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7화 〉과거는 늘, 현재를 따라다닌다 [7] (77/108)



〈 77화 〉과거는 늘, 현재를 따라다닌다 [7]

「허억!!」

지크에게 베인 순간, 피넛은 악몽에서 깨어나듯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 눈앞에 비치는 건, 자신과 검을 맞대고 있는 흰 머리의 남자와, 주변에 쓰러져 있는 부하들의 모습이었다.

"꿈속에서의 승부는 어땠지? 날 쓰러뜨렸나? 아니. 그렇게는 보이지 않는 얼굴이군."

지크가 검을 밀어붙였다. 피넛은 그제서야 현실이라는 것을 실감했고, 본능적으로 밀려났던 검을 다시 앞으로 밀어냈다.

'뭘 한 거지..? 이 남자의 조각은,  불꽃 아니었나?'

"궁금한  많아 보이는군. 다시  번 보내줄 수도 있다만?"

「닥쳐라!」

상대가 휘두르는 검을 손쉽게 피하며, 지크는 뒤로 물러났다. 지금 이 남자를 죽이기엔,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어제 밤부터 조금 전까지, 지크는 마왕성의 정기 재무 조사보고서를 받아, 그것을 확인하고 있었을 뿐이다.

주변이 이상하리만큼 어두운 것도, 아래쪽의 소란도, 이 파란 피부의 침략자들에 대해서도, 그는 무엇 하나 알고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에게는  상황에 대한 설명이, 조금이라도 필요했다.

"네놈들은 뭐지?"

「너희들보다 먼저,  땅에 뿌리를 내린 자들이다.」

도움이 되지 않는 대답이다.

"이 어두운 하늘도 네놈들이  짓인가? 분명 저녁때는 아니었는데."

「태양과 달이 서로를 가릴 때. 우리가 이 세계에 간섭할 수 있는  그때뿐이다.」

이것도 필요 없는 대답이다.

"뭘 위해 조각을 모으는 거지?"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스무고개는 끝이다.」

코웃음을 치며, 피넛은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환각의 중간까지, 남자를 몰아붙였던 감각은 남아있다. 그 기억을 토대로, 이번에는 반격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매서운 공격을 이어갔다.

하지만 남자는, 그때보다 여유로워 보였다. 검을 맞대지도 않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그것을 피하며, 마치 어린아이를 상대하듯 자신을 농락하고 있었다.

"대답해라.  위해 조각을 모으는 거지?"

지크는, 계속해서  질문을 반복했다. 닿지도 않는 검을 열심히도 내지르는 상대의 모습은,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니가 알 바 아니다!」

어차피 피할 거라 여긴 건지, 자각이 없는 건지, 상대는 빈틈투성이인 크고 대담한 공격을 내질렀다. 물론 지크는, 그것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캉!

왼손에 쥐어진 검이 어깨너머로 날아갔다. 피넛은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오른손에 쥔 검만으로 공세를 이어갔다.

"50개나 되는 조각을 모두 모아서 어쩔 생각이지? 신과 전쟁이라도 벌일 셈인가?"

「하. 설마. 그놈들하고는 이미 한  붙어봤다고.」

"그것 말고는 그만한 힘을 모아서 할 게 있나 싶군."

검과 검이 부딪힐 때마다, 쇳조각이 흩날렸다.  교착상태가 곧 끝날 것을, 두 사람은 직감했다.

「우리는 그놈들에게 졌지만, 그분은 다르다. 도리안님. 우리의 신, 이 세계의진짜 주인. 우리는 그 분을, 다시 그곳으로 돌려보내 드릴 것이다.」

쩌적.

"당사자의 의사는 묻지도 않는 건가?  신이란 작자가 행방불명 된지  천 년은 지났을 텐데."

..!

「너.. 뭐하는 놈이냐.」

그의 얼굴에는 동요, 혹은 분노, 그 사이에 있는 어떤 감정이 나타나고 있었다.

"행방불명인 자를 어떻게 돌려보낸다는 거지? 아. 그래. 네놈들은.. 네놈들은 상관이 없는 거군."

쩌적 쩌적.

"그저 네놈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신을, 만들려는 것뿐이야."

「이..!」

쨍그랑!

목숨을 맡기고 있던 쇠붙이에 한계가 찾아왔다. 종잇조각처럼 찢어지는 자신의 검과, 멈추지 않고 다가오는 남자의 검이 보였다.

