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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화 〉과거는 늘, 현재를 따라다닌다 [12] (82/108)



〈 82화 〉과거는 늘, 현재를 따라다닌다 [12]

"할배."

"왜 그러나 오로넬."

"냄새 존나 나는데 여기."

"어쩔 수 있나? 지크가 여기에 길이 있다고 했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저장고는 생각보다 넓었다. 아니, 가게보다 넓었다. 그 넓은 공간은 전부 술로 가득 차있었는데, 아무래도 폐쇄된 공간이다 보니, 그 냄새들이 한 곳에 섞여 기묘한 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왕놈은 어떻게 됐으려나."

"음.. 지크의 성격을 봐선, 정말로  번 정도 죽이고 있을  같군. 뭐, 동정할 필요는 없네. 상대는 마왕 아닌가? 그놈 때문에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데, 그 정도는 속죄 축에도  낀다네."

할배가 저렇게 말 할 정도면 마왕이란 놈은 어지간한 쓰레기였나 보다. 내 눈엔 동대륙의 다른 쓰레기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데 말이다.

마왕군이 쳐들어오지 않게 되자, 기다리기라도  듯이 자기네들끼리 전쟁을 벌여 놓고선, 그렇게 타도를 외치던 마왕과 다를 게 무어란 말인가.

"뭐냐. 여기에 있었군. 문은 안쪽이다. 서둘러라."

가게 위쪽에서 저장고의 문이 열리며 흰놈과 마왕이 내려왔다.  번을 죽였다기엔 너무 짧고,  번만 죽였다기엔너무  시간이었다.

"그걸 받으려고 그 지랄을  거냐?"

장난감을 받은 애새끼 마냥 헤벌쭉 대고 있는 마왕의 손에는, 내 단검보다도 작은 검이 쥐어져 있었다.

"무시하지 마! 이 녀석과 남은 조각 하나도 돌려받을 수 있다면, 저런 돌덩어리 한두개쯤, 나 혼자서도 부술수 있다고!"

"그래서 지금, 그 하나마저 내놓으라는 거냐, 나디아?"

"아, 아니.. 아니야. 열심히 싸울게."

마왕이 마른 침을 삼키며 자기 목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그 문은 어디 있는데? 애초에 '문'이뭔지 알고는 있는 거 맞냐? 문이란 건, 열면 그 반대쪽이 나오는 물건이거든? 이딴 지하에서 저 하늘로 갈 수 있는 게 아니라?"

아무리 봐도 흰놈의 머리가 맛이 갔다고밖에 생각 할 수 없었다. 위로 올라가도 모자랄 판에, 저장고의 계단을 타고, 더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기때문이다.

"도착했다. 그렇게 궁금한 네놈이먼저 들어가 보는  좋겠군."

그건 문이 아니라 벽이었다. 무지개 색으로 빛나는 벽. 문고리도 없고, 뒤에 공간이 있는  같지도 않다.

"들어가라고 해도, 어떻게 열라고 미친놈아. 이건 벽이잖아, 벽."

"아니. 문이다. 이미 열려있는 문이지. 그냥  빛을 향해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시발, 불안한데..?"

"불안하면 돌이라도 던져 봐라. 사실, 나도 이걸 본  처음이다."

미친놈인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손은 무언가를 집어 들고 있었다.

「네, 네이놈! 뭐 하는 짓이냐!」

"이런 지하에 돌이 어디 있냐? 막대기 같은 걸로 찔러나 봐야지."

「그, 그만! 그만하는 거다! 그래! 사실 이몸이 이미 보고 왔다! 여기로 들어가면 그 요새가 나온단 말이다!」

"그래? 그럼 한 번 더 가."

사실 집어넣는 건 조금 망설여졌는데, 막대기가 직접 봤다고 하니 안심하고 그 뒤를 찔러볼 수 있었다.

"어? 진짜 비어 있네? 뭐냐, 진짜?"

