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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화 〉과거는 늘, 현재를 따라다닌다 [10] (80/108)



〈 80화 〉과거는 늘, 현재를 따라다닌다 [10]

돌아올 리가 없었던 오로넬의의식이 돌아왔다. 그 손에는, 자루를 잡는 것조차 불가능한 검이 쥐어져 있었다.

치이익.

"으으윽..!!"

막대기를 쥔 손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아까와는 다르게 손발이 자유로웠다.

이걸 쥐고 있는건, 순수한 나의 의지다.

거인과 주먹을 나누고 있는 제리스가 보였다. 거인의 눈까지 날아오른 제자년이 보였다.

이것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손바닥 하나를 태우는 대가로, 저걸  눈앞에서 치울 수만 있다면, 기꺼이 태워주마. 이따위 고통, 럼주 한 잔이면 충분히 잊을 수 있다.

"이 지랄을 했는데 베이지도 않기만 해 봐라, 이 막대기 새끼야!!"

"싸부!! 지금!!"

거인에겐 바늘보다 작게 느껴질 단검들이, 그 눈을 향해 날아갔다.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바늘이든 먼지든, 눈에 이물질이 낀다면, 누구라도  순간은 눈을 감을 테니.

"씨이바아알!!!"

타들어가는 손을 붙잡고, 그 검을 거인의 발목을 향해 꽂아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움직여, 살점을 베어냈다.

촤아악.

파란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균형을 잃은 거인의 몸이 힘없이 무너졌다.

쿵!

이제, 마무리를 지을 차례다.

그 전에,  막대기부터 버리고.

땡그랑!

"으으, 시발. 아파 죽겠네. 생각해보니까 니 새끼 혼자서도 움직일 수 있잖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스로를 검집으로 집어넣는 막대기였다.

「먼저 말하지 않은 네놈 잘못이다.」

"개같은 새끼.."

"싸부! 손이 왜 그래요! 괜찮아요?"

뒤에서는 시끄러운 제자년이 뛰어왔다.  머릴 밟은 걸 끄집어내고 싶었지만, 지금은 저  걸 처리하는 게 먼저다.

"걱정되면 부축이나 해. 꼬맹이가 있는 곳 까지."

"아, 알았어요. 여기."

꼬맹이와 제리스의 손은, 피로 범벅이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 주먹으로 몇  동안, 저걸 상대로 시간을 끌었으니.

"보셨나요, 오로넬 씨? 제가 데이린을 지켜냈어요. 이번에야말로.."

그 눈은, 금방이라도 승천할 것 같은, 이승의 미련을 모두 떨쳐낸 자의 눈이었다.

"그래. 수고했다, 제리스."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제리스의 다리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미 이 녀석의 몸은 한계인 듯 했다.

"하.. 하.. 조각을 너무 오래 쓴 것 같아요. 죄송한데 잠깐, 만, 쉬어도 될까요..?"

"난 됐으니까, 이제 이 녀석이나 돌봐줘. 변태짓 친구잖아."

"변태짓 같은 거 안 하거든요?!"

제자년이 부축하고 있는 팔을 던지다시피 밀쳐냈다. 언제 한 번 거길 또 조져놓으러 가던가 해야지 원.

꼬맹이는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턱으로 거인이 쓰러져있는 곳을 가리키자, 꼬맹이는 말없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럼, 제리스. 꼬맹이는 데려간다."

"네헤.. 아, 암만 그래도.. 여자아이를 그렇게 험한 일에 쓰시면 안 된다구요.."

데려가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어차피 꼬맹이는 이미 이쪽으로 왔는데, 역시 변태들은  수가 없다.

그래도 뭐.. 같은 개소리로 반박은 할 수 있다.

"여자는 어디에 있고, 애는 어디에 있냐? 나보다 센놈들은 다 어른이다."

 말을 끝으로, 오로넬은 적을 향해 걸어갔다. 데이린과 함께, 데이린과 나란히.

하.. 그렇군요.. 아이와 어른이 아닌, 어른과 어른.. 당신들은 그렇게, 서로를 지키며 싸우고 있었군요..

나무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갈 곳을 잃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정적이 찾아왔다. 이제 숲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늘 위의 거대한 암석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으음..! 헉!"

"'헉' 이 지랄. 세상 편하게 처자고 있었으면서."

