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달리지 않는 자에게 내일은 없다 [5]
ㅡ!!!
눈앞이 흙먼지로 뒤덮였다. 꼬맹이와 흰놈은 벌써 마부가 달려온 만큼의 거리를 달려가, 아니, 날아가 있었다.
가게에서 출발하는 마지막 주자는 첫 번째 주자가 출발했던 지점까지 달려가야 한다.
아무리 마지막 주자가 다른 주자들 보다 많이 달리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라 해도, 자기 차례까지의 거리를 다시 달려야 하는 건 무리가 아닌가생각했지만, 저놈들이면 딱히 그런 생각을 할 필요도 없었지 않나 싶다.
"오!! 그렇지! 데이린, 달려!"
"..뭐하고 있냐?"
망원경을 보며 시시덕거리고 있는 변태가 보였다. 분명 이놈은 지금 업무시간일 텐데 말이다.
"어, 오로넬 씨 오셨나요? 수고하셨어요. 전 오로넬 씨라면 걸어오실 줄 알았는데, 즐거운 듯이 달려와서 좀 의외였어요."
확실히, 중간까지는 재밌었지. 그땐 마법사가 날 죽일 수 없었으니까.
"아, 그리고 뒤에. 시오 씨도 오셨어요."
어?
"야, 오로넬. 존나게도 뒤지고 싶나보다..? 시발, 여기까지 도망을 쳐?"
마법사는 거친 숨을 뱉으면서도 한쪽 팔로는 내 목을 감아 움직임을 봉쇄하고, 다른 팔로는 총을 쥔 채 내 얼굴에 들이댔다.
"어.. 저기요, 시오 씨? 그거 내려두고 말로 하시지 않겠습니까?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무슨 오해일까요, 오로넬 씨? 지금 제 얼굴이 존나게 아픈데요?"
쑤셔대는 총구가 볼 아래에 숨어있는 이빨을 열어젖혔다. 이 총구가 불을 내뿜기 전에,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한다.
"나는 규칙 같은 거 어기지 않았고, 존나 정정당당하게 승부했을 뿐이라고. 여기에 니가 화낼 이유가 어디 있는데?"
"정정당당 좋아하네, 충분히 앞질러 갈 수 있었으면서 바톤으로 존나게 때려놓고!"
총구가 더욱 바짝 다가왔다.
"어.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니가 먼저 때렸지 않냐?"
사람이 갑작스레 쫓기다 보면, 당연한 사실도 잊을 때가 있다. 뭐 내가 이년을 팬 건 그냥하고 싶어서였지만, 운이 좋게도 나에게는 명분이 있었다.
"아."
총구가 서서히 내 볼에서 멀어져갔다. 나는 손을 올려, 그 총을 붙잡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너, 뭘 믿고 날쫓아 온 거냐..?"
조금 전까지 너무나도 당당한 표정으로 내 목숨을 요구하고 있던 아무개 씨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인간에게 '명분' 이라는 건, 그 정도로 중요한 거다.
"음..?! 으, 으음.. 그.. 오로넬 씨, 그거 내려두고 말하지 않을래요, 우리..?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네요."
"제 오해는 다 풀린 것 같은데요, 시오 씨. 이거 누르면 나가는 거 맞죠?"
"그.. 그치만 니가 더 많이 때렸잖아, 미친놈아!"
"지금 중요한 건 횟수가 아니라 선빵이잖.."
ㅡ!!!
굉음과 함께 돌풍이 불어왔다. 그 소리의 근원은, 말 할 필요도 없이 그곳이었다.
"뭐, 뭐야?!"
바람이 센 건지, 마법사가 가벼운 건지, 어쨌든 그놈이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 그걸 잡아줄 의리는 없고, 그저 쥐고 있는 총으로 그 등을 받쳐주기만 했다.
"야! 야! 이거, 그거지!? 방아쇠 당기지마! 당기지마 진짜로!"
"꼴 받게 하면 누를 거니까, 이 짓거리가 끝날 때까지 처신 잘 하고 있으라고."
진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마법사였다. 이걸 실전에서 사용하는 건 본 적이 없는데, 만든 놈이 저러는 걸 보니 어지간히 끝내주는 물건인가 보다.
