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과거는 늘, 현재를 따라다닌다 [5]
파바바박!!
방심은 하지 않았다. 귀는 어렴풋이 들리는 발자국 소리를 쫓고 있었다. 다음 공격은, 어찌됐든 저 방향에서 올 것이 확실했다.
뚝. 뚝.
어깨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손끝을 타고 흘렀다.
어깨뿐만이 아니다. 등과 다리, 팔. 평범한 인간이라면 기절을 하고도 남을 양의 화살이, 그 몸에 고스란히 꽂혀 있었다.
"끄윽..!"
그녀는 오로지 정신력만으로 의식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 육체에는 이미 수용량을 초과한 고통이 가해지고 있었다.
'생각해라, 시트린.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몬드 아저씨가, 그 뒤로는 다른 손님들이 당할 뿐이야. 빨리 뭐라도 생각해!'
「한 번 더 조각의 힘을 사용하시면 기절로는 안 끝날 거예요, 아가씨.」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어딘가'를 산출해 내기엔, 그녀의 의식은 너무나도 작고, 희미했다.
「이제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네요. 저도 이렇게 당신을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답니다. 쓸데없는 피를 보지 않도록 장로님께서 당부하셨거든요.」
의식이 흐릿한 탓에 중간중간 놓치는 말도 많았지만, 상대가 여성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뭐..라는, 거야.."
「역시 들을 마음이 드셨군요! 당신이라면 그럴 줄 알았어요.」
「이야기는 간단해요. 그 검을 저에게 넘겨주시겠어요? 그럼 죽지 않게 응급처치를 해 드릴게요. 이것도 저니까 해드리는 거라구요. 다른 분들을 만나셨다면 한 번 거절한 시점에서 이미 죽였을 걸요?」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말들을 지나치는 사이에, 자욱했던 먼지들이 걷혀졌다. 그녀의 눈에는, 자신의 키만 한 장궁을 겨누고 있는, 파란 피부의 여성이 비춰지고 있었다.
「빨리 고르시는 게 좋아요. 제 시간도, 당신의 시간도, 많지는 않거든요.」
"...ㅏ"
「네? 뭐라고요?」
시트린은 찾고 있었다. 자신의 대답과, 감정을 함께 전해줄 말을. 이런 상황에서 흔히 쓰는 말을, 어딘가에서 들은 그 말을. 그래.. 분명 이런 말이었다.
"좆.. 까..!"
상대가 동요하는 듯 했다. 이토록 완강한 거부의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주춤할 것이다.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빨리 검을 들어서 저쪽으로..!
피슝ㅡ!
팍!!
가슴팍에 정확히 명중한 화살과 함께, 그 몸은 힘을 잃어갔다.
.
.
.
'알겠니, 시트린? 강한 사람이란 건, 마지막까지 버티는 사람이란다.'
이건..
'천 명의 사람이, 만 명의 사람이 틀렸다고 손가락질 쳐도, 니가 그걸 믿는다면, 끝까지 버티거라. 손가락질이 박수로 변할 때까지, 박수가 환호로 변할 때까지. 어느샌가 니 곁에는, 천 명의 동료가, 만 명의 동료가 모여 있을 거란다.'
선..생님..
언제나 자신의 곁에서 환호해준 사람. 마지막까지 자신을 믿어주었던 사람.
마을의 문제아였던 자신을, 용사로 만들어 준 사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태초의 기억들이, 주마등이 되어 스쳐지나갔다.
.
.
.
콰직!!
그 손은, 부여잡은 검을 놓지 않는다.
그 다리는, 무릎 꿇지 않는다.
그 몸은, 꺾이지 않는다.
"불굴..!"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읊조리던, 마법과도 같은 말을 내뱉으며, 시트린은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적이 똑똑히 보인다. 손과 발이 움직인다.
죽기 직전의 몸이 이렇게까지 움직일 수 있는 건, 기적에 가까운 정신적 고양의 힘이겠지만, 그 힘으로 육신을 붙들고 있는 건,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그 조각에 숨겨진 힘이 더 있었나 보군요.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게, 이번엔 확실하게 보내드리지요.」
그렇게 말한 상대는, 뒤로 도약하며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 찰나의 순간, 희미한 빛줄기가 허공의 무언가에 반사되는 것이 보였다.
'저건.. 줄..?'
의식을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줄. 그 희미한 줄이, 자신이 서있는 평지를 제외한 온 숲에 빼곡하게 쳐져 있었다.
'설마..?'
시트린은 자신이 쓰러뜨렸던 나무들을 향해 달려갔다.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실어주듯, 매서운 화살들이 빗발치며 날아왔다.
그녀는 피하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아마도 자신이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건 앞으로 한 번, 그 한 번에 상대를 쓰러뜨려야 한다.
