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달리지 않는 자에게 내일은 없다 [2]
"자, 그럼 다들 밖으로 나가 볼까?"
"밖은 왜 나가는데? 여기서 해 그냥."
"한곳에 모여서 해야지. 여기서 하면 하는 사람이 누군지도 다 안 보이잖아."
하고 싶은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그렇게까지 해줘야 되냐고.
"말이 많군. 빨리 나가라."
갑자기 바깥 공기를 쐬고 싶은 기분이다.
"흠흠, 좋아. 우선 주장을 정하자."
'존나게도 끌려왔구만.'
'너 때문이잖아, 이 새끼야.'
마법사가 팔꿈치를 쑤셔댔다.
팔려나가는 노예새끼들 마냥 서 있는, 여섯 놈의 등신들을 훑어보았다.
마법사와 몬드 할배, 마부, 늑대, 마왕에 젠까지, 아주 편식도 안 하고 골고루 납치를 해왔다.
"야, 잠깐만, 잠깐만."
"응? 왜 그래, 오로넬?"
"늑대가 왜 끼어있냐고 늑대가. 그럼 저놈 있는 팀이 무조건 이기잖아."
"어.. 그런가?"
"그런가 좋아하네. 아무나 한 번 뛰어봐라. 이길 수 있는 놈이 있는지. 4족 보행 무시 하냐?"
"그럼 같은 4족 보행으로 상대하면 되지. 라보는 나랑 로드가 상대할게."
시발, 그럼 달리기가 아니잖아.
"아! 그렇게 하면 되겠다."
"또 뭐가?"
이놈이 혼자서 뭔갈 납득할 때가 제일 무섭다.
"주장. 라보랑 조지가 하면 되잖아."
"저 새끼 방금 말 타겠다고 한 건 들었냐?"
"한 팀에 한 번, 4족보행 찬스. 좋잖아?"
속도나 비슷하면몰라, 저 늑대놈이 한 번도 마부를 이기는 꼴을 못 봤는데, 잘도 찬스란 소리를 지껄인다.
"4족 보행 찬스가 한 번이라면, 조지의 말 하나를 빌려서 타도 되는 거 아니야?"
마법사가 끼어들었다. 발상의 전환인지 뭔지는 몰라도, 평범하게 개소리처럼 들린다.
"그렇게 말을 탔다고 치고, 그 다음은? 늑대 저놈은 뛰지 말라는 거냐?"
"두 발로 뛰면 되지. 지금도 두발로 서 있잖아."
"너도 네 발로 뛸 수 있는 건 아냐? 그렇게 뛰면 좆이나 빠르겠다, 그지?"
"아니, 요점이 그게 아니잖아, 이 새끼야. 한 명을 걷게 해도 될 정도로 찬스의 이점이 크다는 거지."
"그럴 거면 달리기 시합 같은 건 때려치우고 경마를 했지."
"그것도 그렇네. 그냥 경마나 하지 않을래, 시트린?"
"하겠냐?"
잠잠히 듣고만 있던 흰놈이 검에 손을 얹었다. 마법사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망했군."
"망했지."
"뭐야, 조지랑 라보가 주장인 거야? 나랑 시트린이 아니라? 마왕 대 용사. 주장을 할 거면 이 정도 지명도는 돼야지."
"어. 그렇게 말하니까, 갑자기 나도 주장이 하고 싶어졌어."
이 용사놈은 대체 뭐가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그럼 내 금 같은 시간 좀 그만 조지고, 빨리 너네 둘이서 팀 나눠. 아무도 그딴 거 관심 없으니까. 늑대 얘기는 그 뒤에 씨불이면 되잖아."
"진짜 그래도 돼?! 내가 주장한다? 용사팀 주장 시트린 한다?"
"제발 해주라. 술 마시다 끌려 나와서 그딴 거 까지 해야 되겠냐?"
"응원 고마워 오로넬. 보답으로 내가 이기면, 널 제일 먼저 뽑아줄게!"
이 놈은 다섯 글자 이상은 귀에 안 들어오는 병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 난 이기는 팀 가고 싶으니까, 먼저 뽑지 ㅁ.."
-가위 바위 보!!
"앗싸!! 오로넬, 이쪽으로 와!"
"시발."
"음.. 그럼 난 누굴 뽑지.."
마왕은 남아 있는 7명의 노예들을 심사하고 있었다.
"좋아, 시오. 이쪽으로 와."
이 새끼들 대체 뭔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누가 더 '빠른지' 겨루는 승부면서, 왜 제일 느린 놈들을 뽑아 가냐고. 4족 보행 동물이나, 4족 보행 동물을 탈지도 모르는 놈을 뽑아야지.
-가위바위 보!
"앗싸! 또 내가 이겼다!"
"아, 또 졌잖아?!"
이기려면 가위좀 그만 내라, 이 등신 마왕아.
이 새낀 바위밖에 안 내고, 저 새낀 가위밖에 안 내고. 아주 미친놈들끼리 죽이 착착 맞네, 그냥.
"그럼.. 누구를.. 으음.."
"야, 늑대 뽑아, 늑대!"
"음.. 그러니까.."
"야! 늑대 뽑으라고! 이기기 싫냐?!"
"좋아! 데이린, 이쪽으로 와!"
"아오."
팀원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어 처먹는 주장놈이다.
"나도 빨라."
꼬맹이는 기분이 상했는지 한 마디를 툭 던지곤 내 옆에 섰다.
생각해보니 이건 평범한 시합이 아니다.이 등신들이 참가하는 시합이다. 규칙 같은 건, 한없이 0에 가까울 거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조건 하에 꼬맹이 정도의 인력이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다. 달리기는 몰라도, 이것이 경쟁인 이상, 상대를 줘 패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럼 내가 라보 뽑아야지. 라보, 이리 와."
