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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왜 피하시는 겁니까.”
시리우스의 분홍색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요요히 빛났다.
나는 그의 눈동자에 홀려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제가 저주에 걸렸기 때문입니까?”
허스키한 목소리가 애달프게 들렸다. 그게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피한 건 맞지만 널 위해서였다고.
“이제 와서 도망가는 겁니까? 제게 빛이란 걸 알려 주고 이제 무서워진 겁니까?”
정중한 말투였으나 그의 진득한 눈빛은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모습이었다.
평소의 가식 섞인 연기가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는 진심이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을 솔직하게 나에게 부딪혀 오고 있었다.
“제발, 제발 더 이상 물러서지 마십시오. 얼마나 참을 수 있을지 저도 모르겠으니.”
아.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나는 그저 악역의 흑화를 막으려고 했는데 어째서 서브 남주가 흑화한 거지?
***
1. 육아는 사랑으로
숨이 끊어지는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나는 어둠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숨 막혀. 괴로워.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데 갑자기 눈이 부셨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오직 하얀 빛만 보였다.
‘살았나?’
주위가 시끄러웠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순간 둔부에서 고통이 느껴졌고, 나는 숨을 쉬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응애! 응애!”
***
바야흐로 2살.
그래. 나는 지금 2살이었다. 평범한 아기라면 먹고 자고 싸고 만사 걱정 없이 태평할 시기였다.
그런데 나는 심란한 얼굴로 요람에 누워있는 아기들을 보고 있었다.
천사처럼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아기들은 생김새도 똑같았다.
‘아기라 그런지 일란성 쌍둥이 같네.’
나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운 좋게 바로 취업까지 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유아교육과를 나와서 유치원 선생님이 됐다.
하지만 그게 지옥의 시작이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어린아이는 좋아했다.
그러나 학부모라는 변수와 생각보다 영리한 어린이들은 나를 힘들게 했었다.
박봉인 점도 한몫했지. 월급마저 쥐꼬리만 하니.
그렇다고 죽을 생각은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매일매일이 스트레스고 힘들었지만 다 똑같을 거라 생각하며 버텼다.
친구들도 각자의 생활이 바빠져서 만나기 힘들어지자 자연스럽게 혼자 있는 시간이 늘었는데, 그때 위로가 됐던 것이 소설이었다.
로맨스 소설.
모태솔로였던 나에게 로맨스 소설은 환상이며 로망 그 자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로맨스만 읽던 내게 선물함에 들어온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소장권이 눈에 들어왔다. 솔직히 표지가 예뻐서 홀린 듯이 클릭했었다.
로맨스 판타지는 처음이라 소장권도 받았겠다, 무료 부분만 살짝 볼까 하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어느새 결제까지 하며 달렸다.
‘클리셰 덩어리였지만 작가의 필력이 커버했지. 흡입력 장난 아니었어.’
‘신데렐라는 유리 구두를 신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었다. 알고 봤더니 로맨스 판타지 랭킹 1위!
어쩐지 너무 재밌더라. 여주인공은 시골의 자작 영애였는데 정령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 소설이 시작되고, 여러 남정네와 엮이는 내용. 마법이나 신분제의 색다른 매력에 흠뻑 빠져서 모르는 단어는 검색까지 하며 탐독했다.
‘계급이 헷갈렸지.’
자작이니 백작이니 너무 많이 나오는데 처음엔 뭐가 높은지 몰라서 혼란스러웠지만 나중엔 신분이고 뭐고 여주인공이랑 남주인공이랑 꽁냥꽁냥거리는 거 보고 엄마 미소를 지으면 읽었다.
흠흠, 딴 방향으로 샜지만 생략하자면 낮은 신분의 여주인공이 제국의 황태자와 결혼하는 스토리라는 거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여주인공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시원하게 사이다 샤워하는 내용!
‘남자 때문에 이리저리 끌려다니지도 않고, 프러포즈도 여주인공이 당당하게 하는 장면은 진짜 걸크러쉬였는데.’
정말 재밌게 읽었었다.
완결까지 밤새 달리고 외전만 기다리고 있던 나는 외전이 올라왔다는 알림을 받고 너무 신나 사무실에서 책상을 쾅쾅 치며 좋아했었다. 그때 점심시간이어서 다행이었지.
행복한 결혼 라이프나 2세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외전 내용은 악역의 과거 이야기였다.
사연 없는 악역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쌍둥이가 악역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담겨있었다.
이것도 좋지만 기대했던 달달한 외전 내용이 아니라 슬프다는 댓글이 베스트였지. 나도 동감이었다. 소설의 악역은 이미 죽었었기에.
“어머, 언제 여기까지 오셨담. 세르니아 아가씨 이젠 혼자 잘 걸으시네요.”
“응!”
세르니아 아르덴타인. 낯설고도 익숙한 단어는 이번 생의 내 이름이었다.
뒤쪽에서 나를 안아 올리는 시녀에게 방긋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맘마 먹으러 갈까요?”
“맘마 조아!”
처음에는 아기 흉내를 내면서 현타를 거하게 느꼈으나 치아가 없을 때 아부-, 꺄아- 같은 소리를 자주 냈더니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나는 시녀가 떠먹여 주는 이유식을 먹으며 외전 내용을 떠올렸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적발, 신록을 담은 싱그러운 녹안이 상징인 아르덴타인 공작가.
제국의 단 하나뿐인 공작가로서 귀족 중 가장 높은 신분.
즉, 다이아몬드 수저!
장남인 에리얼과 장녀인 아리엘. 둘은 이란성 쌍둥이였다.
