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달리지 않는 자에게 내일은 없다 [4]
헉.. 헉.. 헉..!
달렸다. 아무튼 달렸다. 존나게 달렸다.
그 눈은 마치, 자기는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어딘가에 드러누워 있는 후임을 발견한 듯한 눈이었다.
'어, 이 녀석 뭐하고 있는 거지?' 같은 사사로운 분노가 아니라.
'어, 이 녀석 뭐지?' 같은 순수한 호기심. 있을 수는 없는 일을 처음 목도한 자의 표정. 그게 바로 내가 보았던 눈이다.
"야! 괜찮겠지? 안 들켰겠지? 그냥 싸우고 있는 줄 알았겠지?"
앞을 달리고 있는 마법사에게 말했다. 앞이라 해도, 이젠 거의 한 두 걸음 차이지만.
"내가 어떻게 알아! 일단 티 안 나게 계속 뛰라고!"
"이미 다 봤는데 티가 나고 안 나고가 무슨 소용이냐고!?"
이미 멈춰있던 순간을 목격당한 이상, 어줍잖은 달리기로는 어림도 없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용사놈은 얼마든지 반칙패를 선언해 버리겠지.
대충 하는 대신 같은 짓을 두 번 하겠냐, 진심으로 하는 대신 같은 짓을 한 번만 하겠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할 것이다.
이 등신짓은, 대충하든 전력으로 하든, 똑같은 한 번의 등신짓이기 때문이다. 조금 편하자고 등신 소리를 두 번 듣느니, 병신 소리를 듣더라도 단 한 번만 듣고 만다.
이제, 할 수 밖에 없다.
"티가 문제가 아니라 ㄷ.."
마법사를 앞지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체력만 넘쳐날 뿐이지, 달리는 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않은 놈이다.
등신이 될 각오를 다진 나는, 앞질러진 그놈에게..
빡!!
바톤을 후려쳤다.
"이..!"
우스꽝스러운 면상이 더욱 구겨졌다. 그 눈에서는 혼란과 분노가, 서로 자신의 차례라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내면에서 무언가가 부풀어 올랐다. 마음 속 한켠이 쑤셔왔다.
아.. 그래.
이거, 마음대로 패도 되는 거였지?
등신 한 명을 원하는 만큼 때려도 된다. 그것도 다른 놈들이 아닌, 존나 만만한 마법사를. 나는 어째서 이 황금 같은 기회를 날려버리려고 한 거지?
용사 이 새끼, 가끔 씩은 좋은 일도 하는 놈이었구나.
"때렸겠다, 이 씹새끼가!!"
마법사가 바톤을 휘둘렀다. 그러나 닿지 않았다. 뒤에서 휘두르는 바톤은 결코 닿을 일이 없다는 걸, 이 녀석은 모르고 있다.
"때렸다, 때렸다. 어쩔 건데, 어쩔 건데?"
나는 완전히 우위에 선 채, 이 때다 싶어 마법사를 두들겨 팼다. 곧 자신의 위치를 깨달은 마법사는, 공격 행위를 멈추고 방어에만 몰두하기 시작했다.
"왜 얼굴만 패냐고!!"
그리고 이상한 곳에서 화를 냈다. 패는 건 어느샌가 받아들인 모양이다.
"그럼 다른 곳도 패줘? 뭐 얼굴 말고는 팰 곳도 없구만. 가슴도 없는 게."
'어ㅡ이! 오로넬! 이쪽이야!!'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그곳까지는 1분도 채 남지 않았다. 이 합법적인 폭력을 곧 끝내야만 하다니, 아쉬움이 앞을 가린다.
"너 저기에 도착하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난 그때부터 시작이거든? 내가 총 있다고 했지?"
앞을 가리고 있던 건 아쉬움이 아니라, 내 미래였던 듯하다.
"총이라면 그거잖아? 맞으면 뒤지잖아? 분명 상대가 빈사에 이르는 공격은 금지라고 했을 텐데? 규칙 안 들었냐?"
최대한 좋은 말로 타일러 본다.
"그래서 지금 안 쓰고 있는 거란다, 이 새끼야. 그 규칙이 적용되는 건 상대가 '뛰고 있을 때' 잖아? 게다가 난 이미 멈추면 안 된다는 규칙도 어긴 몸이라고. 진심으로 규칙 따위가 니 목숨을 지켜줄 거라 생각하는 거야?"
정중한 거절의 말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내 목숨은 저기까지인가 보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안 패면?"
"..그래도 죽일 건데?"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마법사였다.
"그럼 지금 존나 패야겠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한 대라도 많이 때리는 것. 총을 쥐지도 못하게 두들겨 패는 것. 아무튼 패는 것 밖에 없었다.
"아! 아! 작작해라 진짜?!"
"지금이라도 총을 버린다면 용서해주지."
"이, 시발. 용서라는 말이 누가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는 알고 하는 거냐!?"
"빨리 안 버려? 안 버려? 이래도? 이래도?"
독한 년. 이제 바톤이 불쌍해질 지경이다. 분명 이 녀석은, 등신들 머리통이나 때리라고 태어난 물건이 아닐 텐데 말이다.
"오로넬! 수고했어!"
"!!!"
그리고, 내 손에서 그 녀석이 떠나갔다.
"시오 씨, 이쪽으로!"
"이 새끼..!!!"
