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뭘 해도 잘되는 놈이 있듯이, 뭘 해도 안되는 놈도 있다 [1]
점점 은행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뭇잎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갈 무렵의 어느 날.
"오로넬, 똥."
"어우, 시발. 좆 될 뻔했네. 뭔 놈의 똥이 길 한가운데에 있냐?"
이 기분 나쁜 색감에 질펀하게 퍼진 모양새. 새똥이 확실하다. 이 새끼들은 날아다니는 주제에 괄약근에 힘까지 풀고 다니는 미친놈들이라, 오히려 이런 산길에 정확하게 똥을 싸지르는 게 더 힘든 일이다.
그럴 터인데..
"..설마이거 전부 똥이냐?"
멈춰선 내 발의 앞부터, 가게까지의 모든 길에, 이 미친놈들의 똥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마치 물감이라도 바른 것처럼.
"더러워."
"이건 안 밟고 가냐? 은행은 잘만 밟았잖아."
"똥은 더러워."
"은행도 냄새 더럽거든?"
"은행은.. 밟는 소리가 좋아."
"똥 밟아봤냐? 똥도 밟는 소리 좋은데?"
"그럼 오로넬이 밟아."
"싫은데."
"나도 싫어."
바닥에 뭐가 있든 부수고 지나가는 게 꼬맹이의 신조라고 생각했는데, 똥은 예외인 것 같다. 은행이랑 똥 정도면 나름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하.. 그럼 돌아서 간다? 언제 도착하냐고 설치지 마라."
"응. 안할게."
그 뒤로는 조용한 등산이 이어졌다.꼬맹이는 낙엽을 몇 번 밟아 부수더니 또 혼자 신이 나서는, 근처의 낙엽을 죄다 짓밟아 가루로 만들었다.
끼이익.
"어서옵쇼."
'아.. 저질러 버렸어..'
카운터석어딘가에서 낮은 푸념소리가 들려왔다. 등신의 푸념 따위, 나는 1의 관심도 주지 않고 자리로 향했다.
"럼주 한 잔이랑 스튜 하나."
"예~"
"야, 야. 오로넬. 넌 여기 올 때 뭐 없었어?"
자리에 앉자마자 일을 시키는 마법사였다. 내 입은 술을 마셔야 일을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다.
럼주가 올 때까지 가만히. 마찬가지로 날 쳐다보기만 하는 마법사놈을 노려봤다.
"오로넬 씨 럼주요~ 데이린, 안녕?"
변태가 지나가는 것을 기다리고, 술잔에 손을 뻗었다. 거친 길을 통과해 온 탓인지, 술이 꿀렁꿀렁 잘도 넘어갔다.
"흐아, 시원하네."
"술 마셨으니까 이제 말해봐. 너도 뭐 있었지?"
이 녀석이 여기까지 기다리다니, 어지간히도궁금한 일인가보다.
"'너도' 라고 하는 거면, 너도 뭔일 있었냐?"
"하.. 그래. 나부터 말하면 되잖아, 나부터."
별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한 말인데.
"지금 시기엔 은행도 거의 다 떨어지고 없잖아? 남아있는 것들도 구석에 있어서 안 밟힌 것들뿐이고."
"어. 그래서."
"난 분명 길 한가운데로 걸으면서 가게로 오고 있었거든? 근데 내 발 앞에 은행이 떨어지는 거야. 난 우연인 줄 알고 피해갔지."
"근데 피해가려는곳에도 은행이 떨어지는 거야.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해도 은행, 뒤로 가려고 해도 은행, 난 완전히 은행에 포위됐었다고."
"야. 그럼 니가 여기 있다는 건.."
"어쩔 수 없잖아! 계속 내 앞으로 떨어지는데!"
마법사가 테이블을 내려쳤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이 역한 냄새는 내가똥밭을 지나와서인 줄 알았는데, 바로 옆에 그 근원이 있었을 줄이야.
"아, 진짜. 밟았으면 좀 닦고 오던가, 시발. 냄새 한 번 거지같네. 차라리 담배를 펴라."
"닦았어! 닦았다고! 닦았는데도 이러는 걸 어떡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건 대체 뭐야, 옆에서 계속 시끄럽게!"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하는 마법사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확실히 화풀이 하기엔 안성맞춤인 놈이다. 좆만한 목소리로 계속 뭐라 씨불여 대는 건지,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는데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화를 자아낸다.
"뭐가 죄송하냐고! 설마 그 은행 니가 떨어뜨린 거야!?"
마법사는 꼬맹이를 지나쳐가, 남색의 더벅머리를 한 여자를 들어올렸다. 초면에 멱살부터 잡다니, 역시 마법사도 이 가게의 손님이긴 손님이다.
"제, 제가 한 건 아닌데.. 저 때문에 떨어진 거에요.."
"뭐라는 거야, 이 새끼? 이거 패도 되겠지, 오로넬?"
"언제는 내 허락맡고 팼냐?"
"그건 그래. 이런 놈들은 맞아야 말을 한다고."
"앗..! 그러지 마세요..! 그랬다간..!"
"어억!"
"..너 뭐하냐?"
내가 보고 있는 건, 호기롭게 내지른 주먹을 자신의 얼굴에 내다꽂는 등신 같은 여자의 모습이었다.
"이, 이 새끼가! 피하지 말라고! ..어억!"
피해가고 있는 건 자신의 주먹이란 걸, 저 지식인이란 사람은 모르고 있는 걸까?
