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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화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보면 재에 맞으니 조심하자 [5] (103/108)



〈 103화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보면 재에 맞으니 조심하자 [5]

제자년의 일기는, 그날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쭉 이어졌다. 이놈을 가르친 게 3년이었나, 4년이었나. 아무튼,  기간 동안의 일기는 이놈의 일기이기도 했지만,  일기이기도 했다.

[모월 모일. 맑음. 오늘은 스승님이 일이 있으니 집에만 있으라고 하셨다. 나는 며칠 전에 배운 미행을 떠올리며, 스승님을 뒤따라갔다. 어딘가의 집 앞에 멈춰선 스승님은, 이상하게 생긴 돼지 아저씨한테 혼이 나고 있으셨다.]

이거 봐라. 왜 이놈의 일기를 읽는데, 내 기억이 되살아나야 하는 거냐. 이상하게 생긴 돼지새끼라고 하니까 싫어도 면상이 떠오르잖아.

그래. 분명 군부의 높으신 돼지새끼였나. 면상은 떠오르는데, 왜 그 새끼한테  불려갔는지는 기억이  나네. 조금만 더 읽어볼까.

[..스승님이 혼나신 건, 내가 받은 일기장 때문이라고 했다.]

아, 맞다. 이거 때문이었지.

웃기지도 않는 새끼들. 5년 동안 재고조사 같은 건 하지도 않더니, 하필이면 내가 그걸 훔친 다음 날에 재고조사를 하냐.

그러고는 이놈이 일기장을 가져와선, 지가 잘못했다고  돼지새끼한테 빌었었지. 애초에 혼나고 있던 건 내가 아니라 그 돼지새끼였는데. 군부에서 조금 높은 자리를 깔고 앉아있을 뿐인 돼지가 무슨 깡으로 장관의 아들을 건드리겠냐.

[..열심히 빌었더니 돼지 아저씨가 용서해줬다. 돼지들은 다들 나쁜 녀석들뿐이었는데, 이런 착한 돼지와 알고 지내다니, 역시 스승님은 대단한 분이다.]

왜 마지막은 항상 내가 대단한 걸로 끝을 맺는지 궁금한 부분이다. 그놈보다 내가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이놈에게내가 대단하단 걸 보여준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말이다.

[모월 모일. 흐림. 스승님께서 조만간 진짜 암살에대해 가르쳐 준다고 하셨다. 단검을 쓰게 될 테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단다.]

날붙이를 이렇게 빨리 쥐어줬었나. 그때는 하루라도 빨리 왕놈을 죽이고 싶었나 보다.

[모월 모일. 비. 오늘을 위해 밤이 새도록 연습했다. 나는 완벽하게 스승님이 가르쳐주신 동작들을 재현해냈다. 스승님이 기뻐하실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스승님의 표정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내가 뭔가 잘못한 걸까? 스승님은 알려주지 않으셨다.]

뭐? 내가? 그런 적 없는데? 니가 진짜로  했으면 좋아했겠지. 왕놈을 볼 날이 줄어드는 건데.

[모월 모일. 비. 오늘은 연막탄을 던지는 연습을 했다. 스승님은 오늘도 기분이 좋지않아 보인다. 나는 스승님에게도 버림받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니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다. 어떡하면 나의 스승님을 되찾을  있을까?]

자세히 보니 이거 장마때잖아. 죄다 '비옴'이구만. 분명 내가 비가 오는 날마다 지랄을 떨었을 텐데. 설마하니, 이놈. 내가 비를 싫어하는 걸 모르는 건가?  년을 얹혀 살아놓고? 이건 진짜 어지간한 등신이 아니고서야 모르기가  힘든데.

맑은 날, 맑은 날이 어디 있지? 맑은 날을 보면 답이 나올 텐데. 아, 여기 있다.

[모월 모일. 맑음. 드디어 해냈다. 내가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자, 스승님이 평소처럼 욕을 하며 머리를 때려주셨다. 역시 그 사람 말을 듣길 잘했다.]

