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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화 〉달리지 않는 자에게 내일은 없다 [3] (92/108)



〈 92화 〉달리지 않는 자에게 내일은 없다 [3]

삐ㅡ익!!

중턱 언저리에서 호루라기가 울렸다.  말도 안 되는 달리기 시합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젠과 몬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질주를 시작했다.


그들을 여기까지 데려 오는 데는 엄청난 강제력이 작용했지만, 승부라는 영역에 들어선 순간,  이상 강제력은 필요치 않았다.

"오, 이거 의외군. 자네는 이런 일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이런 일은 관심 없지만, 승패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저는 노장께서야 말로 이런 일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만."

"몸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단련이라네. 내 나이가 되면 하루만 움직이지 않아도 몸이 삐걱거려서 말이야."

젠은 옆을 달리는 노인의 몸을 흘겨보았다. 도형을 박아 넣기라도 한 것처럼 울퉁불퉁한 그 몸은, 자신에게 부딪히는 모든 것을 박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역시, 노장께서는, 늙으셔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젠은 돌부리들을 넘으며 몬드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산길이라 해도 그 근본은 산이니, 돌부리가 있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운도 실력이라 했던가, 유독 젠의 코스에만 작은 돌부리들이 한 가득이었다.


"하하! 이것도 현역 때에 비하면 한심한 수준이라네! 단련을 더 늘려도 나이는 어떻게  수 없구만!"

다음 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달릴  있는 거리는, 이제 절반만이 남아있었다.


"아, 그리고. 나도 승부에는 아주 관심이 많다네."

그렇게 말하며, 몬드는 셔츠를 들어올렸다. 드러난 복부에는 검은색의 띠가 메어져 있었다.


"용사가 마왕한테 져서는 안 되는 일이지. 안 그런가?"


쿵!!

바닥에 균열이 일어날 정도의 괴상한 띠만을 남겨둔 채, 몬드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쾅!!


보다 큰 소음을 흩트리며, 시트린이 출발했다.

~

"하하하하하!!"


시트린은 웃고 있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웃음이 나왔다. 그저 달린다는 쾌감에 젖어, 온몸이 열기로 가득 찼다.


"역시 누군가로부터 전달받은 물건을 들고 달리는  최고야! 날 믿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흥분이 가라앉지 않잖아!!"


몬드에게서 건네받은 바톤을 더욱 죄이는 시트린이었다.


그러나 그 잠시의 환희가,  남자를 불러들였다.


"으아아아아아!!!!"

시트린이 뒤를 돌아본 그 순간까지, 나디아는 그녀와의 간극을 극한까지 좁히는데 성공했다. 달리는 것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그였다. 이 400년 동안, 자신이 얼마나 지크에게 쫓겨 왔다고 생각하는가.

"하하하! 열심히 달렸지만 이제 소용없다고, 나디아!  상태로 다음 지점까지만 가면 우리 팀의 승리야!"

나디아는 생각하고 있었다. 시트린을 방심시킬  있는 말을.

다른 놈들은 그저,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인 달리기 시합일 뿐이겠지만, 그에게는 평범한 달리기가 아니었다. 이  걸음 한 걸음이, 지크의 분노와 직결된, 죽음의 레이스였다.

지면 확실히 죽고, 이겨도 죽을 지도 모르는 이 레이스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어떤 짓이라도 할 용의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말을 막 떠올린 참이었다.

"이..! 이!! 정정 당당하게 승부해라, 용사!!!"

마왕의 입으론 해서는 안 될 말이 나왔다.

"..!!!"

하지만 먹혔다. 제대로 먹혔다.


시트린은 이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더니, 제자리 뛰기를 하며 나디아와 나란히 섰다.

"마왕이 그딴 소리 하지마!!!"

그리고 그 머리를 향해, 바톤을 휘둘렀다.

ㅡ!!


주위의 바람이, 잠시나마 바톤의 지시를 따라 공간을 흔들었다. 그 작은 흔들림이, 자신을 노린 그 공격이, 덩달아 마왕의 무언가를 자극했다.

"..덤벼라 용사!!!"

자기가 벌린 판에 스스로 빠진 마왕은, 자기가 판을 벌린 것도, 빠진 것도 잊은 채, 머리를 비우고 바톤이란 이름의 검을 휘둘렀다.

쾅!!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저 미친놈들, 저러다 바톤이 박살나면 어쩌려고. 그보다 주변이 저렇게 조져지고 있는데 왜 바톤은 멀쩡한 거냐.


"와, 저게 곧 이쪽으로 온다는 말이지?"


"맞네. 저걸 뭔 수로 받냐?"

이럴 줄 알았으면, 용사놈의  같은 건 무시하고, 마부를 두 번째에 넣을 걸 그랬다.

마왕이 나올 거라고 하니, 입에 거품을 물고 자기가 나갈 거라고 설치더니, 결국 저 지랄을 하면서 이쪽으로 올 줄이야.