용사가 눈을 떴다. 기절해있던 놈이 일어난 거니 나쁜 일은 아니지만, 표적지마냥 등짝에있는 대로 화살을 처맞고  놈이, 벌써 정신을 차릴 수가 있는 건가? 그리고 그게 과연 좋은 일인가?

"나, 나 응급처치도 못했는데 어떻게.."

"존나  돼있던데? 몬드 할배가 업고 왔으니까, 할배가 한 거일 수도 있겠네."

"아저씨가? 아저씨는 어디 있어?"

좁아터진 가게에서 열심히도 머리를 움직이는 놈이다.

"저기 있잖아, 저기."

할배는 어깨에 검을 기댄 채, 벽에 몸을 붙이고 있었다. 역시 머리는 늙어도, 몸에 배인 습관은 어디 가지 않는다.

"으윽..!"

"진짜 뒤지고 싶냐?  뒤져가던 거 숨만 붙여놨더니,  뒤져서 안달이네."

몸을 일으키려는 용사의 머리를 발로 짓눌렀다. 나보다 센놈의 머리를 밟는 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고, 고맙다고, 말해야 돼. 아저씨도 힘들었을 텐데, 나 까지.."

"그 힘든 인간이 지쳐서 자고 있는데, 딸랑  마디 하려고 깨우겠다고? 지랄하지 말고 누워있어라. 니가 못 일어나면 내가 싸워야 되니까."

"으으.. 그럼 어떡해야 돼? 나.. 지금까지 혼자만 싸워 와서 모르겠어."

 새끼.. 술 마실 땐 다른 놈들이랑 그렇게 잘 어울리더니, 친화력이 거꾸로 성장했구만.

"저어기 떠 있는 돌멩이나 후딱 박살내고, 다시 술이나 마시게  주라고."

"응.. 알았어."

용사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맴돌았다.

"그러니까   치워줘."

"왜?"

"냄새나잖아..!"

"치우면 할배한테 달려갈 거잖아."

"안 달려가!  대신 싸우기 싫으면 빨리 치우라고!"

그럼 안 되지. 한 놈 잡는데도 그 지랄을 했는데, 저 위엔 어떤 놈이 있을지 상상도 하기 싫다.

"그럼 시체처럼 잘 누워 있어라?"

나는 분부대로 발을 치우고, 카운터로 돌아갔다.

"킁, 킁. 야, 이게 냄새 심한 거냐? 별로 안 나는데."

이 정도면 생활 악취지.

"니 꼴이나 보고 말하지?"

마법사가 좆같은 눈으로 이쪽을 쳐다봤다. 음, 확실히 좆같긴 하다. 온 몸이 파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으니.

하여튼,  옷만 입고 오면 온 우주가 나서서 옷을 더럽히고야 만다.

"아니 이건 싸우고 왔으니까 어쩔  없잖아. 이건 빼고 맡으라고."

"냄새를 어떻게 골라서 맡아?! 머리라도 처맞았어?"

"그것도  하냐? 싸움도 못하고, 냄새도 못 맡고, 넌 할 수 있는 게  빠는 것 밖에 없어?"

"이 새끼가!!"

"때릴 거야? 대신 싸우고 왔는데?"

마법사는 쥐고 있던 주먹을 펴, 자신의 목에 문질렀다. 안마라기엔, 조금  정도로.

"씹새끼."

그리고 찬사를 보냈다. 내가 이겼다는 뜻이다. 역시 기분이 더러울 땐 이놈을패는 게 제일이다.

"오로넬,  냄새 나."

꼬맹이가 옆에서 코를 킁킁거렸다.

"아."

막대기를 잡았던 오른팔을 들어봤다. 손바닥을 감싸고 있던 피부가 붉게 타오른 채,  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걸 보고 나니, 새삼스레 손이 아파졌다.

"뭐야, 손이 왜 그래? 불덩이로 캐치볼이라도 했어?"

마법사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째 상처를 보는 눈이 많아질수록 더 쑤셔오는 기분이다.

"이거, 소독 같은 거 안 했지?"

"했을 리가 있겠냐, 방금 왔는데."

"그래? 그럼 줘봐."

순순히 마법사에게 팔을내밀었다. 담배라던가, 담배라던가, 가운 속에 별걸 다 넣고 다니는 놈이니, 당연히 소독제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콸콸콸

"야."

