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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화 〉과거는 늘, 현재를 따라다닌다 [4] (74/108)



〈 74화 〉과거는 늘, 현재를 따라다닌다 [4]

"이제야 좀 조용하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쟁통과 다름없었던 숲에서는, 이제 내 발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지금쯤 다른 등신들도 내가 말한 지점에 도착했겠지. 포위망의 뒤에서 가만히 거드름이나피우고 있는 멍청한놈들.

물론 그놈들의 명분은 포위망을 빠져나온 놈들의 격퇴겠지만, 애초에 그 정도의 전력이 처음부터 붙어있었다면 뚫릴일도없다.

요컨대, 깨질게 두려워서 두 겹 세 겹으로 감쌀 바에야,  처음  겹을 세 배의 두께로 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당신은 왜 걷고 있는 거지?"

내 옆을 걷고 있는 젠이 말했다.

"왜냐니, 여긴 빡빡이들이 별로 없으니까지."

"그 별로 없는 놈들을 제거하러 가는 게 이번 작전의 주 목표 아니었나?"

"그래. 그 '별로 없는 놈들'  별로 없다고."

"..무슨 말이지?"

하여튼 고문관 같은 새끼. 꿀을 빨라고 입에 물려줘도 이를  물고 뱉어요.

"그러니까, 마왕성 쪽으로 보낸 두놈 말고는 죄다 마을 쪽으로 보냈잖아? 너랑 나도 그  하나고."

"그래."

"마왕성  적은 딱 두놈인데, 마을 쪽은 이쪽이 머릿수가 더 많다고. 아직도 이해가 안 되냐?"

"아. 아아, 알겠어. 이쪽 머릿수가 더 많으니 협공을 하자는 거군. 우리가  별동대고."

시발. 말을 말자.

"그래서 쓸데없는 체력소모를 피하기 위해 걷는 건가? 전투도 죄다  꼬마한테 맡기고?"

꼬맹이가 이쪽을 쳐다봤다. 이 녀석이 하는 짓이니 별다른 의미는 없는 짓이겠지만, 마치 그게 사실이냐고 물어보는 것만 같았다.

"뭐, 그건 알아서 생각하고. 그렇게 별동대가 하고 싶으면 몬드 할배나 도와주러 가던가. 그 할배,  상태를 보니 말이 아니던데, 싸우는 중에 박살나면 어쩌려고 그렇게 막 쓰는지 몰라."

 그래도 어쩌겠는가, 마왕성 쪽엔 저놈들의 본대가 있는데  놈들을 보내야지. 솔직히, 검이 박살난 할배와 싸운다 해도, 나는 질 자신이 있다.

"뭐야, 당신. 그걸 알고 노장을 그쪽으로 보낸 거 아니었나?"

"또 뭘 알아? 생각보다 인간은 멍청한 동물이거든? 부담스러우니까 자꾸 니 좆대로 내 엉성한 계획을 평가하지 말라고."

"당신이 본, 그 박살나기 직전의 대검이 바로 그 검의 검집이란 거다. 하긴, 그걸 본 사람은 몇 되지 않지. 그건 평화라는 거창한대의를 위한 검이 아니라.."

"노장 본인을 위한 검이니까."

~

촤악!

옆구리를 베였다. 이번에도 상대는 간발의 차로 자신의 공격을 회피한다. 어느샌가 잔상처가 몸 곳곳에 생겨났다.

그 검은, 이질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대검이라기엔 날의 크기와 길이가 작았고, 한손검이라기엔  한 합의 무게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그런 괴상한 물건을, 이제는 육체의 전성기도 한참은 지났을 노인이, 자신을 상대로 완벽한 우위를 점한 채, 마치 손발처럼 완벽하게 다루고 있었다.

「크윽! 이 영감탱이가..!」

대각 방향. 위에서 아래로.  침략자는 아직까지도 위력만을생각한 공격을 해오고 있다. 보란 듯이 검의 표면을 긁으며, 이번에는 허벅지를 받아간다.

