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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화 〉과거는 늘, 현재를 따라다닌다 [14] (84/108)



〈 84화 〉과거는 늘, 현재를 따라다닌다 [14]

"뭐? 누구라고?"

그것은 완벽한 복종의 자세, 그 자체였다.

눈앞에 무릎을 꿇은 빡빡이는, 더 이상 공격을 해 올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왕궁에서만 보던 그 꼴사나운 행위를, 적진의 한 가운데에서 보게 될 줄이야.

「종말의 천사 데이린과, 성검 엔드홀. 그리고 그 주인이신 세번째 신이시여.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뭐라는 거지? 신? 천사? 성검? 지랄도 이런 지랄이 없다.

"계속 주변을 경계해라, 꼬맹아. 분명 개소리로 시간 끄는 거다."

「개소리가 아닙니다. 모두 이 예언서에 나와 있는 대로 입니다.」

빡빡이는 꿇어앉은 자세 그대로, 품속에 손을 넣어 두툼한 서적 하나를 꺼냈다.

신, 천사, 성검, 그리고 예언서. 네 가지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그것을 조합해  결과, 나는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미친년이다.

세상에 수많은 미친놈들이 있지만, 저런 추상적인 걸 믿는 미친놈들만큼 미친놈들도 없다. 어찌 보면 미쳤다는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에 가장 부합하는 놈들이지.

「무례한 질문이지만,  번째 신으로 선택받은 당신의 존함을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미친년.  거 없다."

"오로넬."

내 옆에도 미친년이 하나 있다는 걸 깜빡했다.

「감사합니다, 천사님. 오로넬. 당신의 존함. 확실하게 새겨들었습니다.」

언제 일어날 생각인지, 더욱 깊숙이 고개를 처박는 미친년이었다.

"천사라고? 도대체 그 종이쪼가리에는 무슨 개소리가 적혀져 있는 거냐?"

닿는 것 마다 박살을 내놓는데, 아무리 봐도 이건 천사라 부를 만한 게 아니다. 파괴자면 몰라도.

「첫 번째 신을 쓰러뜨리는 자가 나타날 때, 잿빛의 파괴자가 강림 하리라. 그와 그의 성검은 이전의 세상을 멸하고, 세 번째 신을 위한 세상을 만들지어다.」

파괴자 맞네.

"그러니까, 내가 이놈들을 데리고 다니니까, 그  번째 신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신.  번째 신이 쓰러졌다는 뜻이지요.」

"난 신이라는 양반을 만난 적도 없고, 내가 신이 된 기억도 없다. 그러니까 그딴 소설은 혼자만 읽어라. 남한테 들이밀지 말고."

미친년은 입을 다물었다. 같은 말을 여러 번 들어 본 적이 있는 모양이지.

하지만 느낌이 왔다. 이년이 얼마나 미쳐있는지.

이건 이용할  있다. 이년 머릿속에서 나는 이미 신이다. 이 정도 농도라면, 이쪽에서 묻는말에도순순히 대답해 줄 것이다.

"..이 아래에,  땅을 유지하고 있는 뭔가가 있다. 내 말이 맞지?"

미친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얼굴에는, 자신들의 비밀을 들켰다는 당혹감이 아닌 안도감이, 마치 그것을 물어봐주기라도 바란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 역시..!신이시여, 당신은 모든 걸 알고..」

"위험해 오로넬!"

「꾸억!!」

미친년이 날아갔다. 그년이 있던 자리에는, 어딘가에 버리고 왔을 터인 마왕놈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있었다.

"내가 제때 왔구나 오로넬! 방금은  위험했어. 무릎을 꿇어서 추진력을 얻으려 하다니, 상당한 녀석이야."

거기서 추진력을 얻을  있다고 생각하는 니가 더 상당하다, 이 등신새끼야.

그것을 입 밖으로 내기도 전에, 내 손이 먼저 그 면상을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보다도 빠르게, 날아갔던 미친년이 돌아왔다.

살의가 어마어마하게 담긴, 주먹을 휘두르며.

"기다려."

이놈은 뒤져도 전혀 문제가 없는 몸이지만, 그래도 시험해  가치는 있는 일이다. 이년이 어디까지  따르는가. 어디까지 미쳐 있는가를 말이다.

그 주먹이 마왕의 면전에서 멈췄다. 그러나 여전히 살의가 느껴졌다. 자신의 감정보다,  말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앉아."

개들한테나 내리는 명령을 내려 보았다. 미친년은 곧바로 복종의 자세로 돌아갔다. 마왕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모습을 지켜봤다.

"너도 앉아, 이 새끼야."

아까 때리지 못했던 면상 대신, 마왕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악! 뭐, 뭔데? 적 아니야? 왜  말을 들어?"

"몰라. 지가 듣고 싶다는데, 부려먹어야지."

나는, 다시 무릎을 꿇은 그년에게로 다가가,  앞에 쭈그려 앉았다.

"자, 말해라. 이 땅을 들어 올리고 있는 건 어디에 있지?"

「징벌의 사슬은, 바로 이 아래에 있습니다. 제가 길을 알고 있습니다. 부디 동행하게 해 주십시오.」

"니 친구들을 만날 지도 모를 텐데? 그놈들이 날 가로막아도, 넌 그놈들을 죽일 수 있나?"

「설득해 보겠습니다. 천사님과 성검이 있다면, 그들을 설득할수 있습니다.」

"반드시란  없다. 내가 묻는 건, 그놈들을 죽일 수 있냐, 없냐다."

「죽..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쓰러뜨릴 수는 있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스승님을 위해서.」

스승이 왜 튀어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듣고 싶었던 답은 들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친년에게 고했다.