"응? 안 아파?"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이게 엿을 먹이기 위한 행위였음을. 마법사는 그럴 리 없다는 표정으로, 계속해서럼주를 퍼붓고 있었다.

"그 가운 안에는 담배밖에 없냐?"

"어. 딴  없는데?"

"담배보다 쓸모없는 년."

"시발,  찌른다?!"

"해 보던가! 니가 싸울 거면!"

"..넌  봐? 팍 씨!"

한창 마법사와 2차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막대기가 이쪽을 꼬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없으니까 실제로 꼬라봤는지 아닌지는 알  없지만, 아무튼 나는 그렇게 느꼈다.  손을 태워먹은 게  놈이어서 일지도 모른다.

「그때 네놈의 의식은 잠시 잃은 정도가 아니라, 세상에서 사라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대체 거기서 어떻게 돌아온 것이냐? 어떻게 이몸을 쫓아낼  있었던 것이냐? 이몸은 알 수가없다.」

"나도 몰라. 그냥 이 새끼한테 밟히니까 꼭지가  돌더라고. 내가 뒤져도  새낀 죽이고 갈 거라는 느낌이었지."

"그러니까  덕분에 싸부가 살아 돌아오셨단 거죠? 뭐, 제자와 스승간의 '유대' 라고나 할까? 후후, 창피해 하지 말라고요 싸부."

"언제부터 '경멸'이란 말이 '창피'로 바뀐 거냐? 유대 같은 말을 씨불이기 전에, 니가 나한테 싸지른 똥이 얼마나 되는지나 생각해봐라, 이 새끼야."

생각해 보란다고 진짜로 기억을 더듬고 있는 제자년이었다. 지금부터 시작하면 아마 아침이 돼야 끝날 텐데.

"..한 번 밖에 없지 않아요..?"

집계가 이렇게 빨리 끝날 리가 없다. 그리고 저렇게 적을 리도 없다. 그렇다는 건, 내 말을 잘못 알아먹었다는 거지.

"그건 진짜 싼 거잖아."

"네? 아, 이거 아니에요? 아.. 아?!"

제자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물들었다. 나는 '생각해 봐라' 라고 했지, 말하라곤 안했다. 전적으로 이년 책임이다.

"그땐 진짜 오졌지. 설마.."

"악!! 악! 악!!"

처절하게도 울부짖는 제자년이었다.

"시끄러워 이 새끼야."

"악!! 악!! 읍..! 읍..!"

"야, 내가 입 막고 있을 테니까, 니가 말해 막대기.  기억 다 가지고 있지? 그렇게 쑤셔놓고 모른  하기만 해봐라?"

제자년은 열심히 고개를 젓고 있었다. 눈에 맺힌 물은 금방이라도 흐를 것 같았다. 넌 오늘  걸렸다. 아주 버릇을 고쳐주마.

「음.. 그게 말이다.」

..그건 내가 바라는 첫마디가 아닌데.

「네놈의 머릿속에서 쫓겨날 때, 그 기억들을 다 빼앗기고 말았다. 이몸도 뭔가 엄청 중요한  본 것 같았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단 말이다.」

"하.. 시발, 이걸 초 치네. 진짜 갖다 버릴까, 이 새끼?"

"야, 야. 참아 오로넬. 저 새끼 원래부터 이상했잖아."

어느샌가 마법사는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역시 공공의 적이 있으면 자연스레 아군이 생기는 법이다

「부탁이다 세 발 달린 짐승이여. 이몸을 한 번만 더 뽑아다오. 정말 중요한 뭔갈 봤단 말이다.」

"내 손을 다 태워 처먹어 놓고, '너'한테 중요한 일이니까  손을 또 태우라고? 이 새끼, 보증 서달라는 소리를 존나 어렵게 하네?"

「부탁이다.. 부탁이다..」

"싸부 제발 그만!"

"스튜, 스튜 먹을래."

"아,  꺼지라고!!"

가게는,  시간 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실없는 말들이 오고가며,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끝이 오지 않을 것처럼.

결말을 미루는 것처럼.

하늘 위의 요새에선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그저 낯선 남자 하나가, 그곳에 서있을 뿐이었다.

한때는 신이라고 불리웠던, 그러나 지금은 그저 작은 술집의 주인일 뿐인.

도리안이라는 남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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