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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을 살짝 훑어보니 그림도 없는 본격적인 장르 소설이었다.
‘이걸 어디서 구했지?’
보통 성장기 소녀들이 읽을 법한 소설인데. 5살은 너무 빠르지 않나.
“아리엘 이 책은 어디서 가져왔니?”
“시녀가 읽고 있었는데 표지가 예뻐서 달라고 했어요.”
“그렇구나. 이 책은 조금만 더 크면 읽는 걸로 나랑 약속하자!”
“왜요?”
순진무구한 눈으로 왜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이유를 대려면 많았지만 5살이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하고 명확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는데 아리엘은 생각보다 가볍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언니가 그렇게 말한다면 약속할게요.”
“으, 응. 고마워.”
어째서 네가 더 어른스러워 보이는 걸까.
나는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의 부족함을 탓했다.
“고마우면 뽀뽀해주세요!”
“어? 뽀뽀?”
“네. 언니. 어릴 때는 자주 해주셨는데 요즘엔 안 해주시잖아요.”
시무룩하게 눈썹을 축 늘어트리고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말했다.
왜 내가 나쁜 짓 한 거 같지?
아리엘이 말하는 어릴 때란 정말 아기 때였다.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원래 아이를 좋아하는 나는 상상 이상으로 예쁘게 자라는 쌍둥이를 보니 ‘소설의 악역이 되지 않도록 키워야지!’라는 목표가 희미해지고 ‘와, 와, 진짜 감탄밖에 안 나올 정도로 귀엽다! 진짜 천사!’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해버렸다.
‘결론은 웃을 때마다 뽀뽀하고 쓰다듬고 물고 빨았다는 뜻.’
그러다가 4살쯤 공작가의 집사 데인이 그런 행동은 자제해달라는 부탁을 받아 그만뒀었다.
“치사해! 저도 해주세요!”
옆에서 듣고 있던 에리얼도 아리엘을 밀치며 칭얼거렸다.
아리엘은 에리얼을 한번 노려보더니 내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여기서 빼기도 그렇고. 애들이 좋아하면 가끔은 괜찮겠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이야.”
나는 검지를 입에 대며 쌍둥이에게 소곤거렸다.
아이들의 성장에 적당한 스킨십은 필요했으니.
두 아이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나를 따라 검지를 대며 ‘비밀이에요!’라고 말했다.
나는 귀여운 쌍둥이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랑스러운 나의 아이들.
작은 해프닝이 지나가고 결국은 내 방에 있던 동화책을 읽는 걸로 결정이 됐다.
내용은 떠돌이 마법사가 이곳저곳 여행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무난한 동화였다.
나는 유치원에서 갈고 닦았던 구연동화 실력을 뽐냈다.
“그때 오크가 나타났어요! 취익-췩. 인간 죽여라 췩!”
실감 나게 오크 연기를 하자 쌍둥이는 무서운지 내 소매를 꼭 움켜쥐었다.
아직 어린아이에게 몬스터는 미지의 영역이며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니.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더 열연을 펼치고 있었다.
덜컥.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공작가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노크를 하고 문밖에서 묻는다. 그런데 인기척도 없다가 갑자기 문이 열려서 쌍둥이가 바짝 얼어붙었다.
끼익하고 열리는 문틈으로 몬스터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기에.
“문밖까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군.”
방 안의 온도가 영하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몬스터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등장했으니.
“죄송합니다. 공작님.”
쌍둥이는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너희들.”
공작가의 최종 보스는 서늘한 녹안으로 쌍둥이를 훑었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양 소매에서 느껴지는 떨림이 심해졌다.
숨 막힐 듯한 분위기에 내가 입을 열려던 찰나 공작이 먼저 말했다.
“가문의 수준에 맞게 행동하도록.”
할 말을 마친 공작은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닫았다.
얼어붙었던 공기는 공작의 발소리가 복도 너머로 사라질 때쯤 겨우 풀렸다.
‘내가 펼친 열연을 들은 건가.’
언뜻 쌍둥이를 질책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나에게 하는 소리였다.
‘무뚝뚝하고 남에게 관심 없는 공작님의 발걸음을 멈출 정도로 뛰어난 오크 연기였나.’
한동안 잊고 있었던 현타와 하필 그걸 들은 공작에 대한 원망이 동시에 느껴졌다.
수치는 내 몫인 거지?
부끄러움을 애써 외면하며 쌍둥이에게 사과했다.
“괜찮아? 미안해. 나 때문에 괜히 너희까지 혼났네.”
쌍둥이는 공작이 갑자기 들어와서 많이 놀랐는지 아직 얼어있었다.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책을 덮었다.
충격을 없애는 데는 달콤한 것이 최고였다.
나는 쌍둥이의 차갑게 식은 손을 잡아당겼다.
그들은 완전 넋을 놨는지 내가 끌고 가는 대로 따라왔다.
길 가다 마주친 시녀에게 간식을 부탁했다.
“온실에 달콤한 초코케이크랑 따뜻한 우유 준비해줘.”
“네. 알겠습니다.”
우리는 천천히 걸어서 온실에 도착했다.
식물이 내뿜는 신선한 산소를 마시니 마음이 편해지는구나!
쌍둥이도 녹색을 봐서 마음이 진정됐는지 얼빠졌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갑자기 공작님이 나타나서 놀랐니?”
“……네.”
“생일 때도 안 오셨으면서.”
에리얼은 투덜거렸다.
아리엘과 에리얼은 귀족들이 으레 하는 생일 파티 한번 해본 적 없었다.