아무리 봐도 뒤는 벽일 뿐인데,  빛을 향해 막대기를 찔러 넣어도, 그놈이 어딘가에 부딪히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음, 맞는 것 같군. 여기서부턴 내가 먼저 가지. 쫄보인  녀석은  뒤나 따라와라."

"먼저 가던가. 뒤져도 너부터 뒤지지, 내가 먼저 뒤지냐?"

흰놈은 입 꼬리를 한 번 떨고는, 반쯤 삼켜진 막대기의 몸을 밀쳐내고, 그 빛 속으로 들어갔다.

"다음은 내가 가겠네.  위에서 보세나."

몬드 할배는, 그 정체도 모를 것을 경계하는 일 없이, 당당하게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역시 늙어서도 허리가 꼿꼿한 할배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놈들뿐이다.

"오로넬. 안 가?"

꼬맹이가 물었다. 이제 이곳에는 나와 마왕뿐이다.

"어? 이 녀석 먼저 보내고."

"응? 무슨 소리야, 오로넬. 내가 뒤를 경계하면서 갈 테니까, 넌 빨리 합류해."

"니가 경계가 뭔지 알기나 하냐? 지금 당장 뒤통수 후려도 처맞을 새끼가."

"해 봐? 말해두는데, 난 이것만 있으면 무.적. 이거든?"

젓가락 같은 단검을 흔들어 보이는 마왕이었다.

"그럼 그걸 뺏으면 되겠네."

곧바로  손을 낚아채 조각을 빼앗았다. 마왕은 금세 울상이 되었다.

"아아,  돼! 돌려줘! 돌려줘어어!"

"이걸  안으로 던지면, 니가 먼저 들어가겠지?"

"아니, 아니. 지금! 지금 먼저 들어갈게! 나 사실 먼저들어가는  좋아해! 그러니까그거 좀 돌려주지 않을래..?"

"음.. 어떡하지. 내가 흰놈한테 들은 게 있어서, 넌 못 믿겠는데? 저기 반쯤 들어가면 모를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왕은 홀린 것처럼 빛을 향해 달려갔다.이게 뭐라고. 진짜 의존증이라도 있는 건가?

"드, 들어갔어. 빨리 줘어어."

"어? 어, 그래. 자."

그 손에 젓가락이 돌아오자, 다시 한  그 얼굴이 거만하게 바뀌었다.

"훗, 어리석.."

"어딜."

다시 빛으로부터 빠져나오려는 마왕을, 그대로 발로 차 넣었다. 저 놈이 저럴 놈이란 건,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었다.

이제, 날 막을 등신은 없다.

"후, 다시 올라갈까."

"오로넬, 안 가?"

꼬맹이가 옷깃을 붙잡았다. 이 새끼도 뒤지려고 안달이 났나. 인간이라면 이게 당연한 반응인 건데, 왜 목숨을 아끼려는 건 나밖에 없는 거냐.

하지만 나에게는,  녀석을 설득할 수 있는 무적의 말이 있었다.

"스튜 먹기 싫냐? 오늘 별로 먹지도 못했으면서, 빨리 올라가서 먹어야지."

"도리안이 없어. 도리안이 없으면 스튜  먹어."

시발. 저걸 깜빡했다.

"도리안, 이 안에 있어. 스튜 먹으려면 구해야 해."

소매가 당겨지는 힘이 점점 강해졌다. 스튜로 말문을 연 이상, 저 말에 반박할 수도 없다. 나는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 마냥, 꼬맹이에게 끌려갔다.

"인생.."

그 빛이, 내 몸을 통과해갔다.

~

「장로님.. 피타야도, 당했습니다..」

제자는 말을 끝마치지도 못한 채 무거운 숨을 삼켰다.

피넛, 미드겐, 캠밸, 포멜로, 피타야, 그리고 수십 명의 동포들. 그 모두가 목숨을 잃었다.

