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1화 〉과거는 늘, 현재를 따라다닌다 [11] (81/108)



〈 81화 〉과거는 늘, 현재를 따라다닌다 [11]

"후우...."

남자는 바깥 공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가 바깥 땅을 밟는 건, 하물며 이 땅을 밟는 건,참으로 오랜만의 일이다.

'신님! 신님!'

어린아이 하나가 자신을 향해 달려온다. 그 손에는 뾰족한 껍질로 뒤덮인 열매 하나가 쥐어져 있다.

'이거 맛있으니까 한 번 드셔보세요! 아빠가 그랬는데 이게 과일의 왕이래요!'

건네받은 그것의 냄새는, 먹을 것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지독해서, 자칫하면 손을 놓아버릴 뻔했다.

그러나 입 안에 머금은 그것의 맛은 정말이지 굉장해서, 몇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맛을 떠올리곤 한다.

'우리들 이름도 과일이니까, 신님 이름은 이걸로 해요! 과일의 왕이잖아요! 아, 그래도 그 이름을 그대로 쓰면 지독한 냄새가 먼저 떠오르니까, 이렇게 해요."

'도리안. 멋진 이름이죠?'

그렇게 남자는, 도리안이 되었다.


「도리안.. 님..?」

"오디. 오랜만이구나."

 눈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지금껏 그 몸을 움직여 온 집념이 느껴졌다.

「정말.. 정말 도리안님이십니까?」

"그래. 내가  늦었지?"

도리안은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자신의 가게를 바라보았다. 그가  밖에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만났으니, 술이라도 한 잔 어때? 이제 마실  있지? 사실 지금 술집을 하고 있는데.."

「왜 이제야 나타난 겁니까!!」

도리안은 말을 멈췄다.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남자를, 누구보다 자신을 기다려왔을 남자를 바라보았다.

「왜 좀  일찍 나타나지 않은 겁니까!!」

「왜 우리를 말리지 않았던 겁니까!!」

「왜!!  우리를 버린 겁니까!!」

지금까지의 모든 감정을 토해내며, 그는 지팡이를 내려찍었다.

소리보다 빠른 무언가가, 도리안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ㅡ!!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그것이 부딪힌 곳을 중심으로,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저는 당신이 죽은 줄만 알았습니다. 제가 아는 당신이라면, 모두가 믿었던 당신이라면! 우리를 져버릴 리가 없었으니까!」

「차라리 그렇게 믿는 게 편했습니다. 우리는 배신당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으니까. 당신이 없는 세계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돌이킬 수도 없는 지금이 되서야 나타난 거냔 말입니다!」

도리안은 숨을 들이 쉬었다. 이 남자에게, 진실을 전해야 한다.

'안 돼! 안 돼! 죽지 마, 도리안!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으니까 사라지지마아!!'

자신을 품에 안은 채, 딸은 울고 있었다.

'걱정하지마. 사라지는 게 아니라, 힘을 잃은 것뿐이야. 미안해하지 마. 그 힘은 언젠가 너에게 물려줄 것이었어. 앞으로는 그 힘으로.. 블랙베리와 함께, 이 세계를 다스리는 거야. 나는 저 아래에서.. 너희들이 만들어가는 세계를, 이 눈으로 직접 지켜보고 있을게..'

'아, 아.. 그러고 보니 작별인사를 못 한 녀석들이 더 있었네.. 분명 걱정할 텐데.. 어차피 나 같은 건 금방 잊겠지.. 페어, 그 녀석들을 부탁할게. 나에게, 우리에게 이름을  녀석들을..'

"내가 너희를 찾은 게 아니라, 너희가 날 찾은 거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는 힘을 잃었고, 이곳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건 나에게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그 힘에 대한 미련은 오래전에버렸으니. 내가 바라던 건, 내가 만든 세계에서, 너희들이 있는 세계에서,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 세계를둘러보는 것이었다."

