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뭘 해도 잘되는 놈이 있듯이, 뭘 해도 안되는 놈도 있다 [2]
"웨스? 웨스지? 와, 웨스다, 웨스! 이게 몇 년 만이야!"
"어, 그.. 저.."
반가워하는 용사와는 반대로, 더벅머리는 이놈이 누군지도 잘 모르는 듯 하다.
"나야 나!시트린! 기억 안 나? 예전에 무기도 많이 사러 갔었잖아!"
"어..."
"몇 년 전인지를 얘기해줘야 알지, 멍청아. 웬만한 인간들은, 너처럼 한 번 만난 인간들까지 머리통에 안 넣어 두거든?"
"음, 한 5년 전인가? 아 그보다 전이었나? 용사가 되기 전이었으니까.. 꽤 되긴 했네."
"저놈의 마왕성만 해도, 1년에 몇 번이 박살이 났는지 모르겠는데, 5년이나 지난 걸 기억 하겠냐?"
"아..! 맨날 검을 부러뜨려오던 손님.."
얼마나 부셔 처먹었길래 저걸 기억하지.
"역시 기억하고 있었구나! 보라고, 오로넬! 웨스도 기억하고 있잖아! 이정도면 니 사고방식이 이상한 건 아닐지 의심해보는 게 어때?"
"다른.. 손님들은 다들, 우리 가게의 무기를 쓰다가 죽었는데.. 당신 혼자서만.. 그 무기들을 부러뜨려서 왔어요.."
너네 둘이 미친놈인 거잖아.
“날은 끝내주게 잘 드는데, 항상 몇 번 휘두르다 보면 부러지더라구. 내가 요령이 안 좋았던 것 같아.”
“아, 아니에요.. 제가 만든 검이 너무 약해서.. 당신의 힘을 못 버틴 거에요..”
무식하게 힘만 쎈 놈이긴 하지.
"웨스..라면, 그 저주받은 골짜기의 대장장이? 맞나?"
-그르르르르..!
마부의 다리에는 아직도 개새끼가 들러붙어 있는 채였다. 그놈은 마부가 다리를 털어대고, 찍어대도, 마치 시체를 발견한 것 마냥 그 이빨을 놓아주지 않았다.
"뭐야, 조지도 알고 있었구나? 너도 무기 같은 걸 샀었던 거야?"
"아니. 거기엔 인적이 드무니까, 로드랑 킬을 데리고 자주 산책을 다녔었던 것뿐이야."
"그런데 어떻게 웨스를 알아?"
"아, 인적이 드무니까, 도적들이 많더라고. 뭐, 죄다 치어버리긴 했는데, 그놈들이 항상 죽기 전에 웨스가 어쩌니저쩌니 중얼 거리는 게 거슬려서, 수소문을 하다 보니 알게 됐어."
저게 제일 미친놈이네.
"......"
더벅머리도 왜 자기 손님들이 돌아오지 못했는지 깨달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래서? 가게는 어쩌고 여기에 온 거야? 분명 몇 년 전에 갔을 때도 없었지?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어느새 더벅머리의 옆에 자리를 잡은 용사였다. 마부도 그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엉덩이를 내밀었지만, 갑작스레 그 의자가 뒤집어지더니, 마치 그놈을 거부하듯이 빙글빙글 돌아대는 바람에, 근처의 다른 자리로 피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르르르..!
그리고 그 다리엔 여전히 개새끼가 매달려 있었다.
"제가 만든 무기를 쓰던 사람들이 죽으니까.. 저주받은 무기라면서.. 장사가 안 돼서.."
"뭐어?! 그럴 리가! 난 웨스가 만든 무기를 쓰면서 얼마나 행복했는데! 드래곤도 만나고, 엄청큰 거인도 만나고, 잊혀진 고대유적에도 떨어지고.."
아무리 강한 저주도, 숙주가 강하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었다. 마치 분노조절 치료사를 만난 분노조절 환자처럼. 아니, 오히려 저놈한테는 저주가아닌 축복으로 작용하기까지 한 모양이다.
"그.. 그렇게 말 해주는 건 당신뿐이에요.. 제 손님 중에 살아있는 건 당신 밖에 없으니까.."
"에이, 나 말고 더 있을 수도 있잖아. 분명 나랑은 다르게 멀쩡하게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일 거야."
"아, 아니에요.. 가게를 처분하고, 세계를 떠돌아다니면서 봐왔어요.. 주인을 잃고, 골동품 시장에 내놓아져 있는 제 무기들을.."
"무기를 개나 소나 아무한테나 팔아대니까 그렇지, 등신아."
괜히 대장장이들이 사람을 가려서 무기를 파는 게 아니다. 얼빵한 놈한테 무기를 쥐어줬다가 그놈이 죽기라도 해 봐라, 그 악명은 고스란히 대장장이에게 돌아간다.
"뭐, 뭐..?"
더벅머리 사이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두 눈이 보였다. 그건 분명, 등신이라는 소리만으로는 나올 수 없는 눈이었다. 내가 아픈 곳을 잘 때렸다는 뜻이겠지.