"으윽..!"
숲 속에 진입한 시트린은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억지로 쥐어짜낸 활기는,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소진되고 있었다.
'빨리 그걸 찾아야..'
덜걱.
있었다.
그녀가 예상했던 물건이.
나무에 묶어둔 줄이 끊어지면서 발사되는, 간단하면서도 치명적인 함정.
어둠과 먼지에 가려져 투사체는 보이지 않고, 나무가 넘어지는 소리에 발사음도 가려지는, 이 전장에서 가장 유용한 무기.
평지를 조준하고 있는 이것을 피해 숲속으로 달아나도, 이곳은 엄폐물 투성이인 저격수의 전장. 어딜 가나 상대에게 유리한 전장인 건 변함이 없다.
「눈치 채 버렸군요. 아직 남아있는 게 많은데. 하지만 아무래도 좋아요. 당신을 여기로 유인하는데 성공했으니까.」
상대는 일부러 큰 목소리를 내, 숲 전체에 자신의 목소리가 울리게 했다. 자신의 위치를 특정하지 못하게 하려는 거겠지.
그 뒤로 한참의 적막이 흘렀다. 선공권이 있을 리가 만무한 시트린은, 어디서 날아올지도 모르는 공격을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피슝ㅡ!
오른쪽.
오른쪽.
정면.
그러나 그 상대는, 대륙 내에서도 가장 강한 자들에게만 소속을 허락하는, 마왕 토벌대의 일원.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화살에 대처할 방법은 없지만, 그 중에 하나라도 해당 된다면, 대처할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다.
시간이 없다고 한 것이 사실이었는지, 상대의 공격에서는 점점 조바심이 느껴져 왔다.
마찬가지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트린은, 그 공격들을 회피하며, 생각을 하는 데에 그것을 할애하기로 했다.
기회는 한 번,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상대를 명중시켜야 한다.
'시오라면, 오로넬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평소에도 생각이라는 걸 잘 하지 않았던 그녀는, 자신의 지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지혜를 빌리기로 했다.
-가위 바위 보!
'아, 또 졌잖아. 왜 맨날 나만 지는 거야? 너희 둘이 짜고 친 거지!? 내가 모를 것 같아?'
두 사람의 얼굴이 안내한 것은, 정말로 이런 게 도움이 될까 싶을 정도로 어이없는 기억. 쓰라린 패배의 기억이었다.
'니가 맨날 묵만 내니까 지지, 등신아. 같은 짓도 세 번 이상하면 습관이라고, 습관. 고쳐지면 그게 습관이겠냐?'
..!
그래, 그거다.
답을 얻은 시트린은, 상대의 모든 행동들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공격이 날아오는 방향과 시간, 조준의 흐틀림, 그리고 그 화살의 세기까지.
제어를 잃어가는 몸을 간신이 붙들고, 그녀는 마침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의 적을 찾아내었다.
쾅!!
또 다시 산의 일부가 사라졌다.
흙먼지가 일고, 나무들이 쓰러졌지만, 더 이상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다.
먼지가 걷히고, 훤하게 뚫린 숲속에는, 주인을 잃은 장궁과, 파란 액체를 흘리고 있는 저격수가 쓰러져 있었다.
풀려버린 다리를 검으로 지탱하며, 시트린은 그곳으로 향했다.
「어..떻게..」
"친구가 알려줬어."
화살 세 발이 날아온 뒤에는 1, 2초의 공백이 생긴다는 것과, 그 공백 뒤에는 반드시 멈춰 서서 활을 쏜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움직임이, 시계방향과 반시계방향을 번갈아가며 사용하는 것 까지.
시트린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구태여 적에게 그것을 알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더 이상 일어서 있을 힘도 없었다.
「정, 말. 끝까지 당신이란 인간은.. 이해 할 수 없군요..」
"응급처치 도구, 쓴다?"
상대는 바닥에 떨어진 도구가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거기에 남아있는 도구만으로도 그녀를 몇 번이나 죽일 수 있을 텐데, 안타깝게도 자신의 손은 바로 옆에 있는 활을 쥐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저한텐 이제.. 필요 없.. 는..」
저격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시트린은 검을 집어넣지도 않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응급처치 도구를 찾아 헤매었다.
털썩.
숲에는 적막이 찾아왔다.
~
그 숲의 바로 아래. 두 검사들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몇 십이나 되는 합을 주고받고 있었다.
기둥만한 대검으로 한손검의 속도를 따라가는 남자. 한손검의 무게로 기둥만한 대검의 힘을 상쇄시키는 노인.
그 싸움의 여파로, 주변의 나무가 흔들리고, 땅이 무너져갔다.
남자의 몸에는 잔 상처들이, 노인의 몸에는 대검과 맞부딪힌 반동이 쌓여갔다.