「으윽...! 하아아압!!!」

균형을 잃은 남자의 무릎이 땅을 향하는가 싶더니, 거센 기합소리와 함께 다시  번 지면에 발을 디뎠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저 다리는 더 이상 쓰지 못 한다. 아까와 같은 속도는 내지 못 할 것이다. 남은 건 검으로 결판을 짓는 일 뿐.

「흐.. 정말 강하구만 당신.」

"자네의 검도 굉장했다네. 내가 아직 대검을 들고 싸웠다면, 미처  피해내지 못했겠지."

「다리가 이 모양이 됐으니, 이제 주도권은 당신이 가졌군. 어디에서든 와보라고.」

움직일 수도 없고, 어디에서 올지도 모르는 공격을 받아내야 하는 데도, 그 얼굴은, 전혀 궁지에 몰린 자의 것이 아니었다.

"훗."

노인도 의미심장한미소를 지은 뒤, 검을 고쳐 쥐었다.

오랫동안,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상대의 호흡, 시선, 근육의 떨림.  모든 것을 시야에 넣고, 확인한 끝에, 노인은 달려갔다.

 검사의 검이, 빛을 내며 공명했다.

~

숲이 끝나는 지점. 정확히는 마왕성으로 향하는 절벽이 시작되는 지점. 저격수의 자취를 따라 시트린이 도착한 곳은, 풀밖에 존재하지 않는 평지였다.

빨리 저격수를 찾아야만 한다. 자신이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몬드는 원거리 지원을 등에 업은 검사와 싸우고 있을 것이다.

소리가 들린 곳은 분명 여기였다.

누군가가 오는 걸 눈치 채고 장소를 바꾼 건가? 이 어둠속에서 일일이 찾고 있을 틈은 없는데..!

'그래 맞아..!'

시트린은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저격수는 저  어딘가에 있다. 그리고이 검은  숲들을 먼지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평소에 자주 쓸 일이 없는 탓에, 이 체력이 빨려나가는 느낌은 익숙하지 않지만, 지금은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다.

그녀는 곧바로 검을 뽑아들고는, 정면의 나무를 향해 내질렀다.

쾅!!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고, 나무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이걸  번 더 하면..'

푹ㅡ!

"!!!"

왼쪽 어깨가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멋대로틀어졌다. 그리고 낯익은 형태의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화살.'

어깨에 박힌 각도로 봐선, 자신이 검을 내지른, 방금 막 초토화가 됐을 숲의 방향으로부터 날아왔다.

소리야 나무들이 쓰러지는 소리에 묻혔다고 볼 수 있지만, 그 흙먼지 속에서, 이토록 정확한 저격이 가능한 건가?

파직!

"으윽..!"

시트린은 화살을 부러뜨려 시야를 가리는 일이 없도록 했다. 화살이 소리도 없이 날아오는 이상, 중요한  첫째도 둘째도 시야뿐이었다.

'빨리 먼지가 걷혀야..'

피슝ㅡ!

팅!

다른 방향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소리가 또렷했기 때문에, 어렵잖게 막아낼 수 있었다.

"거기냐!!"

쾅!

먼지가 걷히기 전에, 또 다른 먼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저격수가 피격당했다면 최고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이점은 있다. 더 이상 저 두 곳을 저격 지점으로 사용할  없다는 것이다.

남은 지점들의 경계를 계속하고, 없애간다면, 자신이  유리해지는 평지로, 저격수를 끌어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화살을  피해야 되겠지만, 지금 상황에선 이것보다 나은 방법은 없다.

'자, 다음은 어디지?'

다음 화살 소리를 기다리며, 청각에 의존해 남은 지점의 경계를 계속하고 있던 그때.

파바바박!!

있을 수 없는 곳에서의 공격이 날아왔다.

~

"나디아. 설마 니가 벌인 개짓거린 아니겠지?"

