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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9화 〉과거는 늘, 현재를 따라다닌다 [9] (79/108)



〈 79화 〉과거는 늘, 현재를 따라다닌다 [9]

"음.. 좀 오래 걸리네. 혼자 마시고 있기도 그렇고.."


시오는 자리에 앉아, 텅  술잔을 굴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게에는 그녀 이외에도 몇 명의 손님이 더 있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남겨둔 최소전력들이 그들이었다. 지금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전력이 되지 않는 건 그녀 혼자뿐이었다.


"잠시 담배좀 피고 올게."


실내든 실외든, 평소에는 주저도 없이 불부터 붙이고 보는 시오였지만, 술도 마시지 못하는 술집에서 피우는 담배는 의미가 없다. 부족한 알코올을 바람으로 때우기 위해, 가게 밖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

「움직이지 마라. 너흰 이미 포위됐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시오는 침략자들의 무리와 마주했다.

"이거, 불만 붙일게."


수많은 무기들이 자신을 향해 겨눠져 있는데도 굴하지 않고, 그녀는 손에  성냥을 담배로 옮겼다. 흡연자들에게 담배는, 그야말로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후.. 그래서, 멍청하게 칼만 겨누고 있을 거야? 용건이 있으면 빨리 말해. 담배 다 피면 들어갈 거니까."


담배의 등을 두드려, 재를 털어내는 시오였다.


「이..! 이게 뭔 줄 모르는 거냐!」

"칼."

「그래. 너희는 그 칼들에 둘러싸인 채 포위당했단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다시 들어가도 여전히 포위당해 있는 거 아냐?"

뒤에 있는 침략자들이 웅성거렸다.

「그만! 말장난을 하러 여기에 온 게 아니다.」

남자는 시오의 목에 검을 겨누고, 그 입에서 담배를 빼앗아, 바닥으로 내던졌다.

「네년이 가진 조각을 얼른 넘기도록 해라.」

"돗대였는데."

「한 번만 더 개소리를 지껄인다면 네년 시체에서 조각을 가져가도록 하지.」


"음..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해도 돼?"


떨어진 담배를 한참을 바라보고는, 시오는 고개를 들었다.


「좋다. 마지막이다. 장로님의 당부만 없었다면, 네까짓 년은 진작에 시체가 됐을 거란 것만 알아둬라.」

"이 소리 안 들려?"

「무슨 소리 말이지?」

"아무 것도 안 들리는 소리. 아까까지만 해도 귀가 떨어질 것 같았는데 말이지."


「흥, 니 동료들이 실패했단 거지. 술집에서 노닥거리기나 할 뿐인 주정뱅이들이.」


"음.. 그런가? 그럼 지금은? 이 소리  들려?"

-읍..!


「..!」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남자는, 자신의 뒤에 있던 부하들이, 한 명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있는 남자가 나타났다.

"난전 중에 본진을 노리는  우수한 판단이었다. 병력들의 두발상태도 매우 우수했고 말이지."

"하지만 사주경계를 하지 않은 건 치명적이었다. 단 한 명의 기습을 허용했을 뿐인데, 모든 병력을 잃었지 않나."


철컥.

"그리고 하나 더."


 마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손에는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 쥐어져 있었다.


곤봉이라기엔 길이가 짧고, 낫이라기엔 날이 없는, 나무와 쇠가 섞인 기묘한 물건.


"내 돗대를 버린 건,  인생 최대의 실수다, 이 씹새끼야."


탕!


쩌렁쩌렁한 우레 소리가 들려왔다. 별동대는 모두 전멸하고, 가게 밖에는 두 사람만이 서 있을 뿐이다.

"담배 있어?"


시오는 태연하게 젠과 대화를 이어갔다.

"그런 거 안 피웁니다."


"시발.."

떨어진 담배에서, 마지막 연기가 피어올랐다.

~

'너의 이름은 엔드홀. 엔드홀이다.'


「네, 도리안님.」

'너와 데이린은 만든 이유는, 새로운 관리자를 위해서야.'


「새로운, 관리자.. 말입니까?」


'나는 이 관리자의 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어. 이젠 뭘 만들어내는 것도 지쳤지. 지금은 무리지만, 페어와 블랙베리가 조금만 더 자라면, 이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야.'

「그럼 저희는, 그분들을 도우면 되는 겁니까?」


'아니,  녀석들까진 내가 봐줄 생각이야. 너희에게는 그 다음, 그 녀석들의 다음 관리자를 맡기고 싶어.'


「맡겨만 주십시오.」


창조주는 잠들어있는 데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는 몰라. 수천 년, 수만 년이 걸릴지도 모르지.'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포근한 기분과 함께, 의식이 점차 흐려져 갔다.


'하지만 반드시 나타날 거야. 너희를 깨워줄 자가. 너희를 다스릴 자가.'


자신과 데이린을 나란히 뉘이고, 창조주는 일어섰다.


그리고.

'나를 쓰러뜨리는 자를 찾아라. 그리고 그를 위해, 내가 만든 세상을 부숴라.'


그 명령을, 몸속에 새겨 넣었다.

~

"으, 으으윽..!!!"

엔드홀의 칼자루를 잡은 순간, 오로넬은 검을 뽑을 수도, 손을 놓을 수도 없게 되었다.


무언가가 몸속으로, 그의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몸은 분명 말렸다! 왜 말을 듣지 않는 것이냐!」

"이, 시..발.. 막대기 새끼..! 내 몸에 뭘 쑤셔 박은 거냐..?!"