"신종 자해법이냐? 자해하고 싶으면 그냥 나한테 말해. 넌 맞고, 난 때리고, 일석이조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 녀석한테 주먹을 내지르면, 으억! 이렇게 내가 맞는다니.. 으억!"
알면서 왜 계속 하고 있는 건데.
"자, 자. 시오 씨, 진정하세요. 일단 지크 씨도 저기 계시다구요."
기어이 마법사가 코피까지 쏟아 내리자, 허겁지겁 제리스가 달려와 무의미한 자해행위를 말렸다. 그걸 치우게 될 게 자신인 걸 알았기 때문이다.
"딱히 규칙을 어긴 것도 아닌데 가만히 냅두지. 언제 정신 차리나 궁금했었는데."
"안 되겠다. 저놈이라도 때려야지."
마법사가 제리스의 팔을 뿌리치고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나는 손을 뻗어 근처의 포크를 손에 쥐었다.
"죄, 죄송해요..! 저 때문에..!"
-응?
마법사가 돌아봤다. 제리스도 돌아봤다. 그리고 나도 그놈을 쳐다봤다.
도대체 이 이야기의 흐름 중 어디에 저놈의 잘못이 있다는 거지? 원인과 결과는 죄다 마법사 소유인데.
"제, 제 주위에 있으면 모두가 불행해져요..! 아마 그 은행도 저 때문일 거에요..!"
"새똥도?"
"아, 아마 그럴 거에요..!"
그럼 이놈 탓 맞네.
"뭐? 운? 그럼 지금 그 운이라는 놈 때문에, 내가 내 주먹으로 날 때렸다는 소리야?"
"네, 네..!"
"지랄하지 마! 운 같은 걸 믿으라고?! 차라리 내가 자해를 했다고 하지!"
자해한 거 맞잖아.
"죄송해요, 죄송해요. 민폐를 끼쳐드려 죄송해요..! 내일 바로 이 마을을 떠날게요. 용서해 주세요..!"
음. 뭐랄까, 죄송하다는 말 자체를 되게 오랜만에 듣는 느낌이다. 왕궁에 있을 땐 하루에 한 번 이상은 들었던 것 같은데.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뭐 때문에 그걸 니 '운' 때문이라고 정하는 거냐고! 난 운 같은 건 인정못해!세상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다고!"
오늘도 과학의 수호자께서는 바쁘시다.
"그.. 아까 은행 이야기만 해도 제 불운 때문인데.."
"아니. 그건 어차피 떨어질 은행이었어. 때마침 내가 거길 지나가고 있었을 뿐이야."
그래. 그 우연을 '운' 이라고 하는 거다. 니가 좋아하는 말로는 '확률' 이라고도 하지.
"그리고 새똥도.."
"새똥은뭔데, 오로넬? 새똥이 뭐 어쨌다는 건데?"
귀찮을 것 같으니 빨리 말 해주자.
"가게에 오는 길에 전부 새똥이 칠해져 있었다고."
"전부? 길이 다 덮힐만큼?"
"그래. 그거 때문에 돌아오느라 힘들어 죽을 뻔했다."
"아, 그건 내가 어제 비둘기들한테 설사약 먹여서 그런 건데."
"대체 왜, 시발."
"산에 공짜 비료를 뿌려주려고 했지. 근데 길바닥에 싸 재낄 줄은 몰랐네."
아무리 봐도 재앙은 저년이 아니라 이년인데.
"어.. 그럼 제 탓이 아닌 거에요..?"
더벅머리의 표정이 밝아졌다. 표정이라 해도, 입밖에 안 보이지만.
"당연히 아니지! 세상에 운 같은 걸 믿는 놈이 어딨어?"
운을 믿던 말던, 분명 그 혜택을 누려 본 적은 있을 텐데, 과연 저놈은 자기가 하는 말에떳떳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 그럼.. 아까 주먹은 왜.."
"으, 음?! 아, 그건.. 내가 자해한 거야, 자해! 너 때문이 아니라고!"
"그래. 이 새끼 한 번씩 이러니까 신경쓰지 말라고."
마법사의 어깨를 연민이 가득담긴 손으로 토닥여줬다. 마법사는 입 꼬리를 떨면서도 내 말에 긍정했다.
"저, 저 그럼, 여기에 온 뒤론 아무런 짓도 안 한 거죠..?"
"아이 씨, 그렇다고! 니가 뭔데 누가 불행해지니 마니 같은 오글 돋는 소릴 하고 자빠졌어."
다시 한 번 완강하게도 부정하는 마법사였다.
"잘 들으라고. 이 세상은 운 같은 게 아니라.."
'으악!! 메뚜기 떼다!!'
바깥에 있는 놈들 생각은 다른 듯 했다.
"원인과 결과.."
'으악!! 속옷이 날아다닌다!!'
뭔데? 진짜 뭔데??
"인데.."
'으악!! 들개들이 가게 앞에서 집단 교미를!!'
밖에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데??
쿵!!
마침내 문이 열리고, 그 뒤로 모습을 드러낸 건 두 명의 등신.
개털을 머리에 뒤집어 쓴 용사와, 다리를 물린 채, 들개 째로 질질 끌고 들어오는 마부였다.
"어.."
그 꼴을 본 마법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콜록!"
용사가 기침을 했다. 입에선 개털이 흩날렸다.
"어라, 웨스?"
그놈의 다음 말에, 더벅머리가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