그것은 미약한 점에 불과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싸움이 길어지고, 거세질수록, 그 존재를 과시하며 몸집을 키워나갔고, 마침내 그들을 집어 삼킬 수 있을 만큼 성장하는데 이르렀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언제 자신을 집어 삼킬 지를.
이 공방이 끝나면, 그 모든 고통이 한 번에 엄습해 올 것임을.
「당신도 알고 있지! 이걸 멈추는 순간 우리 둘 다 뻗을 거라고!」
"그래서 이렇게 성의 없는 공격들을 반복하는 건가?"
「그러니까 아직 당신이 서 있을 수 있는 거지! 당신이 계속 공격했다면 우리 둘 다 진작에 뻗었어!」
웃기지도 않는 남자다. 애초에 자신이 계속 공격을 감행했다면, 누군가 한 명이 먼저 쓰러졌을 거란 생각을 해 본다.
괜히 시간을 끈 탓에 두 사람 다 위험해 졌지만, 의미 없는 공격만을 계속하던 남자와는 다르게, 노인에게는 확실한 전략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하나 제안이 있는데 어때? 이 끝나지 않는 싸움을 어떻게 해 보자고!」
"들어는 보겠네."
「이걸 멈추면, 우리 둘 다 쓰러진다고 했지? 그러니까 시험해 보자고. 정말로 둘 다 뻗을지, 누군가는 버틸지 말이야. 둘 다 뻗으면 다시 일어나서 싸우면 되는 거고, 누군가 버틴다면, 뻗어 있는 놈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겠지. 어때?」
"계속 이렇게 있는 것 보단 나아 보이는군. 알겠네, 협조하지."
「좋아. '하나, 둘, 셋' 하면 뒤로 뛰라고. 알겠지? 자, 하나.. 둘.. 셋!」
남자와 노인은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검을 휘두르던 팔이 멈추자, 공기를 빼내듯이 거친 숨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 숨을 다 뱉어내기도 전에, 고통이 엄습해왔다.
온 몸이 뜨거웠다. 상처에서 새어나온 피들이, 마치 용암을 부운 것처럼 살을 태우는 듯 했다. 두 다리는 지면에 무릎을 꿇은 지 오래다. 바닥으로 쓰러지려는 몸을, 검을 붙잡고 있는 팔이 간신히 유지해주고 있었다.
차라리 쓰러지고 싶었다.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노인은 쓰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보다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바닥에 내팽겨 쳐져있는 검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해야 할 일은 정해졌다.
남자는, 피로 물든 몸을 일으키고, 검을 뽑아들었다.
툭.
검이 미끄러지듯 손에서 흘러내렸다.
손이 떨린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거대한 암석에 몇 번은 치인 것만 같다. 검을 다시 쥐고 싶지만, 허리가 굽혀지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입 밖으로 새어나온다.
쓰러질 순 없다. 쓰러져서는 안 된다.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한다.
굽혀지지 않는 허리 대신, 무릎을 굽혔다. 관절 하나하나가 비명을 내질렀다.
검에 몸을 지탱한 채, 가까스로 다리를 일으켜 세운다.
맞은편에서는, 남아있는 모든 것을 불태우며 맹렬하게 달려오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것이 마지막 한 방일 것이라 직감한 노인은, 삐걱거리는 관절을 움직여 받아칠 자세를 취했다.
이겼다. 이번에야말로 명중이다.
어차피 저 몸으로는 더 이상 피할 방법도 없겠지만, 상대는 어리석게도, 방어가 아닌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명복은 빌어줄게!! 즐거웠다고 당신!!」
그 외침을 신호로, 두 검은 서로를 집어삼킬 듯이 맞부딪혔다.
쨍그랑!
상대의 최후에 어울리는 멋진 소리였다. 자신의 검이 베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도 분전은 했지만, 결국에 이기는 건 강한 자란 거다.
오랜만에 피 튀는 싸움을 경험하게 해준, 상대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남자는 고통 없는 죽음을 선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텅 빈 칼자루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
자신의 몸을 꿰뚫고 있는 검을 보고서도, 남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깨달지 못했다.
깨져있어야 할 노인의 검에는 흠집조차 없었고, 그를 베었어야 할 자신의 검은, 자루만 남은 채, 그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 거..ㄴ..?」
"내가 자네였다면, '성의 없는 공격'을 간파당한 순간, 몸이나 무기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 했을 걸세. 뻔히 피할 수 있는 공격을 받아 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지."
아, 그런가.. 이 자는 그때부터..
그때부터 난 이미 진 건가..
몸속에 박혀있던 무언가가 빠져나가며, 그 주위를 맴돌던 혈액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려지고, 소리는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대련, 즐거웠네."
촤악!
이윽고 모든 것이 검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