마법사의 손에도 자유가 찾아왔다. 그 녀석은 1초의 낭비도 없이, 가운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뭐야, 오로넬!? 니 차롄 끝났잖아? 바톤 넘겨줬으니까 이제 쉬어!"
아니, 그럴 순 없다. 니 옆에서 계속 달리는 것만이, 내 목숨을 연장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신경 쓰지 말고 넌 계속 뛰라고! 꼴리는 데로 뛰다가 알아서 그만 둘 거니까!"
"니가 이렇게 뛰는 걸 좋아하는지 몰랐네."
"거 사람이 가끔은 운동도 하고 그래야지."
"느낌이 싸한데?"
멈춰 서서 총구를 움직이고 있던 마법사는, 다시 내 뒤를 쫓기 시작했다. 표적 옆에 이 일과 무관계한 인간이 있어서야, 마음대로 쏘지도 못하겠지.
"야! 뒤에! 시오는 또 왜 오는데!?"
"저 녀석도 뛰는 걸 좋아하나보지."
"아니, 좋아서 뛰는 눈이 아니잖아! 너 또 시오한테 뭔 짓 했지?!"
"아니? 아무 짓도? 담배를 못 빨아서 그런 거 아니냐? 가게에 두고 왔나보지."
"아 웃기지 말고! 나 까지 말려드는 일은 아니겠지!?"
눈치가 빠르네.
"그보다 이길 생각이나 하라고, 이길 생각이나. 늑대는 이미 앞질러가서 보이지도 않는구만. 중간까지 이기고 있었는데, 지기만 해봐라? 용사놈이 뭔 개소리를 하든 니 탓이라 할 거니까."
솔직히 심각하기로 따지면 그게 더 중대한 문제다.
..10분 전이었다면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부의 말 사용 허가를 어떻게든 따 내는 거였는데.
"그건 걱정하지 마! 나한테 방법이 있으니까!"
"방법은 무슨, 지금 실제로 털리고 있는 니 꼴을 보라고."
휘ㅡ익ㅡ!!
마부는 가뜩이나 차오르는 숨을 힘껏 모은 뒤, 그것을 이빨 사이로 흘려보냈다. 그 소리는 나무를 타고, 바람을 타고, 숲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다그닥! 다그닥!
그것들이 나타났다.
4족보행계의 정점. 흰색 괴물과, 검은색 괴물이.
"야! 이 미친놈아! 아까 말 타는 거 금지라고 한 거 못 들었냐! 저딴 걸 타고 가다가 흰놈한테 걸려봐라! 시비 걸릴 건덕지가 한두 개가 아니라고!"
"훗, 오로넬. 넌 나를 아주 과소평가 하고 있어."
당연하지. 좆밥인데.
"그러니까, 내가 로드나 킬을 타면 안 되는 이유는, 내가 달리지 않기 때문인 거잖아?"
척!
마부는 세차게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번엔 대체 무슨 등신 같은 짓을 하려는 걸까.
"일자진!!"
휘파람 소리만큼이나 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괴물들이 코스 안으로 난입했다. 그놈들은 일자로 선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란히, 마부의 앞을 달렸다.
"핫!"
마부가 도약했다.
그리고 그 등에 착지했다.
"그렇다면 달리면 되잖아. 이 녀석들의 등에서."
말들이 속도를 올렸다.
그 위에서, 마부는 발을 움직였다.
검은 말의 등을 달려 흰말의 등 위로, 뒤에 남겨진 검은 말이 흰말을 앞질러 가, 마부는 다시 검은 말의 등 위로, 그리고 그 다음은 흰말이, 이것을 무한히 반복했다. 이걸 설명하고 있는 나도, 저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니,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오로넬!! 드디어 혼자 남았구나!!"
저 미친 짓에 동참하지 않으면, 다른 미친 짓은 더 이상 볼 수도 없게 될 거란 거다.
"이이익, 시발!"
눈을 질끈 감고,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뭐야, 너. 뛰고 싶어서 뛰는 거 아니었어? 역시 저 뒤에 계신 분한테 죄 지은 거 맞지?"
"우욱, 지랄하지 말고 뛰기나 해. 우욱, 저기 늑대 보인다."
그 위는, 정말이지 등 그 자체였다. 단단하면서도 물렁하고, 평평하면서도 구불거리는 그것은, 이 녀석처럼 땅을 달리는 감각으로는 도저히 뛰어 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발을 내밀 때마다 헛디딜 뻔하고, 몸은 존나게 흔들리는 탓에, 내가 직접 이 몸을 움직이고 있는데도 멀미가 날 지경이다.
"하하! 라보! 따라잡았다!"
"엑, 조지 씨! 그거 누가 봐도 반칙이잖아요!"
바톤을 입에 물고 있어서 그런지 늑대의 말을 이해하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대충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내가 뛰고 있으니까 전혀 문제없는 걸?"
"아니, 그러니까 그게 반칙이라고요ㅡ!!"
늑대의 말이 또박또박하게 들렸다. 그 입을 막고 있던 물건이 없어졌다는 거겠지.
"어, 어어!!"
말들이 멈췄다. 다음 녀석의 등을 밟기 위해 뻗어졌던 내 발은, 땅을 찾아 힘없이 아래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자, 꼬마! 빨리 가!"
"지크 씨! 바톤 받으세요!"
ㅡ!!!
도저히 달릴 때 나오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굉음을 내지르며, 마지막 주자들이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