니가 해낸 게 아니라, 비가 그쳐서 그런 거라고,  답답한 년아.

그보다, 갑자기 말을 안 들어 처먹게 된 건, 그거 때문이었냐? 그딴 좆도 아닌 이유 때문에?? 아, 어쩐지 말도 안 된다 싶을 정도로 멍청한 짓만 하더라니. 거기다  사람이라는 새끼는 누구지? 어떤 새끼가 감히  인생 계획을 망친 거냔 말이다.

[..스승님의 아버지는 상냥했다. 그 사람의 몇 마디가 나에게 스승님을 돌려주었다. 역시 착한 사람은 착한 사람 손에 자라는 걸까?]

"씨발 발프 새끼!!!"

하마터면 일기장을 찢어버릴 뻔했다.  미친 노친네새끼, 대체 언제부터 눈치를 까고 있었던 거지?

많고 많은 말 중에 콕 집어서 멍청한 짓을 하라고 한 거면, 십중팔구 내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건데, 왕놈의 일이라면 측근이라 해도 가차 없이 쳐내는 그 노친네가, 날 살려둔 이유는 뭐지? 결과야 실패로 끝났지만, 아무튼  살려둔 탓에, 저 제자년이 결국에 왕놈의 암살을 시도했지 않은가.

..대체 왜지?

퉁퉁퉁!

그 생각의 늪에서  끌어올리듯, 비밀통로의 문이 알람시계마냥 울려댔다.정말 안타깝게도, 불씨가 화약에 옮겨 붙지는 않은 모양이다.

"열어줘라, 꼬맹아."

"응."

"으하! 죽는 줄 알았네."

마부가 한껏 모은 숨을 뱉어냈다. 하긴, 환기도  되는 지하에서 담배를 피워댔으니, 숨을 쉰다는  곧, 담배를 마시는 것과 같은 일이었으리라.

"후아! 어, 싸부. 거기 앉아 계시네요. 편하죠, 그 의자?"

그 뒤에는 마찬가지로 숨을 참고 있던 제자년이 올라왔다. 어째 화약을 가지러 내려가 놓고, 상자를 들고 있는 놈이 하나도 없다.

"어. 나 줘."

"그럼 싸부가 쓰시는 의자랑 바꾸실래요?"

"무조건 바꾸지."

나무막대기와 양손검을 바꾸자는데, 어떤 등신이 이걸 거절할까?

"그럼 일단 이 일만 끝내고 싸부님 방으로 가죠. 야, 빨리 안 올라와?!"

제자년의 손이 누군가의 머리를 때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거기에 사람은 없었다. 커다란 상자의 탑만이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어우, 어우..!"

쿵!

화약 냄새가 풍기는 상자의 탑이 사장실의 바닥에 주저앉았고, 그 뒤에 있던 무언가가 형상을 드러냈다.

"야, 그러고 있으니까  과학자 같네. 앞으론 그렇게 다녀라."

"..닥쳐."

마법사의 새하얗던 가운에는 무수한 발자국이 찍혀있었고, 늘 가지런히도 정렬되어 있던 파란 머리는, 태풍이라도 맞은 것 마냥 헝클어져 있었다.

"그게 전부냐?"

"아니. 밑에 세 상자 정도 더 있어."

방금 담배 때문에 그 꼴을 겪어놓고, 또 다시 불을 붙이는 마법사였다. 역시  버릇은 뒤질 때까지 낫질 않는다.

"어어어, 어..!"

위태롭게 흔들리는 상자의 탑이, 근근이 지상으로 올라왔다.

"야, 저거 좀 들어줘라. 엎겠다."

 속으로 마지막 사탕을 털어 넣고 있던 꼬맹이가 말없이 더벅머리의 짐을 덜어주었다.

"저놈은 개짓거릴 했으니까 이해하겠는데, 저놈은 뭘 했다고 혼자서 상자를  개나 들고 오냐?"