"제리스, 망원경 하나만 줘라."
"네에~"
당연하다는 듯이 여분의 망원경을 건네주는 제리스였다.
"야, 움직이지 좀 마라. 팔이 흔들리잖아. 방아쇠 당겨져도 모른다?"
"바람 때문에 밀려나는 걸 어떡하라고. 하다못해 손으로 받쳐주던가..!"
"손은 이제 바빠질 예정이라 너한테 써 줄 짬이 안 나고, 정 힘들면 바짓가랑이라도 잡던가. 그건 봐줄 수 있는데?"
"니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바에야 총에 맞고 말지 이 새끼야!"
"그래? 그럼 수고해라. 난 저거 구경이나 할 테니까."
바람에 흔들리는 망원경을 잘 붙들어 안구에 가져갔다.
그것에 비치는 것은, 온 몸으로 공방을 펼치고 있는 두 등신. 무표정으로 공격을 받아내는 꼬맹이와, 그런 애새끼를 상대로 진심을 내고 있는 400살도 더 넘은 성인 남자였다.
애초에 저 두 놈은 달리고 있지도않았다. 한 발 한 발, 그저 땅을 걷어차고 있을 뿐인데, 어마무시한 속도로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놈들은 눈 깜짝할 새에 내가 출발했던 세 번째 지점을 지나쳤고, 그곳에서 쉬고 있던 용사와 마왕은, 각자의 아군을 응원했다.
"..저어기요오?"
"쯧."
혀를 차며 망원경을 내렸다. 하여튼 이놈들은 내가 뭘 하게 내버려두질 않는다.
"뭐."
마법사의 등이 총구에서 떨어져 있었다. 저놈들의 거리가 멀어진 덕분에 바람이 약해진 덕분인 듯하다.
"그.. 혼자 좀 심심한데, 보고 있는 거라도 좀 말해주면 안 될까?"
"담배라도 피던가."
"방금 다 폈는데."
"어쩌라고."
"할 게 없다고.저 녀석들이 올라올 때까지 가게에도 못 들어가잖아."
"그렇지."
그랬다간 오지게도 삐지겠지. 특히 용사놈이.
"'그렇지'가 아니라. 그러니까 니가 구경하고 있는 걸 나한테도 좀 들려달라고. 심심하잖아."
"둘이서 치고받는 것 밖에 없는데."
"아니, 진짜! 그걸 좀 생동감 있게 표현해달라는 말이잖아! 누가 저 둘이 싸우고 있는 거 몰라서 이러는 줄알아!?"
응? 왜 내가 혼나고 있는 것 같지?
"야."
"응? 어?! 어엇!"
갑작스레 날아오는 망원경을 호들갑을 떨며 받아내는 마법사였다.
"이걸 왜 주는 거야? 넌 안 보려고?"
"아니.니가 해 보라고. 생동감 넘치게. 그렇게까지 씨불였는데 당연히 할 수 있겠지? 안 느껴지면 손가락에 힘 들어간다? 들어가 버린다?"
삐걱이는 소리가 나게 총을 흔들었다.
"그, 그럼. 할 수 있지. 너무 놀라서 쏘지나 말라고."
마법사는 떨리는 손을 들어 망원경을 들여다보았다. 그 눈은 두려움에 젖은 채 목표를 탐색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눈은 안식을 찾은 듯, 힘이 풀린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야. 왜 가만히 있는데?뒤지고 싶냐? 빨리 뭐라도 씨불여 보시지?"
"그게.. 달리기, 끝났는데..?"
"뭐!? 지랄하네.내놔봐!"
망원경에는 아까까지만 해도 산을 내려가고 있던 두 놈이, 다른 등신들을 대동한 채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어..?"
아니, 아니, 그 잠깐 사이에? 난 아무것도 못 봤는데? 벌써?
결과는? 꼬맹이가 이긴 건가? 이겼어야 했을 텐데. 용사놈이 과연 결과에 승복할까? 만약 이 짓거리를 한 번 더 하게 된다면?
아니,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내가 안 할 거다. 어딘가로 사라질 거다. 하루에 등신짓은 한 번이면 족하단 말이다!