소소하게, 정말 소소하게 친한 시녀들과 집사 데인, 유모와 나 이렇게 모여서 조촐하게 케이크 촛불을 불었다.
그마저도 공작은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사실 쌍둥이가 태어나고 공작과 얼굴을 마주한 적은 손에 꼽았다.
더군다나 오늘처럼 우연히, 예고도 없이 나타난 건 처음이었다.
“초코케이크와 따뜻한 우유입니다.”
타이밍 좋게 유모가 간식을 들고 온실에 왔다.
따뜻한 우유를 홀짝이던 아리엘이 얼어붙었던 손을 녹이며 조심스럽게 입을 오물거렸다.
“아버지는……. 저희를 싫어하는 걸까요.”
그녀의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어딘가 단념이 섞인 말투였다.
“아니야. 공작님은 너희를 싫어하지 않아.”
단호하게 말했지만 나도 그의 마음을 몰랐다.
소설에는 등장도 하지 않은 인물.
정확하게 파악할 순 없으나 공작은 쌍둥이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맞아. 아버지는 우리를 싫어하지 않아. 아예 관심도 없을 뿐.”
에리얼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이번엔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어렴풋이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아이들에게 상처가 될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의 커다란 눈망울에 물기가 차올랐다.
울고 싶지 않은지 입술을 앙다문 채 눈가가 빨개지도록 눈 한번 깜빡하지 않았다.
“아리엘…….”
아이들은 죄가 없었다.
이렇게 슬퍼하고 상처받을 이유도 없었다.
어른들의 욕심으로 인해 태어난 쌍둥이는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존중받지 못하고 그저 공작가의 부품처럼 다뤄졌다.
장차 아르덴타인 공작가를 이을 에리얼은 말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영재교육을 받았다.
아리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아르덴타인에게 이득을 줄 가문과 결혼해야 한다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렇게 쌍둥이들은 공작처럼 딱딱하고 기계적이며 감정은 쓸모없는 것이라 여기는 선생님들에게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지금도 그런 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나마 나와 유모가 쌍둥이에게 감정을 가르쳐주려고 노력했고, 집사 데인이 보조했다.
‘데인도 피 한 방울 안 흘릴 것 같은 얼굴이면서 속정이 많아서 공작님이랑 쌍둥이에 대한 걱정이 장난 아니었지.’
공작가에서 가장 나이 많은 데인은 공작이 어릴 때부터 그를 보필했다고 하니 공작에 대한 애정은 부모만큼이나 애틋할 것이다.
“저는 괜찮아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그렇게 말해봤자 아무도 안 믿는다고.
그녀의 옆에 있던 에리얼도 울먹이는 동생을 보고 동화됐는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눈물을 흘리는 쌍둥이를 꼬옥 끌어안았다.
쌍둥이는 고작 5살이었다.
한국이었다면 태평하게 어리광부리고, 사랑을 듬뿍 받아야 할 시기.
그런 아이들이 부모님에게 사랑받지 못해 울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같이 아팠다.
물론 세상에 쌍둥이보다 더 험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 앞에 있는 아이들이 고통받는 모습은 그저 지켜만 볼 수 없었다.
나는 쌍둥이를 달래면서 결심했다.
“내가 공작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올게.”
“네?”
“누님이 왜…….”
내가 진심으로 쌍둥이를 사랑해주고 자식처럼 키워도 진짜 부모는 될 수 없다.
사촌이라는 유대감이 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들에겐 부모의 사랑이 필요하다.
그러니 내가 쌍둥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했다.
“너희를 사랑하니까.”
나는 해맑게 웃었다.
이번 생의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셔서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전생에 받은 사랑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화목한 가정이었지.’
부모님은 언제나 날 사랑해주셨고, 무슨 일이든 내 선택과 의견을 존중해줬었다.
오빠는 티격태격하면서도 나를 챙겨줬었다.
그랬기에 힘든 사회생활도 버틸 수 있었다.
‘축복이었어.’
정말 축복받았었다. 아주 당연하지만 너무 당연해서 감사하지 못했다.
죽고 나서야 그 사랑이, 보호가, 믿음이 얼마나 소중했던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랬기에 아이들에게도 주고 싶은 것이다.
‘내가 받았던 사랑을.’
쫓겨나진 않겠지. 얹혀살면서 주제 파악도 못 한다고.
‘얼음 같은 공작님이라면 내 말을 그냥 무시할 수도.’
나는 행복회로를 돌리기로 했다.
쫓겨나면 뭐라도 먹고 살겠지. 대학생 때 다양하게 했던 아르바이트를 떠올렸다.
무시하면 반응할 때까지 말하고.
다소 충동적이며 즉흥적인 행동이었다.
나는 울고 있는 쌍둥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일어섰다.
“갔다 올게.”
비장함이 어린 목소리였다.
쌍둥이는 눈물을 머금은 눈동자로 그저 멍하니 바라만 봤다.
말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런 쌍둥이를 온실에 놔두고 데인을 찾았다.
아무리 막무가내라지만 다짜고짜 집무실로 찾아가기엔 담력이 부족했다.
“데인, 지금 공작님을 뵐 수 있을까?”
“공작님을요?”
“응. 할 말이 있어서.”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내가 공작을 찾는 게 의외였는지 데인답지 않게 되물었다.
나는 응접실에서 기다렸다.
바쁘다고 하면 어쩌지. 그냥 집무실로 직행해서 부딪힐걸 그랬나.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데인이 예상보다 빨리 돌아왔다.
“집무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으, 응.”
집무실로 안내한다는 걸 보니 공작이 허락한 거 같은데 이제야 긴장감이 밀려왔다.
쌍둥이가 공작을 무서워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