다는 것을.
술에 찌든 생활로 몸이 더뎌졌다 해도, 그들이 겪어온 시련과 고난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선 여긴 맡겨두고 가라던 멍청한 남자들이 많던데. 비신사적이라 좋은 걸, 당신?」
남자는 자신의 피가 묻은 손을 털어내고는, 목을 꺾으며 검을 바로잡았다.
"신사란,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라네. 나는 그녀를 나와 같은 전사로 인정하고, 믿기 때문에, 이렇게 목숨을 맡기고 여유롭게 자네와 이야기 할 수 있는 거지."
몬드도 땅에 박힌 대검을 뽑아, 그 위에 묻은 흙들을 쓸어내렸다.
「그러니까 본인은 신사란 말씀이시구만? 그렇다면 더더욱 비신사적이란 말을 해야겠는데? 신사는 여자 혼자만 남겨두고 죽는 게 아니잖아. 안 그래?」
남자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만은 전장에서 가장 품어선 안 될 감정이라네. 내가 이 몸으로 자넬 못 이길 성 싶나?"
「아니 아니 아니, 그런 뜻으로 말 한 게 아니야. 당신이 센 건 대충 알았다고. 내 말은..」
캉! 캉! 캉!
순식간에 세 합이 오고갔다. 상대의 속도에, 몬드도 당황한 듯 했다.
「그 검, 부서지기 직전이잖아. 이제 한 번만 더 치면 산산조각이 날 걸?」
아. 그런 건가.
자신의 승리가, 상대의 노쇠가 아닌, 장비 때문일 거라 생각하는 건가.
결국 이 남자는, 오만을 버리지 못한 건가.
"하, 맞는 말일세. 이제 이 검은 돌멩이에 맞아도 부서지고 말겠지."
손을 고쳐, 검을 거꾸로 쥔 몬드는, 그것을 바닥을 향해 꽂아 넣었다.
콰직!!
「뭘..! 주먹으로라도 싸우겠단 거냐?」
"뭐, 주먹질도 자신은 있네만, 자네가 하나 착각하고 있는 게 있네."
쩌적. 쩌저적.
검에 있던 수많은 균열들이, 서로를 연결하며 영토를 넓혀갔다.
이윽고, 모든 균열이 검을 뒤덮었고, 그것은 곧 조각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쨍그랑!
"..내가 언제, 검이 하나라고 했나?"
그 안에 숨겨진 또 다른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