"그거면 됐다. 어서 안내해라."

「예!」

마왕은 얼이 빠진 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 빨리  오냐? 또 버리고 간.."

거대한 빛기둥이 솟아오르고 있는, 그곳을.

~

거대한 빛줄기가 도리안을 집어삼켰으나, 그 몸은 건재했다. 자신의 앞을 막아선 흰 머리의 남자가 보였다.  손의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얘기는  끝났나, 도리안? 뭐, 저쪽은 이제 말 할 생각도 없어 보이는군."

"지크. 몬드도 왔네. 두 사람만  거야?"

"오로넬과 마왕도 왔다네. 일단 나와 함께 가지, 주인장."

몬드는 도리안의 어깨에 손을 얹고, 지크의 뒤로 빠져나갔다.

"도리안."

지크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도리안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걸음만을 멈추었다.

"이게 마지막이다.   말은 없는 거냐?"

"..그래. 그 얼굴을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러냐. 뭐, 최대한 멀리 도망가는 게 좋을 거다."

지크의 어깨에서, 희미한 불꽃이 일었다.

그를 감싸고 있던 외투가 갈라졌다.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그 천은, 스스로의 몸을 여러 갈래로 쪼개어, 자신의 몸에 불을 퍼트려갔다.

"말도 하지 못 하는 상대와 전력으로 싸워야 하다니, 이쪽 기분도  헤아려 줬으면 좋겠군."

그의 옆에, 무채색의 정육면체가 떠올랐다. 주먹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그 정육면체는, 스스로의 모습을 거대한 검으로 바꾸어갔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그저 시동을 걸기만 했을 뿐인데, 조각의 부하가 온 몸으로 전해져 왔다. 이렇게 많은 조각을  번에 쓰는 건, 400년 전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후.."

그 고통을 바깥으로 배출하듯, 그는 긴 숨을 내뱉었다.

두 다리를 지면에 붙이고,  손으로 검을 붙잡은 채, 그는 사라졌다.

캉!

그리고, 순식간에 상대와 맞닿았다.

치직.치지직.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상대가 휘두르는 건 검도, 창도 아닌, 한낱 지팡이였다. 그것이 조각이란 걸, 곧바로 깨달았다.

!!!

지면이 울렸다. 지크는 맞닿은 검을 쳐내고, 재빨리 뒤로물러나며, 대검으로 변한 정육면체를 날려 보냈다.

쿠구궁!!

그 직후, 지면에서 뾰족한 가시들이 튀어나와 그를 보호했다. 조금이라도 이탈이 늦었다면, 저것에 복부가 꿰뚫렸을 것이다.

'지금까지  것만 해도 세 개, 아마 그것보다 훨씬 많은 조각을 두르고 있겠지.'

저것이, 단순히 조각  두개에 힘을흡수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건, 상대의 끔찍한 몰골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몸을 움직이고 있는 건, 이미그의 의지도 아니었다.

최소한 다섯. 혹은 그 이상의 조각이 저 몸을 먹어치우고 있다. 그리고 그 몸이, 더 이상 지불할 대가가 없어졌을 때, 적은 알아서 쓰러질 것이다.

해야 할 일은, 상대가 체력이 다해 쓰러질 때까지, 조각을 사용할  없을 때까지 버티는 것.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끊임없이 조각의 사용을 유발하는 것.

해야 할 일이 정해졌으면, 망설임 없이 행할 뿐이다.

캉!!

조금 전 보다 더 빠르게, 지크는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상대는 어렵지 않게  검을 받아내었다. 최단거리로, 최대속도로 움직이기 위해, 그 몸은 스스로를 꺾고, 비틀어, 더욱 흉측한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캉! 캉! 캉!

합을 나눌수록, 그 몸은 점점 빨라져갔다. 지크를 따라잡아갔다. 어느샌가  몸은, 두 개의 검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상황은 바뀌었다. 지크는 지팡이를 밀어내고, 가시를 피하고, 빛줄기를 막아내야 했다.

공격을 보조하던 정육면체는, 언제부터인가 방패로 모습을 바꾸고, 그의 방어를 보조하고 있었다.

수많은 공방이 오고가고, 두 사람은 정면으로 격돌했다.

팅!

동시에 맞부딪힌 두개의 검이, 서로를 밀어내며 그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상대는 곧바로 반대쪽 팔을 뻗어 그의 복부를 노렸다. 그 손끝에서는 검은 형태의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었다.

ㅡ!!

하지만 이번에는, 지크가  앞을 가로질렀다.

그의 외투가, 푸른 불꽃을 머금은 그 옷이, 상대의 몸을 관통했다.

"하아.. 결국은 레기아를 이런 곳에 쓰게 되는군."

그는 비수처럼 박혀있는 옷 갈래들을 빼내고, 검을 줍기 위해 물러났다.

상대는 허공을 때리며 주저앉았다. 그 상처에서, 꺼지지 않는 푸른 불꽃들이 몸을 키워갔다.

지크는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상대나 자신이나, 앞으로 30분도 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래. 30분.

그는 조용히, 끊임없는 악몽을 보여주는 회중시계를 꺼내었다. 이것을 꺼내들 때면, 언제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거지같은 일이지.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잊고 싶은 기억일 텐데도. 너를 잊는 것이, 그것보다 더 두려워서.. 그 악몽에서나마, 너를  수 있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서.."

떨리는 손으로, 그는 그 시계를 움직였다.

"너와의 약속을, 이어갈 수 있으니까."

거대한 빛의 기둥이,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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