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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화 〉과거는 늘, 현재를 따라다닌다 [8] (78/108)



〈 78화 〉과거는 늘, 현재를 따라다닌다 [8]

「장로님.」

스승과 제자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태껏 자신들의 제안을 거부하고 전면전을 택한 자들은 없었다. 그러기 위한 위협사격이었을 터이다.

분명, 이쪽이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우위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래에 보이는 것은, 참담한 패배의 흔적들이었다.

「흐음....」

그것은 깊고도 긴 탄식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여러 감정들이 스쳐지나가고있었다.

「저들에게 잘못은 없다. 그들에게 우리는 침략자일 뿐. 저항하고 맞서는 건,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여기에 온 목적을 완수해야 한단다. 우리의 대의를 위해. 우리의 삶을 위해. 인간이란 본래 그런 것이야.」

「그렇다면 그를..」

「그래.. 피타야를, 내려보내거라.」

아득한 상공. 그 거대한 요새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

"시발.. 이딴 거랑 싸워야 된다고..?"

다른 등신들이 싸우는 동안, 한창 꿀을 빨고 있던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한 눈에 담아내기도 어려운, 집채만 한 거인이었다.

「.......」

다행히도, 거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바닥에 착지할 때의 자세 그대로, 몸을 웅크린 채 굳어있었다.

"오로넬, 이거."

"나도  있다."

꼬맹이는 자신의 몇 십, 몇 백배는 더  그것에 대해,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했다. 아무리 이놈이라도, 이걸 한 방에 죽이지는 못 할 텐데 말이다.

"시발, 그나저나.. 이거 진짜, 시발.  밖에 안 나오네."

눈앞의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수록, 내 의지는 확고해져갔다. 아무리 몸을 비틀고 머리를 쥐어짜내도, 이건 이길 수 없다.

"이럴 거면 그냥 떡대 몇 명이랑 싸웠지, 내가 뭐 하러 이딴 거랑.."

나는 몰랐다. 내가 넋두리를 늘어놓는 동안, 꼬맹이가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음을.

"야, 꼬맹아. 일단 뒤로 뺏다가.. 응? 이 새끼가 어딜 갔.."

그리고 내 눈이 포착한 것은, 등신 같은 꼬맹이가,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손을 뻗고 있는, 인생 최악의 순간이었다.

쿵!!

거인이 뒤로 쓰러졌다. 주변에 있던 나무들도 그것과함께 덩달아 우르르 쓰러졌다.

"야!! 이 미친 꼬맹이년아!!"

다른 건 상관없었다. 이 꼬맹이를 패고 싶었다. 그것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뻗어있는 거인의 앞에서, 꼬맹이의 머리를 쥐어박고 있었다.

"해치웠어."

이 정신 나간 애새끼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듯,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보일 뿐이었다.

「으어어어어..!」

"안 뒤졌잖아, 시발!"

거칠게 땅을 휩쓸며 몸을 일으키는 거인을 피해, 꼬맹이의 멱살을 붙잡고 있는 힘껏 달려갔다. 힘껏이라 해도, 아직 거인의 얼굴은 뚜렷하게 보이는 채다.

「다, 보여.」

!!!

거인의 손에 쥐어진 거목이, 빠른 속도로 머리 위를 지나갔다. 나름 나무들 사이에 잘 숨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몸을숨겼던 나무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시발, 진짜! 그러게 한 방에 죽이지도 못할 놈을 왜 치냐고, 이 망할 꼬맹이년아."

손바닥으로 꼬맹이의 얼굴을 압착시키며, 화풀이를 마저 했다.

"ㄱㄹㄷㅎㅗㅅ.."

꼬맹이는 찌부러진 입으로 열심히 자기변호를 했다.

「으어..!!!」

쾅! 쾅!

돌연히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거인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곳에 고목을 부딪히며, 끝내 그것을 부수고야 말았다.

나는, 그것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틈에, 손에서 벗어난 꼬맹이가, 정확해진 발음으로 다시 한 번 자기변호를 시도했다.

"그래도, 세게 쳤어."

"뭐?"

첨벙. 첨벙.

물이고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저건? 눈물?"

아니. 눈물이 아니었다. 그 파란 액체는, 눈보다 더 높은 곳에서, 거인의 머리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으어어어!!」

고통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지, 거인은 부서진 바닥을 몇 번이고 내려쳤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안정을 찾은 듯, 새 고목을 주워들었다.

이 미친 꼬맹이, 저 거인한테도 주먹이 먹히는 거냐. 머리통에 구멍이라도   같은데.

후.. 그래.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저 거인한테 유효한 공격수단이 있는 이상, 못 이길 것도 없다. 다만..

「우어어어!」

쿵!

이걸 죄다 피하면서, 머리통이 쪼개질 기세로 생각을 해내야만 한다. 그 유효한 공격을 명중시킬 방법을 말이다.

쿵! 쿵!

머리에 시동을 걸기도 전에, 거인이 연속으로 고목을 휘둘렀다. 저놈이 노리는 게 나였다면, 아마 지금쯤 저세상 사람이 됐을 거다.

쩌저적.

고목에 금이 갔다. 그 아래에서 주먹을 들어 올리고 있는 꼬맹이의 모습이 보였다.

쾅!!

폭발이라도 한 것처럼, 고목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쓰러져있는 나무의 뒤로 달려가, 몸을 숨겼다.

무기를 잃은 거인은, 다른 무기를 줍는다는 선택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먹을 들어 꼬맹이를 향해 내질렀다. 역시 복수는 자기 손으로 직접 하고 싶은 법인가 보다. 그 손이, 진짜 자기 손인 줄은 몰랐지만.

퉁! 퉁!