"아, 네."
어색한 2족 보행으로 쭈뼛쭈뼛 걸어가는 늑대였다.
"몬드 아저씨!"
이젠 가위바위보도 하지 않는다. 어차피누가 지고, 누가 이길지 알고 있기 때문일까? 그걸 알고 있으면 왜 다른 걸 낼 생각은 못 하는 걸까?
"젠!"
마지막으로 남은 건 마부와 흰놈이었다. 마부는 몰라도, 설마 흰놈이 떨이로 남다니, 생각치도 못했다.
달리기든 누굴 패는 거든, 저 놈 하나만 있으면 5인분은 족히 해낼 텐데, 주장이란 놈들이 성능은 안 보고 자기 꼴리는 대로 노예들을 뽑아대니, 저런 승리 보증 수표가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것이다.
마왕은 뭐, 껄끄러운 사이니 이해는 한다만, 용사 이 놈은 자기가 이 지랄을 하고 있을 수 있는 게 누구 덕분인지도 잊은 건가?
"조지!"
그런 모양이다.
"그럼 난... 어."
마지막 떨이를 지목하기 위해 들었던 손가락을 떨구는 마왕이었다.
"왜 그러지, 나디아? 나는 지목하기 싫다 이건가?"
그리 말하는 흰놈의 주먹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건 용사가 뽑아주지 않았다는 섭섭함일까, 마지막까지 남았다는 창피함일까.
"아, 어, 으음. 그럼지, 지크.."
지목을 받은 흰놈은, 성큼성큼 자신을 뽑은 주장을 향해 걸어갔다. 어디까지 걸어가는지, 그놈의 멱살을 잡고서야 흰놈은 멈춰 섰다.
"말해두는데 패배는 주장 책임이다. 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겠지?"
명백한 화풀이였다. 터질 걱정이 없는 샌드백. 이놈에게 마왕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자, 그럼! 달리기 시합 시작!!"
"넌 무슨 스포츠도 혼자서밖에 안 해봤냐? 무슨 팀을 뽑자마자 시작하겠다고 지랄이냐, 지랄은."
"엥? 바로 시작하면 되는 거 아니야?"
"하.. 시트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뛸지, 달릴 순서는 어떻게 할지를 정해야뛰든 말 거 아니야. 제발 ㅈ.. 음, 아니."
심한 말을 삼키는 마법사였다. 저 용사놈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한 이유는, 아마도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남을 것이다.
"뭐 코스는 대충 산 아래에서 가게까지 하면 될 거고, 순서는 니들끼리 알아서 정하면 되는데, 제일 중요한 게 빠졌잖아."
"뭔데?"
"규칙."
그래, 규칙. 여러 인간의 합의 하에, 지키기로 약조하는 법칙. 이 최소한의 질서조차 만들어 두지 않으면, 살육전으로 바뀔 것이 눈에 훤한, 이 이름뿐인 시합에서, 내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에이, 규칙 같은 거 일일이 신경 쓰면, 즐길 것도 못 즐긴다구. 편하게 하자, 편하게."
"아니. 딱 두 개. 두 개만 기억하라고. 다리가 멈추면 실격. 상대를 빈사에 이르게 하는 공격은 금지. 알겠냐?"
"음.. 멈추면 실격이랑.. 빈사에 이르게 하는 공격..? 달리기 시합이라니까, 오로넬? 두 번째건 정말 필요한 거 맞아?"
필요하다. 존나게.
"둘 다 꼭 필요한 거니까, 저놈들한테도 말해주고 오라고."
어느샌가 자리를 벗어나서 연장을 갈고 있는 마왕팀 놈들을 가리켰다.
용사가 돌아오자, 그놈들의 따가운 시선이 내 쪽을 향하는 게 느껴졌다. 역시 이 새끼들은, 곱게 뛸 생각이 없었다.
"이제 순서를 정하면 되는 거야?"
"그래. 저쪽은 아마 마법사가 순서를 정하고 있겠지. 저놈이 할 법한 배치는 대충 이런 모양이니까, 맞붙으려면 이렇게ㅡ"
삑ㅡ!!
예상은 얼추 맞은 듯했다. 첫 번째 주자인 젠의 상대로 몬드 할배가 나갔으니, 아마 시작부터 싸움이 나는 건 막아냈을 거다. 걱정했던 흰놈의 상대도 꼬맹이가 걸렸으니, 나름 해 볼만 할 것 같다.
"야."
"뭐."
그리고 나와 마법사는, 세 번째 지점에서 마주한 참이었다.
"이 새끼, 열심히 고민하는 척 하더니, 결국 자기는 제일 편한 자리로 왔구만?"
"그거 너한테도 그대로 해당되는 거 알지?"
"아니? 난 니 배치를 예측해서 등신들을 맞배치 하다 보니, 남은 게 이 자리밖에 없었던 것뿐이거든? 처음부터 꿀 빨 생각으로 이 자리를비워 둔 너랑은 다르게?"
"그게 무슨 소리지? 예측을 했다고? 니가? 내가 예측을 당해준 건지도 모르고 우쭐해져서는, 너무 당당해서 웃음도 안 나오네."
"넌 안 되겠다. 내가 봐주려고 했는데, 알아서 자기 복을 걷어차네."
"덤벼보던가, 이 새끼야. 나 총 있는 거 알지? 그딴 이쑤시개로 날 찌를 수나있을 거.."
쾅!!
돌. 나무. 아무튼 뭔가 큰 게 날아왔다. 코스에서 한참 벗어난길이긴 했지만, 아래쪽에서 누군가가 올라오고 있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죽어라 마왕!!"
"용사ㅡ!!"
그것들과 함께 날아오고 있는, 두 놈의 목소리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