그들 또한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몸이다. 언젠가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날이 동시에 찾아올 줄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마을에는 몇 명이나 남았느냐..」

「70명 남짓이 남았습니다..」

「.......」

장로는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한참. 한참을 생각하다, 입을열었다.

「피치, 너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으냐?」

 일식이 끝나면, 그들이 돌아가야 할 곳. 어둠 이외엔 존재하지 않는, 불모의 공간.

「그곳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 되겠지요.. 하지만 저희는 괜찮습니다. 당신의 뜻을 따르기로  순간부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감내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요.」

「그러니까 돌아가요.. 저희가 있어야  곳으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새어나왔다. 슬픔이 새어나왔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럴 자격이 없었다. 그 슬픔을 안겨준 것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 못 됐던 걸까.

처음엔 그저, 그를 찾으려는 마음뿐이었다. 그 마음에, 평생을 바칠 각오가 있었다.

그러나 그 평생의 한 순간, 조각이란 걸 손에 넣은  순간, 그 마음은 간단히도 사라졌다.

어느샌가, 나는 복수를 원하고 있었다. 그가 없이도 잘만 돌아가는 세상에게,그의 자리를 빼앗은 자들에게, 이 힘을 부딪히고 싶었다. 화를 내고 싶었다.

강대한 힘은 사람을 집어삼킨다며, 아이들에게서 조각을 떼어냈다.

그러나 자신이, 그 누구보다 그 힘에 심취해 있었다.

쓸데없는 피를 보지 말라며 아이들을 다그쳤다.

그러나 자신의 손에, 가장 많은 피가 묻어 있었다.

그 피에, 책임을 질 때가 왔다.

「피치. 제단으로 가자꾸나.」

「그곳에는 왜.. 장로님,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

제단. 그들이 약탈한 17개의 조각들을 모아둔 장소. 새로운 신을, 만들어내기 위한 장소. 그곳에 출입할  있는 건, 장로와 그의 대리인뿐이다.

「본대를 쓰러뜨렸으니, 다음은 본진 아니겠느냐. 저들은 곧, 이곳으로 쳐들어올게다.」

「그럼 함께 막아 내면 될 뿐입니다. 아직 싸울 수 있는 자들은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왜, 제단으로 가시는 겁니까?」

「혹시라도 그들이 그곳을 발견했을 때를 대비해서, 조각을 옮겨두고 싶구나.」

「그런 거라면.. 알겠습니다.」

제자는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말없이 그를 부축했다.

「조각을 얻고 반역을 꾀했을 때, 나는 이 힘만 있다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단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추방까지 당했지만, 그 생각은 바뀌지 않았지.」

스승은, 답지 않게 옛날이야기를 주절거렸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수많은 피로몸을 적시고서야, 소중한 이들을 잃어버리고서야, 깨달았단다. 당연하게도 알고 있던 걸, 지금까지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고.」

「장..로님..?」

피치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렸다. 그들은 마을을 가로질러, 숨겨진 입구를 열고, 제단으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책임을 져야 한단다. 나로 인해 발생한, 모든 피에 대한 책임을. 너희를 끌어들여버린 책임을. 그의 뜻을, 배신한 것에 대한 책임을..」

팍!!

피치의 몸이 무거워졌다.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의식이 멀어져 갔다. 그녀의 마지막 기억은, 부축도 없이, 지팡이의 도움도 없이, 홀로 서있는 장로의 모습이었다.

피치를 편한 자세로 뉘인 오디는, 제단에 놓인 조각을, 품속에 모으기 시작했다.

자신과 함께 사라질, 17개의 죄악들을.

준비를 끝마친 오디는, 지상으로 돌아왔다. 남은 동포들과 피치는, 모두 자신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오디는, 홀로 저항군을 맞이하기 위해, 벼랑으로 향했다.

..!

그곳엔 선객이 있었다.

몇 백 년이 지나도, 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있는 그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도리안.. 님..?」

 얼굴이,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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