암석만 한 거인의 주먹과, 콩알만  꼬맹이의 주먹이 부딪히고 있는데도, 그 힘은 호각이었다. 아니, 꼬맹이 쪽이 조금 더 우세였다. 주먹이 마주하는 족족, 거인의 몸이 뒤로 밀려나고 있었으니까.

지금 저 거인놈의 눈에는, 꼬맹이의 모습만이 비춰지고 있다.

놈이 아직 나에게 관심이 없을 때, 아직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이때를 틈타 양공을 성공한다면, 저걸 죽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발목을 노릴까? 아니. 이 단검이 아무리 잘 든다 한들, 결국은 단검이다. 넘어질 정도로 깊게 베어낼 순 없을 거다.

다른 곳은, 다른 급소가 될 만한 곳은 없나?

..그래. 다른 곳은 없다. 있지만 공격할 없다. 시발. 멀쩡한 나무가 하나라도있었다면..!

역시 발목인가..? 발목뿐인가? 이 단검으로?

「뭘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것이냐!? 데이린이 혼자 싸우고 있지 않느냐!」

막대기..! 그래, 이 녀석이 있었다. 이 녀석 정도의 길이라면, 충분히 넘어질 정도의 상처를 낼 수 있다.

텁!

「ㅁ, 무슨..!」

이미 쓸데없는 머리를 굴리느라 충분히 시간을 허비했다. 막대기에게 뭔갈 설명할 틈은 없었다. 그대로 놈을 낚아챈 뒤, 나는 달려갔다.

퉁! 퉁!

처음엔 꼬맹이가 더 우세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역시 아래에서 위를 공격하는 것 보다, 위에서 찍어 누르는 것이  배는  공격 효율이 좋았다. 뒤로 밀려나던 거인의 팔은,  이상 밀려나지 않고 있었다.

시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텨라, 꼬맹아!

거인이 양손을 들어올렸다.

 새끼 설마..!

그 설마였다. 깍지를 낀 양손이, 꼬맹이의 몸을 향해 내려찍혔다. 꼬맹이도 양손을 들어 올려 그것을 막아보았지만, 곧바로 다음 공격이 올 뿐이었다.

저 몸이. 얼마나 단단한지는 모른다. 맨 주먹으론 돌을 부수고, 나무 위에서 떨어져도 흠집조차 나지 않는다. 그런 몸이라면, 분명 버틸 수 있을 거다.

그러니 믿어라. 꼬맹이가 벌어준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꼬맹이가 만들어준 기회를 붙잡아라. 내가 가야 하는 곳만을, 바라봐라.

쿵!!

데이린의 팔이 늘어졌다.

이렇게 무거운 공격을 받아본 건 처음이다. 이렇게 지쳐본 건 처음이다.

더 이상, 저 공격을 받아낼 힘이 없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늘 곁에 있던 오로넬은 없다. 멍청한 자신의 머리론, 무얼 해야 할지 조차  수 없었다.

거인의 주먹이, 다시 한  머리 위로 올라갔다.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는 오로넬의 모습이 보였다. 오로넬이 어딘가로 달려갈 때는, 언제나 그만한이유가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이곳에서 오로넬을 기다리는 것이다. 오로넬은 언제나 자신을 데리러 와 줬으니까. 괜히 돌아다니다 길이라도 잃으면, 혼나기만 할 뿐이다.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주먹이 내려오고 있었다. 데이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어쩌면 자신의 머리가 주먹보다 단단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쿵!!

주먹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역시 자신의 생각대로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자신의 머리를 가리고 있던 그늘이 사라지지 않았다. 거인의 주먹이 만들어내고 있는 그늘이라면, 자신의 머리가 이토록 자유롭게 움직여질 리가 없었다.

그리고 데이린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하나의 그림자와 마주했다.

"초면이지만, 당신에게는 경어를 쓸 마음이 전혀들지 않는군요, 거인 씨. 그 거대한 몸으로, 이 작고 귀여운 아이를.."

머리를 흩날리며, 금빛 안광을 뿜어내고 남자가, 거인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내 눈앞에서 아이를 때린 걸, 평생 후회하게해 주마!!!"

성난변태가 나타났다.

"제리스."

데이린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격정을 쏟아내고 있던 남자는, 그 한마디에 온화한 얼굴로 돌아와, 소녀의 얼굴과 마주했다.

"괜찮니, 데이린? 이제 이 사람의 상대는 내가할 테니, 얼른 오로넬 씨한테 돌아가."

"오로넬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래서 여기서 기다릴 거야.  잃으면 오로넬이  내."

"..그래. 그럼  동안은,  뒤에 있어."

몸이 가벼워졌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건 분명 조각의 힘이 아닌, 다른 무언가.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무언가가, 그 몸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떨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지킬 수 있었다.

남자는 소녀에게 미소를 지어보인 뒤, 다시 정면을 향했다.

「그 눈, 조각. 당장, 내놓아라!!」

눈앞의 거인은, 그의 조각에 반응하며, 곧바로 주먹을 내밀었다.

"니 힘을 먼저 가져가겠다."

그도 마찬가지로 주먹을 내밀었다.

그의 눈이,   번 빛났다.

그 시각. 오로넬은 들키지 않고 거인의 발목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이제 손에 쥔 엔드홀을 뽑아, 그 몸을 넘어뜨리는 일만 남았다.

「잠깐 기다려라! 지금 네놈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 있는 것이냐?」

"검을 검집에서 뽑을 뿐이다. 잠깐이면 되니까 닥치고 협조해."

「이몸이 말하는  그게 아니라..!」

텁!

엔드홀의 경고를 무시하고, 오로넬은 그 자루를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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