"왜 웨스 기를 죽이고 그래, 오로넬! 돈이 필요했을 수도 있지! 대장장이가 무기를 팔아서 돈을 벌면 안 돼?"
"..아, 아니.. 그게 아니야.."
편을 들어주는 용사의 말을 부정하고, 더벅머리는 눈을 가리고 있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각오를 다진 보라색의 두 눈이 등신들을 응시했다.
"아무한테나 판 건.. 하나라도 더 많이, 내가 만든 무기를 세상에 남기기 위해서였어. 나는 가족들 중에서도 불운이 강한 편이니까.. 언젠가 그 불운이 나까지 삼켜버릴 것 같았어. 그, 그런데, 내가 아니라 손님들이 죽다니.. 그럴 줄은 몰랐어."
"또 운 타령하네, 저게."
"아이 씨, 좀 닥쳐봐, 듣게."
발작하려는 마법사를 후려쳤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무기를 만들어왔어. 사람을 죽이는 물건을, 몇 백 년 동안 만들어 왔지. 그래서 저주를 받은 거야.. 그 무기에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원한이.. 우릴 저주하고 있는 거야.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없게, 그렇다고 홀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없게.."
ㅡ!!
더벅머리가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역수로 쥔 그 단검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팍!!
"웨스!!"
맥주를 들이키고 있던 용사는, 이미 늦어버린 자신을 꾸짖듯이 그 이름을 외쳤다.
"..봐. 나는 죽을 수도 없는 몸이야.."
심장을 향해 깊숙이 들어갔던 그 손에는, 찌그러진 철 쪼가리만이 남아있었다.
"웨스.. 너.."
"지, 지금까지 세계를 떠돌아다닌 건, 이 몸을 죽일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어.. 나, 나 같은 게 살아봤자, 주변만 불행하게 할 뿐이니까.. 하지만, 시도했던 자살은 모두 실패했어.."
"오, 그건 궁금하네."
"나도 나도."
마법사도 격한 공감을 표했다.
용사가 눈으로 욕을 했다. 그딴 걸 지금 들어야겠냐고 묻는 것 같았다. 더벅머리도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할지 고민하는 듯, 그쪽과 이쪽을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빨리 말하라는 뜻으로 손을 들어 더벅머리를 가리켰다. 그러자 용사의 얼굴이 살짝 험악해졌다. 자기도 듣고 싶으면서.
"처음엔 단순하게 목을 매달려고 했어. 가장 간편하고 빠른 방법이니까."
'목매다는 게 빨리 뒤지던가?'
'엄청 허우적대다가 죽지 않나?'
'조용히 하고 들어, 둘 다.'
별로 안친해서 그런 건지, 너무 친해서 그런 건지, 유독 저놈을 챙기려드는 용사였다.
"하지만 아무리 단단한 줄을 가져와도, 내 목이 조이려고 하는 그 순간이 되면 어김없이 끊어졌어. 쇠사슬이나 철사 같은 건 오히려 더 빨리 끊어지기까지 했고."
그럼저놈 목을 밀어 넣으면 아무리 철통같은 자물쇠라도 끊어진다는 건가.
"그 다음은 머리를 좀 굴려서, 낙사를 노려보기로 했어. 뒷산에서부터 이름 있는 절벽들까지, 절벽이란 절벽은 모조리 찾아가서 뛰어내렸지."
'낙사도 좀 아프지 않냐?'
'떨어지고 몇 분은 살아있다던데..'
"이번엔 나무들이 날 죽지 못하게 막았어.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도 뛰어봤지만 소용없었어. 그때는 바람이 불어서 나무가 있는 곳까지 날아갔거든."
저 정도면 운의 영역을 넘었지 않나..? 이미 기적의 언저리까지 간 것 같은데.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독늪이 퍼진 마을이 있다고 해서 거길 찾아갔었는데, 당연하게도 내가 발을 담그자, 독은 물론이고 늪조차 평범한 호숫가로 바뀌었어."
이제 확실하게 기적의 영역에 들어섰구만.
"자포자기한 나는, 마을사람들이 답례를 하고 싶다기에 농약을 달라고 했어. 그게 농약병에 들었을 뿐인 자양강장제였다는 건, 다음날 아침에서야 알았지."
......
가게는 조용했다. 마치 누군가가 술이라도 엎은 듯이. 심지어는 마부의 다리에 매달려있던 개새끼마저 그 이빨을 떼어내고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이제 알겠지? 내가 얼마나 불운한 삶을 살아 왔는지."
"아니."
저게 불운이냐, 아무리 봐도 행운이지.
"내 말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원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삶이 얼마나 괴로운데!"
"그럼 살고 싶다고 생각해 보던가. 그럼 뒤지겠네."
"오."
병신.
"안 되잖아!"
"되겠냐."
"뭐 됐어. 또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거든. 이 저주받은 삶을 확실하게 끝낼 수 있는 방법을!"
더벅머리는 활기차게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며, 몸을 돌려 용사의 양 손을 붙잡았다.
"내 저주를 이겨낸 유일한 사람. 당신이라면 날 죽일 수 있어. 시트린, 부탁이야. 당신의 손으로 이 저주를 끊어줘."
"어..?"
떨리는 눈으로, 용사가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