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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화 〉달리지 않는 자에게 내일은 없다 [4] (93/108)



〈 93화 〉달리지 않는 자에게 내일은 없다 [4]

헉.. 헉.. 헉..!

달렸다. 아무튼 달렸다. 존나게 달렸다.

그 눈은 마치, 자기는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어딘가에 드러누워 있는 후임을 발견한 듯한 눈이었다.

'어, 이 녀석 뭐하고 있는 거지?' 같은 사사로운 분노가 아니라.

'어,  녀석 뭐지?' 같은 순수한 호기심. 있을 수는 없는 일을 처음 목도한 자의 표정. 그게 바로 내가 보았던 눈이다.

"야! 괜찮겠지?  들켰겠지? 그냥 싸우고 있는 줄 알았겠지?"

앞을 달리고 있는 마법사에게 말했다. 앞이라 해도, 이젠 거의 한 두 걸음 차이지만.

"내가 어떻게 알아! 일단 티  나게 계속 뛰라고!"

"이미 다 봤는데 티가 나고 안 나고가 무슨 소용이냐고!?"

이미 멈춰있던 순간을 목격당한 이상, 어줍잖은 달리기로는 어림도 없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용사놈은 얼마든지 반칙패를 선언해 버리겠지.

대충 하는 대신 같은 짓을  번 하겠냐, 진심으로 하는 대신 같은 짓을 한 번만 하겠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할 것이다.

이 등신짓은, 대충하든 전력으로 하든, 똑같은  번의 등신짓이기 때문이다. 조금 편하자고 등신 소리를 두 번 듣느니, 병신 소리를 듣더라도 단 한 번만 듣고 만다.

이제,  수 밖에 없다.

"티가 문제가 아니라 ㄷ.."

마법사를 앞지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체력만 넘쳐날 뿐이지, 달리는 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않은 놈이다.

등신이  각오를 다진 나는, 앞질러진 그놈에게..

빡!!

바톤을 후려쳤다.

"이..!"

우스꽝스러운 면상이 더욱 구겨졌다.  눈에서는 혼란과 분노가, 서로 자신의 차례라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내면에서 무언가가 부풀어 올랐다. 마음 속 한켠이 쑤셔왔다.

아.. 그래.

이거, 마음대로 패도 되는 거였지?

등신 한 명을 원하는 만큼 때려도 된다. 그것도 다른 놈들이 아닌, 존나 만만한 마법사를. 나는 어째서  황금 같은 기회를 날려버리려고 한 거지?

용사 이 새끼, 가끔 씩은 좋은 일도 하는 놈이었구나.

"때렸겠다, 이 씹새끼가!!"

마법사가 바톤을 휘둘렀다. 그러나 닿지 않았다. 뒤에서 휘두르는 바톤은 결코 닿을 일이 없다는 걸, 이 녀석은 모르고 있다.

"때렸다, 때렸다. 어쩔 건데, 어쩔 건데?"

나는 완전히 우위에 선 채, 이 때다 싶어 마법사를 두들겨 팼다. 곧 자신의 위치를 깨달은 마법사는, 공격 행위를 멈추고 방어에만 몰두하기 시작했다.

"왜 얼굴만 패냐고!!"

그리고 이상한 곳에서 화를 냈다. 패는  어느샌가 받아들인 모양이다.

"그럼 다른 곳도 패줘? 뭐 얼굴 말고는 팰 곳도 없구만. 가슴도 없는 게."

'어ㅡ이! 오로넬! 이쪽이야!!'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그곳까지는 1분도  남지 않았다.  합법적인 폭력을 곧 끝내야만 하다니, 아쉬움이 앞을 가린다.

"너 저기에 도착하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난 그때부터 시작이거든? 내가 총 있다고 했지?"

앞을 가리고 있던  아쉬움이 아니라, 내 미래였던 듯하다.

"총이라면 그거잖아? 맞으면 뒤지잖아? 분명 상대가 빈사에 이르는 공격은 금지라고 했을 텐데? 규칙  들었냐?"

최대한 좋은 말로 타일러 본다.

"그래서 지금  쓰고 있는 거란다, 이 새끼야. 그 규칙이 적용되는 건 상대가 '뛰고 있을 때' 잖아? 게다가  이미 멈추면 안 된다는 규칙도 어긴 몸이라고. 진심으로 규칙 따위가 니 목숨을 지켜줄 거라 생각하는 거야?"

정중한 거절의 말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내 목숨은 저기까지인가 보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안 패면?"

"..그래도 죽일 건데?"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마법사였다.

"그럼 지금 존나 패야겠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대라도 많이 때리는 것. 총을 쥐지도 못하게 두들겨 패는 것. 아무튼 패는 것 밖에 없었다.

"아! 아! 작작해라 진짜?!"

"지금이라도 총을 버린다면 용서해주지."

"이, 시발. 용서라는 말이 누가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는 알고 하는 거냐!?"

"빨리 안 버려? 안 버려? 이래도? 이래도?"

독한 년. 이제 바톤이 불쌍해질 지경이다. 분명  녀석은, 등신들 머리통이나 때리라고 태어난 물건이 아닐 텐데 말이다.

"오로넬! 수고했어!"

"!!!"

그리고, 내 손에서 그 녀석이 떠나갔다.

"시오 씨, 이쪽으로!"

"이 새끼..!!!"