「엉뚱한  하지 말고 질문에 대답하십시오. 그게 지금 무슨 상관입니까!」

도리안은 말없이 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바로 앞을 향해 그 팔을 뻗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똥이 튀며, 그 손을 먹어치웠다.

「무..슨..」

"힘을 잃은 내가, 이 세계에서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여기까지였다. 나는 세상을 돌아다니지도, 너희를 찾지도 못한 채, 그저 살아가기만 할 뿐이었다."
.
.
.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만이 일상이 되었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 싶었지만, 이 몸은 쉽사리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해와 달이 뜨고 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하루가,  달이, 일 년이,  년이,  년이, 천 년이 흘렀다. 영겁의 세월을 살아가야할  몸에 있어서는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400년 전. 그 남자가 나타났다.

우리는 서로를 알아봤다. 죽지 못해 살아있는 자. 자 또한 그 운명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와 나는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를.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그와 나는 달랐다는 걸.

그는 얼마든지 자신의 목숨을 끊을 수 있었다. 이 영겁의 굴레 속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살아가고 있었다. 그저 단 하나의 약속을 위해.

처음으로 이 몸이,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  번의 생각이, 세상을 바꾸었다. 관리자의 자리에선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나뭇잎들에 맺힌 이슬을 보며 아침을 살아갔다. 반딧불이와 수많은 별들을 보며 밤을 살아갔다.

세상과 마주할수록, 그 아름다움에 취해갔다. 그 취기가 오를수록, 마음 속 깊은 곳에 넣어두었던 오랜 소망이 고개를 내밀었다.

 세계를, 좀 더 알고 싶다. 불가능한 일인  알고 있어도, 그 소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남자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세상은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고, 직접 둘러볼 가치가 없는 곳이라고.

한숨을 쉬고 있는 나에게, 남자는 '직접'을 강조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우리는, 술집을 만들었다.

~

"어이, 일어나라."

누군가 머리를 치고있다. 내 머리가 왜 테이블 위에 있지? 아, 그러고 보니 잠시 엎드렸었던 것 같은데, 그 순간에 잠이 들었나?

고개를 들어 올리자 흰놈의 면상이 눈에 들어왔다. 일어나라고 해서 일어났는데도, 그 손은 여전히 내 머리를 치고 있는 중이다.

"야. 일어났잖아.  눈도 한쪽 밖에 없냐?"

"아, 미안하군. 하도 두서없게 생긴 머리통이라, 어디가 면상이고 어디가 머리인지 헷갈려서 말이야."

"넌 뭐 구별이 되는  아냐? 그따위로 생겨 처먹으니까 용사가 술자리에도  부르지."

"다시 한  지껄여 봐라..! 싸우러 가기 전에 네 녀석부터 죽여주마.."

"몇 번이고 씨불여주마. '그따위로 생겨 처먹..'"

흰놈이 반응하지도 못할 정도로 빠르게 멱살을 움켜쥐고, 내 몸을 들려 올렸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한 손으로 멱살을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 상대를 줘 패겠지만,  놈은 멱살을 잡을 손만 있지, 팰 손이 없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음.. 으음..?"

들어 올려질 때만큼이나 빠르게, 내 몸은 다시 의자로 떨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용사가 일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야, 빨리 안 일어나고 뭐해? 흰놈이 일어나라잖아."

"음? 어, 어.. 미안, 아저씨. 빨리 일어날게."

살기가 느껴진다. 시선이 따갑다. 그걸 무시하기 위해,잠들어있는 다른 등신들을 닥치는대로 깨웠다.

-으어아아아..!

시체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켰다. 그냥 있어 보이는 비유를 해본 건데, 진짜 시체 같은 놈들도 하나 둘씩 섞여있다. 아, 원래 저렇게 생긴 건가.

"지금부터 나와 함께 저 요새를 부수러 갈 사람을 뽑겠다."