「이몸은 오직 데이린만이 사용할  있도록 만들어진 몸이다. 다른 짐승들이 이몸을 뽑으려 하면 이렇게 된단 말이다!」

"그딴, 건.. 빨ㄹ..ㅣ.."

머리 속을 뒤적거려지는 느낌이다. 수많은 기억의 문들이 하나   열리며, 새로운 주인을 받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점차  몸의 힘이 빠지고, 그 의식은,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다.


「멍청한 짐승 녀석. 이몸도 이걸 풀어본 적은 없단 말이다!」


엔드홀 몸은 남자의 머리 속을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기억을 흡수하고 있었다. 남자와의 사이가 썩 좋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그렇게 만들어졌고, 그렇게 움직일 뿐이었다. 이 섭리에 저항할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기억을 방황하던 엔드홀은, 어떤 기억에 도달했다.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날. 창조주께서 약속하신 그 날.

데이린과 오로넬이, 처음 마주한 날.

「설마..  자가..?」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자격도 없는 자를 데이린이 따를 리가 없었다.

기억은 거짓을 고하지 않는다. 남자 자신은 자각이 없을 지라도, 그는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남자의 의식은 이미 돌아올  없는 곳으로 떨어졌고,  몸은 돌처럼 굳어 있었으며, 수많았던 그의 기억들은, 그 소유권을 모두 자신에게 넘긴 채, 이제 하나의 문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부!!"

뒤에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

적인가? 이 몸은 아직 움직일 수 않는데..!

빨리 움직여야 한다.  몸을 지켜야 한다. 도리안이라면, 자신의 창조주라면, 이 남자를 구할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기억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것을 열지 못하면  몸을 움직일 수 없다. 지금까지 지나쳐 온 어떤 문보다 거대한 그것은, 온갖 자물쇠와 쇠사슬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제발 열려라! 열려달란 말이다!!」


아무리 두드려 봐도, 울부짖어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싸부!! 머리좀 빌릴게!"

빨간 머리의 여자가, 그의 머리를 밟고 도약했다. 손에는 복수의 단검이 쥐어진 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엔드홀의 인생에서 가장 길고도 짧은 순간이었다.

그녀가 적이었다면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아군이었다니, 실로 다행이었다.

하지만 아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여기에 서 있을 순 없다.  문을, 남자의 몸을 움직여야 한다.

!!!


「뭐지..?」

순간, 누군가가 몸을 잡아당긴 것만 같았다.


!!!


거대한 문이 작아졌다.


아니, 문이 작아진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문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

조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한 힘이 몸을 끌어당겼다.   밀려난 몸은, 멈출 새도 없이 남자의 머릿속으로부터 끌려 나갔다.


그리고..


"이 씹새끼가.. 사람 머리를 밟아!!!"

오로넬이 깨어났다.

~


"그래서,  다시 싸우러 안 가?"

"본진을 노리고 오는 놈들이 더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음.."

시오와 젠은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근데 왜 주방에 들어가 있어?"

마지막 한 개비를 낭비했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며, 시오는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그리고 젠은 어째서인지 주방에 들어가 있는 채였다.

"잘 모르겠습니다. 왠지 여기가 가장 편하군요."

"요리는 좆도 못 하는 게."

"뭐.. 근데 다들  시켜먹지 않습니까?  그걸로 됐습니다."


아예 입에 대지도 않았다면 몰라도, 한창 피우던 담배를 강제로 끊긴 탓에, 시오는 화풀이를 할 대상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일처리도 좆같이 하고, 요리도 좆같이 하고, 넌 대체 제대로 하는 게 뭐냐?"

평소라면 오로넬이라는 무적의 방패가 그 공격을 대신 막아줬겠지만,  상황에서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요리는 몰라도, 일처리는 꽤 잘해왔다고 생각합니다만, 어떤 일처리가 그렇게 좆같았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마법사님?"

그때, 시오는 깨달았다. 화풀이 할 인간을 잘 못 골랐다는 걸.

"니가 일처리를 제대로 했으면, 너나 나나 마가리스에 있었겠지!"

시오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이 개소리임을. 하지만 화풀이라는 것은 본래 그런 것. 이쪽의 좆같음을, 상대에게도 똑같이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럼 지금이라도 귀국하시겠습니까? 마법사님만 괜찮으시다면, 저놈들을 뚫고 마가리스까지 무사히 도착해 보이겠습니다."


하지만, 시오에게 무한한 은혜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젠이, 그녀의 말에 기분이 상할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 남자는, 오로넬의 진심 욕박기에도 태연하게 대답하는 남자였다.

"하.. 됐어. 그만. 이제 그만해, 그냥."

시오는 조금 전까지 잘만 마시던 술마저, 테이블 한켠으로 밀어냈다. 대화하는 상대가 이렇게 중요하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은 시오였다.

끼이익.

손님들이 무기를 들고 벌떡 일어났다.

모두의 경계 속에서 가게 안으로 들어 온 건, 지크와 그 품에 짐짝처럼 들려있는 나디아였다.

"오, 둘 다 왔네. 그쪽은 끝났나ㅂ.."

"도리안은. 도리안은 어디에 있지?"


나디아를 무심하게 바닥으로 던지며, 지크가 물어왔다.

"응? 주인장? 그러고 보니.."

"점주라면 아까 저장고로 내려갔다만."


"..내려간  얼마나 됐지?"


"아마.. 30분은 됐군."

"..그래."

카운터석의 끝자리. 그 대답을 들은 지크는, 자신의 지정석과도 다름없는 그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모든 것이 끝났다는 듯이.

 속에서 어렴풋이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은, 그곳에서의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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