살이 찢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몸이 기울어진다.  몸을 지탱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은,  이상 남아있지 않다.

뿜어져 나오던 피는, 어느새 파도처럼 자신의 얼굴을 향해 덮쳐왔다.

털썩.

남자가 쓰러진 것을 확인한 뒤, 지크는 검을 집어넣고, 더러워진 겉옷을 털었다.

"멍청한 놈들. 바로 눈앞에 찾던 것이 있는데, 닿지도 않을 것에 손을 뻗는군."

절벽 위에는, 이제 한 사람만이 서 있을 뿐이다. 고고하게 솟아있던 성도, 그곳을 점거하고 있던 무리들도 없다.

남자는 한숨을 쉬며, 잔해들 속에 숨어있는 검은 머리의 남자를 붙잡아, 유유히 절벽 아래로 사라졌다.

~

ㅡ!!

조지는 또 한 번 괴수의 이빨을 피해갔다. 포멜로가 예상했던 것 보다, 그와  사이의 유대는 단단했다.

ㅡ!!

늑대의 어금니가 포멜로를향해 번뜩였다.

이번에는 괴수가 몸을 틀어, 그의 목숨을 구해낸다.

「이것 봐라? 호흡이 꽤 잘 맞잖아, 너희들?」

칭찬을 받아야 할 건, 그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신이었다. 세 마리와  명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며, 반격까지 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악! 스쳤어! 아, 따가워. 로드, 호~ 해줘."

안장에서 내려온 남자가, 말의 안면을 향해 자신의 팔을 내밀었다. 말은 콧김을 내뿜어 대답을 대신했다.

「저기, 일단 우리 싸우고 있거든? 더러운 것 좀 보여주지 말아 줄래?」

"아픈걸 어떡하라고요! 창으로 찌르지나 말던가!"

「내, 내가 잘못한 거야? 말이랑 꽁냥대는 니 잘못이 아니라?」

"꽁냥대게 한 당신 잘못이죠! 아잇, 못 해 먹겠네!"

조지는 쥐고 있던 검을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나무들에 부딪혀울렸다.

「아, 자, 잠깐만, 우리 진정하자. 일단 진정하고  말 좀 들어봐 응?」

"애초에 당신이랑 우리가왜 싸워야 하는 거죠? 저도 동물 좋아하는데요? 설마 진심으로 대가리라고  것 때문에 화난 건 아니죠?"

포멜로의 머리는 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차갑게 식었다. 그래. 여기서 진지해지면 속 좁은 놈이 되는 거다. 상대도 무기를 버린 데다가, 이 정도의 거리다. 설사 저게 연기라 해도, 자신이 공격 받을 리는 없을 거다.

「아, 아니 그러니까.. 어, 그래 조각. 난 조각 때문에 온 거야. 조각만 넘겨주면 싸울 필요도 없지. 암. 그래. 나도 사실 싸우기 싫었어.」

다시 창을 수납하고, 손바닥을 내비치며 적의가 없음을 알리는 포멜로였다.

"우린 조각 없는데?"

「아니 아니 아니, 그건 아니지.  늑대. 늑대가 어떻게 말을 해? 누가 봐도 조각이잖아.」

"네? 저요? 그치만,  몸에  숨길 곳이 어디 있다구요? 저 원래부터 말 잘했어요."

"그러니까."

「뱃속에 있거나, 입안에 숨겨놨거나..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볼  조각 맞는 것 같거든? 우리 빨리 끝내고 친하게 지내자. 응?」

"음..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뭔가 이상했다. 아까와는 다른 위화감이 느껴졌다. 역시 연기인가? 알 수가 없었다. 여기서 쓸데없는 연기로 시간을 끈다 한들, 남자의 아군들은 모두 다른 동료들에게 가로막혀 있을 것이다.

원군을 기다리는 것도, 하물며 자신이 공격하기 위함도 아니라면, 무얼 위한 시간 벌기지?

「잠..!」

레이가 앞발을 휘두르며 몸을 틀었다. 갑작스런 회전에 몸이 제멋대로 흔들렸다.

흔들림이 멈추고, 그의 눈앞에는 비친 것은, 칠흑처럼 새카만 발굽. 그것이 자신의 얼굴을 향해, 뻗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히히이이잉ㅡ!!!