등신들의 기상이 완료되자, 그 앞에  흰놈이 입을 열었다. 내 머리를 쳤다는 점에서 유추할 수 있겠지만, 저긴 주방이다.

적의 대장을 치러가는 전략 회의를 주방에서 하고 있는  보고 있자니, 정말 뼛속에서부터 전의가 불타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섯 명. 도리안이 준비해둔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아마 다섯뿐일 거다. 그러니 지금 가장 상태가 좋고, 전력이 될 만한 녀석을 데려간다. 거부권은 없으니 이름을 부르면 앞으로 나오도록 해라."

문이 뭘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 다섯 명에 흰놈 본인은 무조건 포함 돼있을 거다. 그럼 남은 건 네 명. 전력 순으로 보자면 용사, 할배, 젠 정도가 있는데, 남은 한자리는 조지나 라보를 넣으면 되지 않을까?

"일단 나디아."

제일 방해만  것 같은 놈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어, 어? 나? 난 왜!? 뭘로 싸우라고?  조각은 니가 뺏어갔잖아!"

"넌 고기방패다."

저게 마왕토벌대의 전력인가? 저 한 마디에, 아무런 쓸모도 없을 것 같던 마왕이, 엄청난 전략적 가치를 지닌 자원으로 보인다.

"안 돼!! 그냥 죽으라니, 너무 해!! 적어도 싸울 수 있게는  줘! 내 조각, 그거 하나만 잠시 돌려줘! 진짜 열심히 싸울게! 여긴 일단 내가 다스리는 나라의 수도라고! 제발!"

마왕이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다. 생소한 광경은 아니지만, 이번엔 정말 필사적이었다. 저걸 보고도 불사에 대한 욕망을 가지는 인간이 있을까.

"웃기지 마라! 내가 400년 전의 일을 되풀이 할 거라 생각하나? 네놈한테는 일체의 기회도 주지 않을 거다."

"그.. 그건."

시발. 싸우러 가기 전인데 분위기 한  씹창났네.

"너 때문에 시간만 낭비했군. 다음 부르겠.."

"내 목숨으로 약속할게!"

마왕이 다시 한 번 흐름을 끊었다. 흰놈의 눈에서 고요한 분노가 느껴졌다.

"내가  못 들었나, 나디아? 죽지도 않는 몸으로 뭘 약속한다고?"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인간의 목숨만큼 날 죽여.그럼 믿을 수 있겠.."

푹ㅡ!

흰놈은 마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마왕의 피가 주방 곳곳에 튀었다.

"..헉! 헉!"

그리고 다시 일어났다.

"아직 백 번은 넘게 남았다, 나디아. 그 조각 하나를 잠시 돌려 받는데 그 정도의 고통을 감내하겠다고? 내 생각엔 오히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럼 믿을 수 있을 때까지 죽여! 빨리! 시간 없잖아? 난 조금이라도 전력이 되고 싶을 뿐이야!"

"..."

흰놈은 고민했다. 이  사이에, 얼마만큼의 응어리가 있는지는모른다. 400년 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흰놈은 고민하고 있었다.  응어리를 내려두고, 400년 전의 일을 내려두고. 지금, 이 순간. 눈앞에 있는 등신의 눈만을 바라보며.

"우린 잠시 나갔다오지. 네놈이랑 네놈. 그리고 그 옆의 꼬마까지. 지금 당장 저장고로 내려가도록 해라."

그 손가락은, 틀림없이 이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치의 오차도 없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의 정 중앙을 가리키고 있었다.

"야!! 난 왜!! 야!!  씹새끼야!!"

흰놈은 돌아보지 않았다. 바닥에 드러누운 마왕을 집은 채, 가게 밖으로 걸어 나갈 뿐, 그 외의 것은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는 표정이었다.

꼬맹이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지목된 몬드 할배도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시발. 진짜? 아니 시발, 설마?

그리고, 지금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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