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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화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보면 재에 맞으니 조심하자 [4] (102/108)



〈 102화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보면 재에 맞으니 조심하자 [4]

안 온다. 너무 안 온다.

20분? 아니, 30분은 지난 것 같다. 소중한 인질인 사과의 표면이 점점 탁해져가기 시작했다. 몇 분만 더 지나면, 자연사라고 해도 될 정도로 변색해버릴 것이다.

"아ㅡ"

꼬맹이는 내가 진심으로 이걸 줄 거라 생각 했는지, 계속 입을 벌린 채로 서있었다. 이미 면상에서 손도 떼고, 사과도 치웠는데 말이다.

"입 닫아라."

"사과, 줘."

"주면 뭐하려고? 처먹으려고?"

"응."

"안 돼."

"왜?"

"내 꺼니까."

사과를 내 쪽으로 더 당겨왔다.

"음.. 그럼 나한테 주면 안 돼?"

"안 된다고."

먹을 것에 언제나 '진심'인 꼬맹이는, 과일 가게 하나를 다 털어먹어 놓고도, 먹다 남은 사과 하나 조차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음.."

"뭐라 씨불여도 안  거니까, 되도 않는 머리 굴리지 마라. 탄내 난다."

"음."

꼬맹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에 수긍한 건지, 이걸 반드시 처먹고 말겠다는 표현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걸 손에서 떨어뜨리면 안 된다는 것만은확실했다. 적어도 화약인지 뭔지를 가져올 때까지는.

그나저나 이 새끼들은 어딜 간 거지? 이 좆만 한 가게가 넓어봐야 얼마나 넓다고. 그렇다고 이놈들이 화약상자를 못 가져 올 정도로 약해 빠진 것도 아닌데.

"야!! 언제 오냐,  새끼들아!! 사과가 씹창나도 상관 없어!?"

수취인을 찾지 못한 내 목소리가, 벽에 부딪혀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이 소리가 그놈들에게 닿았다면, 지금쯤 내 눈앞에는 제자년이 도착해있어야 했다.

화약을 만들어 오나, 이 새끼들이.

"야, 꼬맹아. 사과 먹고 싶으면 따라와라."

그 어느때보다 빠르게,  뒤를 따르는꼬맹이였다. 협박용 도구를 챙긴 나는, 암살자의 사업장을 향해 발을 디뎠다.

놀고 있기만  봐라, 이 골빈년아. 니 눈앞에서 이 사과가 뒤지는 꼴을 보여주마.

"야!! 어디 있냐, 이 새끼들아!!"

나를 기다리게 한 죗값을 치르게 하기 위해, 과일가게에는 필요도 없을 정도로 많은 방들을 돌아다니며 등신들을 찾아다녔다. 죄를 지은저놈들을 내가 친히 찾아다니는 이유는, 그 과정에서 그놈들에 대한 분노를 더욱 증폭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쾅!

이 방도 아니었다. 이제 남은 건,  골빈년의 둥지인 사장실 뿐.

생각해보면, 화약의 용도가 '사업'에 쓸 도구들의 제작을 위해서였으니만큼, 그것을 자신의 곁에 두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이놈들이 늘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뻘짓거리를 해대니, 나로서는 확인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쾅!!

"이 씹새끼들아!!"

문을 부술 기세로 걷어찼다. 그리고 실재로 부서졌다. 하지만, 거기에도 등신들은 없었다. 제자년의 기괴한 수집품들과, 그것들을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몹시나도 편해 보이는 의자만이, 나의 방문을 반겼을 뿐이다.

'어, 이거 오로넬 아니야?'

'싸부? 싸부!! 이쪽이에요!!'

의자와 시선을 나누고 있는 와중에, 바닥 아래에서 마부와 제자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일가게로 위장한 '사업장'과 사장실 아래에 있는 비밀 공간. 나는 새삼스레  가게가 제자년의 가게라는  깨달았다. 자기 낭만이란 낭만은 다 때려 박았구만.

"야! 입구 어디야?!"

고함을 지르며 바닥을두어 번 정도 찍었다. '비밀 공간'이란건 어디까지나 비밀이기에, 본인이아니고서야 그 입구를 찾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이 녀석이 그걸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말이다.

'테이블!테이블 아래요!'