괴수의 발톱을 피해 도약한 킬은, 포멜로의 안면을 짓밟으며, 바닥으로 착지했다.

쿵!

전신에서 울리는 뼈 소리가 자신의 몸 상태를 알려왔다. 허나, 그 신호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그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잠시라도 적을 믿었던 자신의 아둔함, 자신을 철저하게 모욕한 상대에 대한 증오. 오직 그것만이 그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너희도 필요 없어.」

-휘ㅡ익!!

휘파람 소리가 숲속을 울렸다. 어둠속에서, 붉은 눈동자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째 더 망한 것 같은데? 이거 맞냐, 라보?"

"음....."

남자의주변에는, 눈앞의 괴수에 준하는 개체들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모여들어 있었다.

「죽여라!!! 하나도 남기지 말고 먹어치워!!!」

ㅡ!!!!

사나운 포효를 내지르며, 그것들은 일제히 진격했다. 조지는 아무렇지 않게 검을 줍고, 다시 킬의 안장 위로 올라갔다.

"라보."

늑대는 자신과 눈을 마주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뒷발을 늘어뜨린 뒤, 그 숨을 뱉어낸다.

-아우우우ㅡ!!!!

하울링.

조각의 힘으로 몇 배는 증대된 그 소리가,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위협, 경고.

자신의 영역에서 사라지라는, 포식자의 최후통첩.

포멜로의 채찍을  순간부터, 조지는 알고 있었다.

저들의 관계가, 공포에 묶여 있는 주종관계에 지나지 않음을.

공포에 길들여진 동물은,  공포가 자신의 한계를 넘었을 때, 주인의 통제를 벗어난다.

그리고 생존을 위한 본능이, 그들의 새로운 주인이 된다.

「빨리 가라고!!  쓸모없는 새끼들아!! 이런 씨발!!」

오직 레이만이, 그의 통제를 따르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직, 그 채찍보다 두려운 것은 없었다.

「레이! 간다! 다 찢어버려!!」

주인이 창을 꺼내들었다. 맞은편에선 검을  남자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ㅡ!!!!

채찍에 대한 두려움을 포효로 분출한 뒤, 레이는 달려 나갔다. 칠흑색의 털과, 붉은 눈을 가진 말을 향해.

말은, 겁이 많은 동물이다.

박수소리에 놀라는 건 일상다반사에, 자신보다 훨씬 작은쥐에게도 겁을 먹는다.

하지만, 충분한 교감을 쌓은 기수가 함께라면, 그 겁쟁이는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동물로 변한다.

자신의 등을 맡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기에, 겁쟁이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 수도, 자신보다 몇 배는 큰 상대에게도 달려들 수 있었다.

레이는 수도 없이 봐왔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수많은 말들과 기수를.

통일 되었던 정신은, 누군가의 망설임으로 인해 무너지고, 그 무너짐은 두려움이 되어, 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 눈이 다른 곳을 향하지도, 그 발을 헛디디는 일도 없이, 자신을 향해 붉은 안광을 내뿜으며, 거친 숨을 내쉬며, 망설임 없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눈에 압도된다.  발소리에 위축된다.

숨이 가빠졌다. 다리가 무거워졌다.

그리고  작은 변화는, 주인을 죽음으로 몰고 가기에 충분했다.

촤악!!

등이 가벼워졌다.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레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그것이, 그의 새로운 주인이 내린 명령이었다.

「이.. 새,끼들..!」

남자는 아직도 핏발을 곤두세운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조지는 킬의 등에서 내려와, 그곳으로 향했다.

「그딴 수로 이기고 아주 잠도  오겠구나, 이 비겁한 새끼들..!」

죽는 순간 까지도 저주의 말을 퍼붓는 속이 좁은 남자다.

"이긴 게 아니라 죽인 거지. 말은 똑바로 하자, 우리."

「으으으으..!!!!」

남자를 희롱하며, 조지는 어떤 물건을, 그 품에서 낚아챘다.

"이딴 걸 쓰면서 조련이라고 지껄이는 놈들을,  한 놈도 살려둘 생각이 없다. 이 쓰레기 같은 놈아."

남자는 홀로 남았다.

그가 조련했다던 수많은 동물들은,  곁에 없었다.

반으로 잘린 채찍과,싸늘한 바람만이, 그 옆을 지나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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