"어.. 그러게요."

"시오를 때리다보니 지쳐서.."

진짜 아무 이유도 없었네.

"저, 전 괜찮아요.."

이럴땐  악물고 지랄을 해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데, 괴롭힘을 덜 당해본 놈이다.

"그래서 이 화약으로 뭐 하는 건데? 폭탄이라도 만들 거야?"

아무도 마부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해  놈이 없는 모양이다.

"아, 맞다. 조지한테는 말 안 해줬구나."

"뭘 시킬 때는 적어도 설명이라도 해 달라고, 사장놈아."

그래도 사장이라며 존대아닌 존대를 하고 있었지만, 그놈을 내려다보는 눈과 어깨를 붙잡은 손에서는 이미 충분한 분노가 느껴졌다. 같은 일을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닌 듯하다.

"이 화약은 말이지. 폭죽을 만드는데 쓸 거야."

"폭죽? 아, 불꽃놀이 하려고?"

"맞아. 이 여자가 만들 줄 안데. 이렇게 고생시켜놓고  만들기만 해봐? 창고에 있던 폭탄들 전부 던지러 간다?"

"하.. 이젠 대꾸도 안 하련다. 다 필요 없으니까, 이거, 내 방까지만 옮겨 달라고. 일주일 안에 끝내주는 불꽃놀이를 보여줄 테니까."

마법사가 체념한 담배연기를 뱉어냈다.

"그럼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로드랑 킬 좀 데려올 테니까. 어이, 사장. 그때 가져온 수레. 가게 뒤편에 놔뒀었지?"

"응. 거기 있을 거야."

"갔다 올게."

마부가 셔츠의 윗단을 풀며, 사장실을 나섰다.

"갔다와~!"

"다, 다녀오세요..!"

"올 때 담배."

등신들의 목소리만이 복도에 메아리쳤다.  딱히 대답할 필요가 없는 말들이긴 했다. 특히 마지막 놈의 말에는 더.

"어! 싸부! 그거 제 일기장!"

아, 맞다. 이걸 계속 펴놓고 있었네.

"어.  일기 재밌더라."

그래서 어쩔 건데.

"아이 참. 그런 거 함부로 보는 거 아니라고요."

구구절절 맞는 말인데, 그 맞는 말을 이놈한테 들을 줄은 몰랐네.

"근데 이게 어딜 봐서 니 일기냐? 아무리 봐도 내 일긴데? 일기는 니가 한 일을 적는 거라고.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네? 아. 아직 별로 안 보셨구나? 어디까지 보셨는데요?"

?

함부로 보는  아니라면서 어디까지 봤는지는 왜 물어보는 거지? 이게 제대로 된 화법이 맞나?

"에이, 여기까지 보셨으니까 그렇죠. 싸부랑헤어지고 나서는  얘기밖에 없다고요."

어느새 의자에 팔을 기대고 선 제자년은, 일기를 빼앗을 생각은커녕, 오히려 나에게 안내를 하고 있었다.

마침 그걸 읽는 게 나쁘지는 않았던 나는, 그놈의 안내를 따라, 계속해서 글을 읽어갔다.

"오, 이 날인가? 나랑 헤어지고 찔찔 울었던 날."

일기를 스쳐 넘기던 중, 유독 쭈글쭈글한 면을 발견했다. 시기상으로도 대략 3년쯤이 되는 날이었고, 물인지 눈물인지에 젖어 종이가 쭈글쭈글한데도, 빼곡히 채워져 있는 글을 보니, 많은 것을 느꼈던 날의 일기인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야 당연히 울었죠. 세상에 집을 주고 사라지는 스승이 어디 있어요? 혼자 살고 싶으면 제자를 쫓아내면 되지."

"그럼  하냐? 니가 내 집을 알고 있는데. 그렇게라도 해야 널 내 인생에서 지우지."