사장실의  가운데, 손님용 소파 두개가 양쪽을 감싸고 있는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에 있는 붉은 카펫이, 들켰다는 듯이 어색하게  쳐다보고있었다.

카펫을 들어 올리자, 작은 미닫이 문 하나가 나타났다. 그 아래에는, 촛불로 밝혀진 지하통로가 이어져있었다.

"야, 진짜 그만 좀 처먹어라. 내가 널 굶기냐?"

끌려오는 와중에도, 기어이 테이블 위에 있는 사탕 몇 개를 집어 오는 꼬맹이였다.

"시발. 이놈의 계단."

계단을 만드는 놈들은 왜 정도껏을 모르는 걸까? 이 정도 내려왔으면 거지같은 문짝이 나올 때도 됐잖아. 어차피 내리막이라상관없다 이건가? 내려갈 때야 내리막이지, 올라올 땐 오르막이잖아, 시발.

'그만두라고! 그거 했다간  같이 죽는다니까!'

'그래, 시오.좀 있으면 오로넬도올 거니까 기다려봐!"

겨우 도착한 적갈색의  뒤에서는,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사가 또 개짓거리를 하고 있는 건가? 뭔가 불안한데. 그러고 보니  안에는 더벅머리도 있잖아. 이걸 여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뭔가 대비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끼이익.

그럴 틈은 없었다. 이 미친 꼬맹이가 멋대로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나는 재빠르게 꼬맹이의 머리통을 후려치고, 그것보다  빠른 속도로 벽에 붙어, 상대의 공격에 대비했다.

조용했다. 그 안에선 어떠한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법사가 무력시위를 하고 있는  아닌 모양이다.

멍청하게 서있는 꼬맹이를 방패삼아, 천천히, 천천히 고개를 내밀었다.

천장에 달린 등불만으로 시야를 유지하고 있는 그 공간에는, 멀찍이 떨어져 방관만 하고 있는 더벅머리와, 화약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방의 끝에 붙어있는 마부와 제자년. 그리고 담배를 물고, 그 방의 문을 막고 서있는 마법사가 대치하고 있었다.

"싸부! 빨리 와 봐요! 저 미친 여자가 담배를 피려 한다고요!"

마법사가 ‘담배’를 물고 있었다. 그놈의 손에는 언제라도불씨를 만들어낼 준비가 되어있는 성냥이 쥐어져 있었다.

미친놈.

"여기서 가만히 핀다니까? 화약 상자에만 안 가면 되잖아."

"이 미친 여자가 진짜! 주변엔 전부 기름이랑 폭발물들뿐이라고! 나가서 피고 오는  그렇게 힘들어!?"

"담배는 한 번 물었으면 거기서 끝이라고. 무조건 그 자리에서 펴야 돼.  그럼 맛이 안 나거든."

맛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미친놈이.아무리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다 해도, 온 주변이 까딱하면 뒤지는 것들 투성이인데, 잘도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다.

"아니 그럼 우리라도 나가게  달라고!문 앞에 서서 뭐하는 짓인데!"

마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저놈이 저렇게 열변을 토하는  처음 보는 일이다. 하긴, 미친 여자 하나 때문에 다른 미친 여자와 한 방에 갇혀서 뒤져야 하다니,  같아도 온 힘을 다해 울부짖을 것이다.

"아, 이제  되겠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어. 조금만 참아? 빨리 필 테니까."

치익!

이미 말을 끝내기 전부터 움직이기 시작한 성냥은, 정확히 그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빨간 빛을 내뿜으며 타올랐다.

-으아아아아악!!!

끼이익.

문을 닫았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래. 사실 나는방금 여기 내려온 참이다.

등신들을 찾아서 온 가게 안을  뒤져봤지만, 하늘로 날아간 건지, 땅으로 꺼진 건지, 도무지 이놈들을 찾을 수가 없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제자년은 어차피 자신의 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으니, 사장실에 올라가서 기다리도록 하자.

거지같은 계단을 거슬러 올라와, 미닫이문을 닫고, 카펫을 덮었다. 테이블까지 원 위치로 돌려놓자, 정말로 이 방에 처음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다. 아니, 처음 들어온 게 맞지만.

"이제 이거 먹어도 돼?"

꼬맹이는 곧바로 소파 위에 걸터앉아, 미처 집어먹지 못한 사탕들에 손을 뻗었다.