"음.. 던져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바톤은 손에서 손으로 전해주는 게 상식 아니냐? 던져서 받을 거였으면 꼬맹이랑 캐치볼만 해도 이겼겠다."


물론 그걸 받을 놈이 있어야겠지만.

"그러는 저건 상식으로 보이냐? 바톤으로 아주 칼싸움을 하고 있는데? 그리고, 시작하기 전에 정해둔 규칙은 두개뿐이었잖아."


"..생각해보니 그러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알고 있을 줄 알았지, 시발."


"그럼 던져 달라고 한다? 이번만, 우리만 하면 상관없잖아? 들킬 일도 없고."

확실히, 완전 범죄에, 시간까지 절약할 수 있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용사 꼴을 보고 있자니 깨달은  있다. 이 중에 달리기를 하고 싶은 놈은 한 놈도 없을 거란 걸.

"그래. 그게  빨리 끝나겠네. 니가 말 해봐."

그래도 내가 책임을 지긴 싫다.

"아니, 내가 생각해냈으니까 니가 해야지."


"생각해냈으니까 결과까지 니 손으로 쟁취하라고. 그러고도 니가 과학자냐?"


"이럴 때만 과학자지,  새끼가."

마법사가 주먹을 들어보였다. 그러나 내밀지는 않았다.


여기서  염병을 떨어봤자, 눈앞까지 다가온 '저것'들에게 말려들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곧, 마법사는 소리를 지르기 위해 숨을 삼켰다.


"나디아!! 바톤 이쪽으로 던져!!!"

자기 것만 챙기겠다는 의지가 듬뿍 담긴 말이, 공간을 가로질러갔다.

'자, 잠깐만 시오! 조금만 기다려!!'


하지만 바톤은 날아오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저걸 검 대용으로 쓰고 있는 저놈들인데, 그걸 건네준다는 건, 맨주먹으로 검과 싸우겠다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시, 시트린 내 말 좀, 야!ㅡ'


두 놈 사이에서 모종의 대화가 오고 갔다. 그 동안에도 몇 개나 되는 돌과 나무들이 이쪽을 향해 날아왔다.


"야, 쟤들 뭐하는 거야? 던져 줄 기미가 없는데?"


"등신들한테도 여러 가지 사정이 있는 거란다."


마법사와 나는 기다렸다.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바톤도 없는 주자들은, 가만히 서 있는  밖에 할 수 있는  없으니까.

-받아!!!

그리고 마침내.


바톤이 날아왔다.


"잘 있어라 오로넬!  먼저 간다!"

높게 도약해 그것을 먼저 집은 마법사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 저렇게 날쌨는가 싶을 정도로 빠르게, 그놈은 내 눈에서 사라져갔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내가 서있는 곳을 향해 그것이 날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발을 움직여, 다음 주자에게 향했다.


물론 걸어서.

뒤에서는 아직도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고, 앞에서는 멍청하게 뛰어가는 마법사가 보였다.


용사의 기분을 만족시킨 시점에서, 이 짓거리에 더 이상 동참해야 할 이유는 없는데, 참 열심히도 사는 놈이다.

어. 멈췄다. 멈추면 규칙 위반인데? 저 새끼 왜 저..

"왜 안 뛰냐고 이 새끼야!!"

오르막에서 도약해, 장난 아닌 힘이 축적된 마법사의 무릎이, 방금 막,  복부에 안착했다.

"우어억!"

"니가 안 뛰니까 내가 병신 같잖아!"


병신 맞잖아, 미친..!


"그보다..! 너 아까 멈췄지? 규칙 어겼지? 시발,  끝났다. 병신 짓이란 걸 알았으면 끝까지 밀고 나갔어야지. 원래 어중간하게 끝내는 병신 짓이 제일 병신 같은  모르냐?"

"말해 보던가."


"이게 정신이나갔나, 규칙 어겨놓고 존나 당당하네?"

"한 번  뛰고 싶으면 말 해보던가. 시트린이 반칙  같은 걸로 만족할 거 같아? 무조건 한  더 뛰자고 할 걸?"


"..."

미래가 보였다. 반칙  같은  나와선 안 된다. 존재해선 안 된다. 그랬다간, 쳇바퀴를 구르는 쥐새끼마냥, 영원한 달리기의 굴레 속에 갇혀버리고 말 것이다.

"정신이 들어?"


"시발, 어떡하냐?"

"이제 달리기가 싫든, 좋든, 반칙이 어떻든 저떻든, 상관없어. 중요한 건, 시트린을 어떻게 만족시키느냐지."

"그걸 어떻게 하냐고. 사이좋게 손이라도 잡고 뛰어?"


"아니. 일단 뛰어. 존나게 뛰어. 빨리!"

마법사가 무릎을 들더니, 도망치듯이 달려갔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이 소름끼치는 시선을 눈치 못 챌 리가 없었다.

집에 돌아갈 때만큼이나 빠르게,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는, 그 눈을 피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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