사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냥  녀석 말대로 하는 게 나았을 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세 달도  되지 않았을 때, 왕놈하고의 '그 일' 이 일어났었으니까.

그걸 생각하니 아직도 화가 나네. 그때 그 술만 안 마셨어도 이딴 외지에 발령 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어? 근데 싸부는 제가 울었던 걸 어떻게 아세요?

"아니, 그냥. 딱 봐도 울었을 것 같아서. 니가 워낙 단순해야지. 고작 3년을 봤는데 남은 인생이 다 보이는 건,  밖에 없더라."

내 말을 듣기는 한 건지, 제자년은 히죽히죽 쪼개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일기장을 넘겨, 그 뒤의 일들을 관람했다.

길고도 짧은 10년의 세월이, 무심하게 쓰여진 잉크 몇 방울에 모두 담겨져 있었다.

내 앞에선 등신인 척 연기를 하던 등신이, 때로는 뒤쪽 세계에 고용되어 상대 조직을 박살냈고, 때로는 정치가에게 고용되어 그에게 반대하는 목소리들을 잠재웠다.

단검 하나 제대로 못 쥐는 '척'을 하던 그 등신이, 5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날고 긴다는 거물들을 수십이나 땅으로 쳐박고, 스스로도  거물의 반열에 오르는 걸 보고 있자니, 내 눈앞에 있는 이것과 동일인물이 맞나 싶다.

"많이도 죽였네, 시발."

어느새 제자년의 이야기는 올해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어떤 날의 일기에, 손이 멈추었다.

[드디어 스승님과 만났다! 7년 동안 찾아다녀도 만나지 못한 사람을 한 번 만에 만나다니, 역시 라이돌 왕의 목에는 스승님과만날 수 있게 해주는 열쇠라도 있는 모양이다. 다음에 스승님을 찾을 일이 생길 때에도 이용하도록 해야겠다.]

이번 생에선 두  다시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던 등신과의 재회. 그 끔찍한 날의 일기였다.

실수로 싸부라고 불러버렸는데 그게  친근감이 있어 보인다며 앞으로는 그렇게 부른다느니, 벌써부터 이곳에서의 생활이 기대된다느니, 그날의 일을 이놈의 시점으로 보니 더욱 머리가 아파왔다.

그래도 7년 전의 그 애새끼 시절의 일기를 보는 것보단 유익했다. 적어도  미친놈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미친 짓을 했는지는  수 있었으니 말이다.

미친놈을 상대하려면 우선 미친놈의 머릿속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후.."

그렇게 생각하며 그 심연을 들여다 볼 각오를 마쳤다. 그러나 다음 장을 넘기려는 순간, 어깨 너머에서 두개의 손이 나타났다.

텁!

"다음 장부터는 안 돼요."

여태껏 방관만 하고 있던 제자년의 손이,  일기장을 빼앗아 들고, 그것을  눈앞에서 보란 듯이 덮었다.

종잇장들이 중심을 향해 몰려들었다. 그때, 불현듯 눈가를 스쳐지나가는 어떤 날의 일기가 내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유독 진한 글씨로, 반복되는 한 단어만을 열거해놓은 듯한 일기.

그 단어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보지  했지만, 뺏어든 일기장을 보란 듯이 내 눈앞에서 닫은 이유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기는 주인이 없을 때나 실컷 훔쳐보시라고요. 알겠어요?"

그런 것 치곤 기쁜 듯이 일기를 수납하는 제자년이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나는 그것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이놈이 방금까지 나에게 한 짓은, 평소와 같은 '등신 짓' 이 아니었다. 그것과는 다른, 나에게 '불쾌한' 무언가였다.

'히히히이잉!'

말 소리가 복도를 가로지르며 들려왔다. 마침 분위기가 적당히 조져진 차였는데, 기가 막힌 순간에 마부가 도착했다.

"꼬맹아, 상자 들어라."

나는 곧바로, 이 꺼림칙한 공간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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