"마음대로 해라."

더 이상 그걸 먹을 사람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꼬맹이와의 짧은 대화를 끝내고, 나도 나의 관심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의자. 이 방에 들어온 뒤로, 저 의자만이 계속해서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엄중한 보안을 뚫어낸 락픽이라느니, 대단한 놈을 찌른 단검이라느니, 그딴 것들은 나한테 아무런 자극을 주지 못했다.  짓거리들은 그딴 것 없이도 내가 수없이 해냈던 일들이니까.

하지만 저 의자는 달랐다. 저런 의자에 앉아본 적은 없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적당한 만큼만 튀어나와 있는  받침대와, 몸을 죄이지도, 그렇다고 너무 풀어주지도 않는 등받이. 그리고 팔이 흐르지 않게 살짝 휘어있는 팔 받침대 까지. 그야말로 앉기 위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앉고 싶게 만드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의자였다.

의자의 뒤로 다가간 나는, 그 위에 손을 얹어, 살며시 좌우로 흔들어 보았다. 뻑뻑하지도, 헐렁하지도 않은, 완벽한 흔들림이었다.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아래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욕설은 이미 들리지 않게   오래다.

나는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가, 다리를 굽혔다. 엉덩이와 허리, 목과 머리가, 자신의 차례에 맞춰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으..!!"

온 몸의 근육들이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사기적인 안락함에, 신체는 움직이는 것을 그만두었고, 통제를 상실한 몸은, 의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좋은 의자를 건방지게 혼자서만 쓰고 있었다니, 지가 의자에 앉아서 할 일이 뭐가 있다고.

스승을  먹일 생각만 하지 말고, 이런 물건을  가려와보란 말이다. 그랬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해줬을 텐데, 멍청한 제자년.

아, 안되겠다. 괘씸해서 참을 수가 없다. 스승을 공격할 줄이나 알지, 공경할 줄은 모르는 짐승만도 못한 제자년에게, 본때를 보여줘야겠다.

..이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는 선에서. 그래.  책상 위를 씹창내는 것으로 말이다.

응? 뭐지, 이거.

어떻게든 개판을 쳐놓기 위해, 답지도 않게 정돈되어 있는 책상을 둘러보던 중, 마치 방금 전까지도 보고 있었던 것 같은, 책상의  중앙에 놓여진 작은 하나가 보였다.

'나의 소중한 병[email protected]$%신일기.'

'병'의 옆에 있는 글자는, 펜으로 난도질을 해놓은 탓에, 무슨 글자가 있었는지 알기 어려웠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쓰여진 '신' 자에서는, 어떻게든 그걸 쑤셔 넣기 위해 궁리한 흔적들이 보였다. 이걸 적은 게 누구인진 몰라도, 아주 악랄한 새끼인  확실하다.

아니, 누구인지는 명확했다. 이건 일기장이고, 이게 올려져 있는 곳은 제자년의 책상 위다. 일기장을 남한테 보여줄 리도 없으니, 이걸 써넣을만한  그놈 본인뿐이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샌가 나는,  일기장을 손에 쥐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됐는지, 겉으로만 봐도 쭈글쭈글한 면들이 한 가득이었고, 낡은 종이쪼가리 특유의 칙칙함과, 어딘가 모르게 달큰한 향이 느껴졌다.

향을 확인한 나는,  생각 없이  장을 열었다. 누군가의 비밀을 캐낸다는 저급한 목적이아니라, 책을 들고 있었기에 마땅히 그것을 탐구한다는, 지극히 학문적인 목적으로.

[모년 모월 모일. 맑음.]

10년 전이라.. 아마 이년이 나에게 거두어지고 얼마 되지 않았을 시기의 일인 것 같다.

[일기를 쓰고 싶다고 하니, 스승님께서 일기장을 구해주셨다. '나의 소중한 병영일기' 라고 적힌 일기장이었는데, 이대로는 멋이 나지 않는다며 일기장의 제목을 고쳐주셨다. 한 글자만 고쳐 썼을 뿐인데, 처음과는 읽는 느낌이 완전히 달라졌다. 역시 스승님은 대단한 분이다.]

...

..내가 썼구나.

10년 전의 일들을 떠올리며, 나는 다음 장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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