마법사의 손에도 자유가 찾아왔다. 그 녀석은 1초의 낭비도 없이, 가운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뭐야, 오로넬!? 니 차롄 끝났잖아? 바톤 넘겨줬으니까 이제 쉬어!"

아니, 그럴 순 없다.  옆에서 계속 달리는 것만이, 내 목숨을 연장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신경 쓰지 말고 넌 계속 뛰라고! 꼴리는 데로 뛰다가 알아서 그만 둘 거니까!"

"니가 이렇게 뛰는 걸 좋아하는지 몰랐네."

"거 사람이 가끔은 운동도 하고 그래야지."

"느낌이 싸한데?"

멈춰 서서 총구를 움직이고 있던 마법사는, 다시 내 뒤를 쫓기 시작했다. 표적 옆에 이 일과 무관계한 인간이 있어서야, 마음대로 쏘지도 못하겠지.

"야! 뒤에! 시오는 또 왜 오는데!?"

"저 녀석도 뛰는 걸 좋아하나보지."

"아니, 좋아서 뛰는 눈이 아니잖아! 너  시오한테  짓 했지?!"

"아니? 아무 짓도? 담배를 못 빨아서 그런 거 아니냐? 가게에 두고 왔나보지."

"아 웃기지 말고! 나 까지 말려드는 일은 아니겠지!?"

눈치가 빠르네.

"그보다 이길 생각이나 하라고, 이길 생각이나. 늑대는 이미 앞질러가서 보이지도 않는구만. 중간까지 이기고 있었는데, 지기만 해봐라? 용사놈이 뭔 개소리를 하든  탓이라  거니까."

솔직히 심각하기로 따지면 그게  중대한 문제다.

..10분 전이었다면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부의 말 사용 허가를 어떻게든 따 내는 거였는데.

"그건 걱정하지 마! 나한테 방법이 있으니까!"

"방법은 무슨, 지금 실제로 털리고 있는  꼴을 보라고."

휘ㅡ익ㅡ!!

마부는 가뜩이나 차오르는 숨을 힘껏 모은 뒤, 그것을 이빨 사이로 흘려보냈다.  소리는 나무를 타고, 바람을 타고, 숲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다그닥! 다그닥!

그것들이 나타났다.

4족보행계의 정점. 흰색 괴물과, 검은색 괴물이.

"야! 이 미친놈아! 아까 말 타는  금지라고 한 거 못 들었냐! 저딴 걸 타고 가다가 흰놈한테 걸려봐라! 시비 걸릴 건덕지가 한두 개가 아니라고!"

"훗, 오로넬. 넌 나를 아주 과소평가 하고 있어."

당연하지. 좆밥인데.

"그러니까, 내가 로드나 킬을 타면  되는 이유는, 내가 달리지 않기 때문인 거잖아?"

척!

마부는 세차게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번엔 대체 무슨 등신 같은 짓을 하려는 걸까.

"일자진!!"

휘파람 소리만큼이나 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괴물들이 코스 안으로 난입했다. 그놈들은 일자로 선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란히, 마부의 앞을 달렸다.

"핫!"

마부가 도약했다.

그리고 그 등에 착지했다.

"그렇다면 달리면 되잖아.  녀석들의 등에서."

말들이 속도를 올렸다.

그 위에서, 마부는 발을 움직였다.

검은 말의 등을 달려 흰말의 등 위로, 뒤에 남겨진 검은 말이 흰말을 앞질러 가, 마부는 다시 검은 말의 등 위로, 그리고 그 다음은 흰말이, 이것을 무한히 반복했다. 이걸 설명하고 있는 나도, 저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니,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오로넬!! 드디어 혼자 남았구나!!"

저 미친 짓에 동참하지 않으면, 다른 미친 짓은  이상 볼 수도 없게 될 거란 거다.

"이이익, 시발!"

눈을 질끈 감고,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뭐야, 너. 뛰고 싶어서 뛰는 거 아니었어? 역시 저 뒤에 계신 분한테  지은 거 맞지?"

"우욱, 지랄하지 말고 뛰기나 해. 우욱, 저기 늑대 보인다."

그 위는, 정말이지 등 그 자체였다. 단단하면서도 물렁하고, 평평하면서도 구불거리는 그것은, 이 녀석처럼 땅을 달리는 감각으로는 도저히 뛰어 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발을 내밀 때마다 헛디딜 뻔하고, 몸은 존나게 흔들리는 탓에, 내가 직접  몸을 움직이고 있는데도 멀미가  지경이다.

"하하! 라보! 따라잡았다!"

"엑, 조지 씨! 그거 누가 봐도 반칙이잖아요!"

바톤을 입에 물고 있어서 그런지 늑대의 말을 이해하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대충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지는 짐작할  있었다.

"아니? 내가 뛰고 있으니까 전혀 문제없는 걸?"

"아니, 그러니까 그게 반칙이라고요ㅡ!!"

늑대의 말이 또박또박하게 들렸다.  입을 막고 있던 물건이 없어졌다는 거겠지.

"어, 어어!!"

말들이 멈췄다. 다음 녀석의 등을 밟기 위해 뻗어졌던 내 발은, 땅을 찾아 힘없이 아래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자, 꼬마! 빨리 가!"

"지크 씨! 바톤 받으세요!"

ㅡ!!!

도저히 달릴 때 나오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굉음을 내지르며, 마지막 주자들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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