무너진 성채의 잔해들 속에서 태연하게 나타난 하얀 머리의 남자는, 자신을 둘러싼 무리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죽은 척은 누굴 속이려고 하는 거지? 아, 확실히 이런 못생긴 놈들은 400년 전에도 본 적이 없군."

「야, 야. 가만히 듣고만 있는데 왜 때려? 우리도 이렇게 생기고 싶어서 생긴 게 아니라고.」

절벽 끝에 앉아있던 남자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어깨에 걸친 창을 건들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아니. 대머리인 시점에서 네놈은 이미 글렀다."

「이거 대머리 아니거든? 스킨헤드거든? 마음만 먹으면 기를 수 있거든?」

창을 든 남자는 증거로 보여줄 솜털이라도 찾아내기위해, 열심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쾅! 쾅! 쾅!

절벽 아래에선 땅과 나무가 무너지는 소리, 비명과 절규, 생명이 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란은, 아마도 네놈들 때문이겠지."

「음.. 뭐 맞는 말이긴 해.」

"이미 저걸 막는 건 힘들어 보이니, 네놈들을 전부 죽이기 전에 특별히 물어봐주마. 이 짓거리를 벌인 이유를."

「아, 물어봐줘서 고마워. 사실 우리가 조각이 좀 필요해서, 그걸 좀 얻으려고 왔거든? 그런데 저쪽 분들이 다짜고짜 우릴 공격하네. 우리가 먼저 공격당했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네놈들이 무슨 권리로 조각을 가져가겠다는 거지?"

남자의 얼굴이 점점 험악해졌다.

누구라도 이런 개소리를 들으면 화가 난다. 하물며 그들은, 남자가 가장 싫어하는 짓을, 면전에서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음.. 생각해보니 그러네. 근데 그것까지 설명하기엔 우리가  급하거든. 보아하니 너도 조각 하나 정도는가진 것처럼 보이는데, 그냥 넘겨주지 않을래?」

"거절한다."

푹ㅡ!

"..!"

흰머리의 남자가 뒤로  걸음 밀려났다. 창을  남자는 경멸스러운 눈을  채,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놓고 찔러도 칼도 못 뽑는 병신이. 누가 누굴 죽여? 토막 나기 싫으면 빨리 조각이나 내놔.」

창을 든 남자는 심장을 관통한 창을 더욱 깊숙이 쑤셔 넣으며, 남자를 비웃었다.

텁.

하나뿐인 그의 팔이, 힘없이 창을 움켜쥐었다. 떨구어진 고개에서 거친 숨이 새어나왔다.

"후우.. 아깝군.. 심장이 아니라 목을 쳤으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었을 텐데. 기회도 못 잡는 병신이란 건, 네놈을 두고 하는 말이군."

「아, 병신이라고 해서 화난 거야? 미안, 미안. 주변에 도와줄 사람도 없는데 센 척하는 게 너무 역겨워서 그랬어. 그렇게 뒤지는 게 소원이라면 지금 죽여줄게.」

남자는 창을 빼내기 위해 자루를 당겼다.

「..! 뭐야, 이거  안 빠져?!」

허나, 그 창이자신의 품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심장을 꿰뚫리고 죽어가고 있을 터인 남자의 손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고 많은 급소 중에 여길 노리다니,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똑똑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창을 막고 있는 남자의 손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났다. 푸른빛으로 일렁이는 그 불꽃은, 순식간에 몸집을 키우고 창을 집어삼켰다.

남자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 불이 옮겨 붙는 것을 막았지만, 자신이 애용하던 무기가 녹아내리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순간, 남자는 깨달았다.

불꽃의 근원이, 그의 손이 아닌, 심장이었음을.

"내가 분명 말했었지.."

온 몸으로 번진 불꽃을 털어내며, 남자는 자신의 검에 손을 얹었다.

호흡이 힘들어질 정도의살기가 공간을 압도했다. 그들이   있는 것이라곤, 남자의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마침내 남자의 입이 움직였고, 그들은 본능적으로 무기를 움켜쥐었다.

"..네놈들은 전부 여기서 죽는다고."

죽음이, 그들을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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