이름도 외모도 인어공주를 쏙 빼닮은 아이들이었다. 작가가 모 애니메이션을 보고 따온 거겠지. 하지만 쌍둥이는 인어공주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였었다.
에리얼은 여주인공 때문에 반란까지 일으키는 서브 남주이자 악역.
아리엘은 남주인공인 황태자를 사랑해서 여주인공을 질투하고 시련을 주는 악녀이다.
소설 읽을 때는 쌍둥이가 하는 짓도 똑같다며 욕했는데 외전에서 그들이 애정을 갈구하고 집착한 이유는 부모님에게 방치되고 유일하게 돌봐주던 사촌이 그들을 배신하고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지금 나인 거고!’
그들이 흑화한 이유가 모두 나 때문이란다.
나는 원래 전 아르덴타인 공작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마차 사고로 공작 부부가 돌아가셔서 하루아침에 고아가 됐다.
이어 동생이었던 현 공작이 아르덴타인가를 물려받고 나를 거뒀다고 한다.
‘현 공작과 공작부인의 사이는 사교계에서 유명할 정도로 안 좋지.’
나를 거뒀을 때 이미 임신 중이었던 공작부인은 쌍둥이를 낳고 건강이 좋지 않다며 별장으로 내려갔다.
공작은 양육자로서 모든 것을 지원했으나 애정이 없었다. 부모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 유모와 함께 자란 사촌이 쌍둥이의 부모이자 친구였다.
‘그런데 내가 쌍둥이를 질투해서 유모를 모함해 죽이고 나도 자살해서 죽지.’
유일하게 사랑을 주던 사람이 동시에 사라지는 절망감.
거기다 나는 죽으면서까지 저주를 내뱉고 죽었다.
‘온전히 너희를 사랑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라니 너무하잖아.’
기계적으로 입을 움직이고 있었는데 상념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먹었으면 이제 낮잠 잘까요?”
언제 다 먹었지?
소설 스토리를 생각한다고 이유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가 웃으며 나를 침대에 눕혔다.
아직 유모는 들어오지 않았다.
공작부인이 별장으로 내려간 것도 며칠 전이니 곧 들어올 것이다.
나의 목표는 쌍둥이를 사랑으로 키워서 흑화하지 않게 만들기!
사실 전생에 유치원 선생님이었으나 자신이 없었다.
교육과 육아는 차원이 달랐으니.
하지만 책임감은 있었다.
내 마지막도…….
‘엄마랑 아빠는 많이 슬퍼했겠지. 주말에 오랜만에 친구들 보기로 했었는데. 마지막으로 못 본 게 너무 아쉬워.’
나는 마지막까지 선생님의 사명을 다했다.
소풍을 갔다 오는 길. 버스 사고가 났다. 브레이크에 이상이 있었는지 커브에서 도로를 이탈한 버스는 산길을 굴러 호수에 떨어졌다.
정신없는 와중에 비상 망치로 창문을 깨서 아이들을 밖으로 보냈다. 안전벨트를 한 명씩 다 풀어야 했기에 시간이 걸린 것이 문제였다.
마지막 아이까지 밖으로 보냈지만 나는 탈출하지 못하고 버스와 함께 가라앉았다.
‘에이. 전생은 그만 생각하자!’
나는 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전생만 생각하면 미련만 잔뜩 남았기에.
그렇게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태어났다.
놀랍게도.
무슨 원리인진 나도 모른다.
그냥 눈을 떴더니 아기가 되어있었다.
‘어차피 과거는 바꿀 수 없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미래뿐!’
고사리 같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다짐했다.
이곳이 아무리 소설 속이라지만 난 살아남으리라!
***
“언니 오늘은 인형놀이해요!”
“안 돼! 누님은 오늘 나랑 전쟁놀이할 거야.”
요람에서 새근새근 자던 쌍둥이는 무럭무럭 자라서 벌써 5살이나 되었다. 그들은 공작과 공작부인의 사랑은 못 받았으나 나와 유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오늘은 날씨도 좋은데 피크닉이나 갈까?”
“피크닉이라고 해봤자 정원에 갈 거죠? 저번 주에 갔잖아요.”
“싫으면 너는 가지 마. 나랑 언니랑 둘이 갈게.”
“뭐? 누가 싫다 했어! 그냥 나는 더 멀리 가고 싶다는 거지.”
꼬맹이들은 자기주장을 열심히 하며 내 옆에 붙어있었다.
생김새는 똑같지만 머리카락 색이나 눈 색이 아주 미묘하게 다른 쌍둥이는 예쁜 녹안을 반짝이며 내게 물었다.
“누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요?”
맞추지도 않았는데 동시에 말하는 쌍둥이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나는 아리엘이랑 에리얼이랑 함께 있는 것만으로 너무 좋아서 아무 생각도 안 드네.”
“정말요?”
“정말요?”
“응. 정말로.”
소파가 출렁이며 두 아이가 내가 안겼다.
나는 자연스럽게 쌍둥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니면 오늘은 여기서 책 읽을까?”
“언니가 읽어주신다면 저는 좋아요.”
“저는 영웅소설이 좋아요!”
“싫어. 매일 싸우기만 하잖아. 나는 사랑 이야기가 좋아.”
똑같이 생겼으면서 취향은 정반대인 쌍둥이는 갑자기 방을 나가더니 서로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들고 왔다.
에리얼이 들고 온 책은 ‘아슬란데 영웅담’. 아슬란데 제국의 초대 황제 이야기를 동화로 풀어낸 책이었다.
아리엘이 들고 온 책은 ‘비밀의 기사와 유폐된 공주’라는 로맨스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