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3화 (3/123)

-3-

나에게 공작은 직장 상사 같은 느낌이었다.

‘원장님이랑 면담하는 기분인데.’

데인이 집무실 앞까지 안내해 줬다.

공작가에 살며 자주 지나다녔지만 용건이 있어서 집무실에 들어가긴 처음이었다.

후, 괜찮아. 나는 심호흡을 하고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와.”

데인이 고개를 숙이며 문을 열어줬다.

처음 들어가는 가는 집무실에선 희미한 잉크 냄새와 펜이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내가 들어가도 공작은 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서류를 보고 있었다.

사각사각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렸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니 긴장이 풀렸다.

‘이 맛에 친구들이 ASMR을 들은 건가.’

ASMR을 좋아하는 친구가 떠오르자 살짝 웃음이 났다.

“무슨 일이지.”

딴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서류정리를 끝냈는지 공작은 펜을 내려놓고 내 얼굴을 빤히 보며 말했다.

“아리엘과 에리얼에 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주제넘은 참견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주제넘은 참견이라.”

공작은 내 말을 끊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내 얼굴을 보며 생각에 잠긴 공작과 눈을 마주 보고 있으니 새삼 그의 미모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나른하게 내리깐 눈과 긴 속눈썹은 소설 속에나 등장하는 비유라고 생각했는데. 아 소설 속이라 이런 사람이 존재하는 건가.

‘퇴폐미 최고!’

에메랄드 보석을 닮은 녹색 눈동자에 호기심 어린 빛이 서렸다.

“에리얼과 아리엘의 사촌이며 나의 조카. 인 관계에서 주제넘은 참견을 하려면 어떤 건지 궁금하군.”

마침표 이상한데 찍으며 강조하는 공작을 보자 다시 긴장감이 돌아왔다.

선을 긋는 건지 선 안으로 들인 건지 애매모호한 화법이었다.

‘괜찮아. 나는 7살이다. 가벼운 헛소리 정도는 봐주지 않을까.’

스스로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설마 어린아이를 내쫓겠냐!

“흠, 다름이 아니라 아리엘과 에리얼은 아직 5살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이 필요할 시기죠. 공작가의 일로 바쁘시다는 것은 알지만 가끔씩은 아이들과 티타임이라도 가졌으면 합니다.”

목을 가다듬고 응접실에서 기다리며 생각했던 대사를 매끄럽게 뱉었다.

공작가에서 사랑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을 뽑으라면 입을 모아 공작님이라 대답하겠지.

그런 사람에게 자식을 사랑하라고 말해도 이해 못 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사랑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마주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공작님이 웃으면서 사랑한다고 하면 쌍둥이도 놀랄 거니까.’

왠지 겁에 질린 쌍둥이의 얼굴을 떠올렸더니 또 웃음이 났다.

“……너는.”

나를 지긋이 보던 공작이 말을 하다가 멈췄다.

마치 생각을 표현할 단어를 못 찾았다는 듯이.

“쌍둥이가 시킨 건가? 사랑을 받고 싶다고?”

“아니요. 저 스스로 판단한 일입니다. 아이들에겐 관심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주위에 아이들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많다 하더라도 부모님에 비교할 바는 아니죠.”

“그 아이들은 장차 아르덴타인을 이어받을 아이들이다. 어리광을 받아줄 수 없다.”

공작은 건조하게 말했다.

쉽게 수긍할 거라곤 생각 안 했지만 공작은 예상보다 더 감정이 메말라 있었다.

나는 말을 골랐다. 어떻게 말해야 그가 이해하기 쉬울까.

“단순히 어리광을 받아 주는 게 아니에요. 씨앗이 발아할 때 토지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영양이 풍부한 토지에서 자란 식물은 건강하게 자라고, 황폐한 토지에서 자란 식물은 약하죠. 부모는 아이들의 토지입니다. 씨앗이 뿌리를 내릴 양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과한 영양분은 식물을 썩게 만들지.”

와우. 공작님 강적인데.

그는 내 비유를 이해했으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좋아요. 그럼 거래를 해요.”

“거래?”

나는 최후의 수단을 꺼내 들었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안 된다면 서로의 이득을 위한 거래를 하는 것이다.

“네. 공작님은 가문을 이을 쌍둥이가 다른 귀족들보다 현명하고 똑똑하고 강하게 자랐으면 하겠죠.”

“…….”

공작은 대답을 하지 않았으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교육에서 중요한 건 당근과 채찍! 공작님처럼 채찍만 휘두르면 언젠가 망가질 거예요.”

소설 속에 서술됐던 쌍둥이처럼.

사랑을 받아 본 적 없었기에 주는 법도 몰랐던 아이들.

아이들은 삐뚤어진 사랑밖에 할 줄 몰랐다.

“…….”

공작가에 무른 녀석은 필요 없다고 말할 거 같은 공작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치던 그는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로엔과 같은 말을 하는군.”

공작의 눈은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지만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건 내가 아니었다.

먼지가 가득 쌓인 오래된 앨범에서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꺼낸 느낌이었다.

‘어머니의 이름.’

어릴 때 자주 들었던 이름이었다. 시녀들과 데인이 나를 보고 어머니를 똑 닮았다고 말했었지. 공작의 입에서 나온 어머니의 이름은 낯설게 들렸다.

“그 정도에 망가질 만큼 약한 녀석을 필요 없다.”