"얘들아, 우리 왔어! 오랜만에 뛰니까 상쾌하네! 다들 잘 뛰더라!"
!!!
'재경기' 사태가 발생하면 어떻게 도망칠지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벌써 등신들이 도착했다. 설마 여기도 뛰어서 온 건가? 이 미친놈들.
"그래서, 어느 쪽이 이겼는데? 용사냐 마왕이냐?"
우선, 용사의 판결을 들어야 한다. 이 판결에 따라서, 나는 도망칠 수도, 가게로 들어갈 수도 있다.
"아, 그거? 역시 궁금하지? 승부니까!"
자, 와라. 어떤 답이 나와도 나는 도망칠 준비가 되어있다.
"..비겼어! 데이린 무지하게 빠르더라. 지크 아저씨랑 동시에 들어오다니."
"뭐?"
비겼다고? 그 경우는 생각해두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니 그게 제일 애매한 결과잖아. 그렇게 좆 빠지게 달렸는데, 아무도 이긴 놈이 없다고? 그럼.. 그럼 시간만 버린 거냐?
"특제 스튜.. 못 먹는 거야?"
"아, 아니야 데이린. 분명 아저씨가 만들어 놨을 거야! 들어가서 맛있게 먹자!"
어? 이거 들어가는 분위긴가? 꼬맹이 때문에? 그래. 잘 한다 꼬맹아. 더 슬퍼해라. 더 아쉬워해라! 저놈이 다시 달릴 생각도 못 할 정도로!
"어. 그럼 들어가는 거야?"
마법사가 노골적으로 기뻐하는 목소리를 냈다. 연기도 못 하면 가만히 찌그러져 있으라고, 제발. 괜히 이 녀석 기분이 상하기라도 했다간..!
"응. 들어가야지! 역시 달린 뒤엔 시원한 술이잖아?"
세상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용사는 꼬맹이를 데리고 가게로 들어갔다. 그 뒤를 흰놈이, 또 그 뒤를 다른 등신들이 잇따랐다.
뭐야. 처음부터 더 뛸 생각이 없었잖아, 저놈.
김이 빠진다. 너무나도 허무하다. 지금까지의 내 걱정은 뭐였단 말인가. 애초에 결과가 상관없었으면, 뭘 위해 시합을 하자고 한 거지?
.
.
.
"..갑자기 달리기는 왜 하자고 한 거냐고? 음.. 왜였지?"
"뭐? 그럼 우린 왜 뛴 거야아아."
"에이, 재밌었잖아! 술도 맛있어졌고!"
마부가 눈치 있게 질문을 했지만, 이미 본인에게도 그 답은 잊혀진지 오래였다.
가게는 찝찝한 공기와 땀 냄새로 가득차있었다. 창문과 문을 열어도, 10명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그것을 씻어내기엔 부족했다.
저장고에서 갓 올라온 럼주가, 시원하게도 목을 훑으며 내려갔다. 땀을 흘리는 건 싫어하지만, 땀을 흘린 뒤에 마시는 술을 싫어할 놈은 없다.
"흐아ㅡ! 오늘은 술이 달구만."
마법사는 드디어 정신이 나간 모양이었다.
"오오, 특제 스튜..!"
꼬맹이는 예상대로 고기몇 점이 더 들어간 '특제' 스튜를 만끽하고 있었다.
"하하하, 자넨 아직 단련이 부족하다네."
"시트린이 바톤으로 때렸어어.."
방금 전까지 그렇게 열을내며 달렸던 등신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술을 흡입하고 있었다.
사실, 달리기라는 건 성행위와 같아서, 달리는 순간만큼은 온갖 감정과 근육들이 서로를 부딪히지만, 결승점을 통과하고 나면 끝없는 공허함만이 남는다. 저 등신들은, 그 공허함을 술로 채우고 있는 거겠지.
그래도 뭐..
"럼주 한 잔 더."
"네ㅡ!"
술이 맛있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아! 생각났다. 아까 분명 오로넬이.."
"야, 오로넬."
그거면, 된 거 아닐까.
탕!
탕! 탕!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쳤다. 그 뒤에는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오늘은, 집에 돌아갈 때까지 달려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