평소의 공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공작님. 말도 당근과 채찍을 받아가면서 교육하는데 공작가의 후계자가 말보다 못한 교육을 받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칭찬을 하면 어리광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더 잘해서 칭찬받고 싶다는 새로운 동기유발이 됩니다.”

아리엘과 에리얼을 말이랑 비교해서 미안하긴 했으나 나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공작이 태클 걸 틈도 주지 않고 계속 말했다.

“당연히 언제나 칭찬을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티타임을 가지며 아이들의 성장을 체크하고 칭찬을 하거나 충고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쌍둥이도 더 열심히 공부하고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프레젠테이션 발표하듯이 내 의견을 말하자 공작이 입꼬리를 살짝 끌어당겼다.

‘뭐지. 비웃는 건가?’

미소라고 하기엔 한쪽만 올라갔는데요!

생소한 공작의 반응에 잘 된 건지 아닌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일리 있군. 하지만 내게 어떤 이득이 있지?”

거래란 서로에게 이득이 생기는 경우 성립된다.

그는 내 이야기에 납득하면서도 일부러 시험해보고 있었다.

“아이들의 성장이 공작님의 이득이죠. 공작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문을 위해서요.”

“그럼, 너에게 이득은 뭐지?”

“쌍둥이가 잘 자라는 것?”

공작의 이득은 바로 말할 수 있었으나 내 이득은 오히려 의문형으로 대답했다.

쌍둥이의 미소를 보는 것. 처음부터 그걸 위해 집무실까지 찾아왔었다. 그렇지만 그대로 대답하면 공작이 이해를 못 할 거 같아서 제외했더니 마땅히 떠오르는 이득이 없었다.

“너는 괜찮은 건가?”

“네? 뭐가요?”

나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공작이 무슨 의도로 말한 건지 이해할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데인에게 말해놓겠다.”

“정말요? 공작님 감사합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공작이 쉽게 허락해서 다행이다!

나는 안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컸기에 수락이 떨어져서 너무 기뻤다.

내가 해맑게 웃으며 공작의 책상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공작의 표정이나 대답도 듣지 않고 재빠르게 집무실에서 나왔다.

“어떠셨습니까.”

“성공했어요!”

집무실을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데인이 물었다. 내가 브이를 하며 성공했다고 하니 데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별 기대가 없었겠지.

“한 달에 한 번은 쌍둥이와 티타임을 가져주신다고 하셨어요!”

“정말입니까?”

“헤헤. 기분 좋네요. 쌍둥이도 기뻐하겠죠?”

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실까지 이동하는 동안 나는 뿌듯하게 웃으며 집무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데인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몇 번이고 되물었다.

“아가씨, 정말 대단합니다.”

진심으로 감탄한 데인의 칭찬에 나는 한층 더 기분 좋아졌다.

이제 쌍둥이에게 이 기쁜 소식만 전하면!

온실에 도착하자 즐거운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쌍둥이는 대화하고 있는지 들어서자마자 그들의 목소리가 온실에 울렸다. 그러나 아까 전과는 분위기가 딴판이었다.

“너 때문이라니까!”

“아니야! 네가 먼저 울먹여서 누님이 가신 거잖아.”

“웃기시네. 나는 참았거든. 엉엉 운 사람은 너겠지.”

“이게!”

나는 상황파악이 안 됐다.

왜 갑자기 분위기 싸움?

“둘 다 뭐 하는 거야?”

“언니!”

“누님!”

내가 다가서자 쌍둥이는 내 품에 와락 안겼다.

“언니 제가 잘못했어요. 아버지에게 사랑 못 받아도 괜찮아요. 언니만 옆에 있어 주시면…….”

“누님 제가 더 잘할게요. 그러니까 여기에 계속 있어 주세요!”

“잠깐. 무슨 소리야?”

나는 쌍둥이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어디로 갈 거라 생각한 건가?

일단 흥분한 쌍둥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나는 계속 여기 있을 거라고 말하고 그들은 앉혔다.

“정말 아무 데도 안 가시죠?”

“그렇다니까! 갑자기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온 거야?”

“에리얼이…….”

“내가 뭐! 나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했을 뿐인걸.”

나는 그들을 달래고 차근히 설명을 들었다.

쌍둥이가 싸운 이유.

“그러니까 내가 쫓겨날 거라고?”

“저, 저번에 일하던 시종이 아버지의 옷자락을 밟아서 나가는 걸 봤거든요. 그래서 혹시 누님도 저희 때문에…….”

에리얼이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시종이 공작님 옷 밟았는데 다른 처벌 없이 나갔으면 다행 아닌가. 다른 귀족들은 뭐 자르고 죽이고 난리던데.

그래도 쌍둥이가 왜 싸웠는지 대충 이해가 갔다. 나도 비슷한 것을 걱정했으니.

“내가 너희들 때문에 쫓겨날까 봐 싸웠구나.”

“언니가 없으면 저는!”

“괜찮아. 별일 없었어. 나는 언제나 여기 있을 거라니까.”

다시 울먹이기 시작하는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이고, 귀여운 녀석들.

나 때문에 싸웠다는 것을 알자 가슴이 찡해졌다.

“그리고 공작님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만큼 매정하지 않으니까.”

“아버지가요?”

“매정 그 자체인데요.”

이럴 땐 쿵짝이 잘 맞네.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는 쌍둥이에게 집무실에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거래 같은 이야기는 빼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