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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6화 (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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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의 붉은 액체를 보며 골똘히 추리하고 있었는데 활짝 열린 문 너머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구두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나는 황급히 커튼 뒤로 숨었다.

지금 옷장을 열기엔 늦었다. 발걸음 소리로 유추했을 때 이 정도 거리면 옷장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추리에서 스릴러로 장르가 한 번 더 변했다. 나는 스릴러 장르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을 최대한 웅크린 후 숨죽였다.

소름! 왠지 커튼 너머로 얼굴을 빼꼼 내미는 순간 칼을 든 범인이 날 죽일 거 같은 느낌!

쿵쿵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이거 그거야? 범인은 사건 현장에 돌아온다는 그거?’

사용인들은 모두 공작이 집합시킨 거 아니었냐고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커튼 너머를 볼지 말지 망설였다.

커튼을 젖히는 순간 THE END가 펼쳐질까 봐 두려웠다.

커튼을 두고 고민하는 사이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베른 부인, 빨래하러 간 하녀들을 부르러 간다 하지 않았소?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죠?”

유모와 다르게 발걸음 소리 없이 나타난 사람은 데인이었다.

“아, 데인 님 혹여 아가씨와 도련님이 보면 놀라실까 봐 가볍게 정리하려고 잠깐 들렀습니다.”

데인 나이스 타이밍!

“공작님께서 아무것도 건들지 말라고 명령하셨을 텐데요.”

“알고 있습니다. 저도 명령을 어기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이 위에 천으로 덮어 두려고 했을 뿐입니다.”

유모의 연기는 감쪽같았다.

그녀가 범인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정말 쌍둥이를 걱정해서 한 행동이라는 믿을 정도로 능청스러운 목소리였다.

“너였나. 베른, 시간을 주지. 자수할 시간을.”

“고, 공작님!”

‘아니 공작님이 왜 거기서 나와요?’

상황은 나 빼고 돌아가는지 이해 안 되는 일이 연속해서 벌어졌다.

공작은 지금쯤 시종들을 추궁하고 있어야 할 텐데.

유모도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는지 공작의 등장이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였다.

“침대를 적신 붉은 액체. 보통은 피라고 생각하겠지만 냄새가 달랐다.”

짐승이세요?

나도 처음에 특유의 비릿한 냄새를 맡고 사람 피는 아니더라도 동물 피일 거라 착각했었다.

“레이프루프의 점액이다.”

“아! 그렇군요.”

옆에 있던 데인이 공작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셜록과 왓슨 콤비 같은 캐미를 보여주는 공작과 데인이었다.

레이프루프라면 나도 잘 알고 있는 식물이었다.

공작가 온실에만 가도 눈처럼 하얀 꽃이 청초한 자태를 뽐내며 피어있기 때문이었다.

“레이프루프의 줄기를 자르면 투명하고 끈적한 액체가 나오지.”

“점액에 물을 부으면 붉게 변해서 평민들이 옷감을 염색할 때 흔히 쓰죠.”

“그래. 거기까지였으면 나도 범인을 몰랐을 텐데. 하지만 넌 실수를 했다.”

오. 그런 설정이 있었군요.

나는 토막 상식을 들으며 흥미진진하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뭐야, 뭐야. 유모가 무슨 실수 했는데.’

공작은 60초 후에 계속이라고 말하는 프로그램처럼 뒷말을 절묘하게 끊었다.

“그건.”

“그건?”

‘그건?’

데인도 궁금한 기색이 듬뿍 묻어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공작의 뒷말이 궁금해서 커튼 뒤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쫘악!

고개를 내밂과 동시에 언제 다가왔는지 공작이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왜 여기 있지?”

“!”

내 심장!

진짜 방금 심장이 지하 30층까지 번지 점프했다.

공포영화에서 무서운 장면 끝났겠지 하고 방심하는 순간 기습하는 느낌!

내가 너무 놀라서 어버버하고 있자 공작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쌍둥이와 함께 있으라고 했을 텐데.”

“그게 어, 저에게 일어난 일이니 뭐라도 돕고 싶어서…….”

나는 횡설수설하면서도 머리를 열심히 굴려서 변명했다.

한참이나 나를 뚫어져라 보던 공작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미덥지 못한 건가?”

“네? 공작님이 미덥지 못하냐고요? 그럴 리가 있나요. 칼보다 무섭게 일 처리 하시는 걸로 유명한 공작님인데.”

“…….”

심장이 떨어진 후유증이었을까. 간도 배밖에 나와 버렸다.

평소라면 속으로 생각만 하고 참을 내용을 필터링 없이 그대로 말했다.

3초 뒤 내가 내뱉은 말을 인지하자 이번엔 뇌가 정지됐다.

껄끄러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데인도 뭐라고 커버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지 발만 동동 굴렀다.

“치, 칭찬이에요!”

예전에 어디서 봤을까.

말실수를 했을 때 좋은 뜻으로 한 말이라고 덧붙이면 90%는 무사히 넘어갈 수 있다고 했었는데. 지금이 그 10%가 되진 않겠지?

솔직히 일 잘한다고 했으니 칭찬 아닌가? 16살짜리 여자애에게 들으면 조금, 아주 조금 기분 상할 수도 있지만. 아니 ‘칼보다 무섭게’라는 비유를 왜 썼을까.

그냥 믿고 있다고 했으면 됐을 텐데 쓸데없이 사족을 붙여서는.

이미 저질러버린 입을 원망하며 나는 공작을 향해 해맑게 웃었다. 최대한 무해해 보이는 얼굴로.

“다행이군.”

공작의 한마디에 나는 안도했다.

다행이라는 것은 살려주겠다는 뜻이겠지. 다음부턴 말조심해야지. 새로운 교훈을 가슴에 새긴 나는 아직도 쿵쿵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공작의 주위를 돌렸다.

“그래서 대체 유모의 실수는 뭔가요?”

내 질문에 데인도 호기심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공작의 대답을 기대했다.

공작은 그런 나와 데인을 번갈아 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렸다.

‘나왔다! 공작님 특유의 장난꾸러기 웃음!’

공작과 처음으로 거래를 하던 날 보여줬던 웃음은 이젠 자주 보여준다.

예전엔 비웃는 거 같아서 기분 나빠했는데 시간이 지나며 알 수 있었다.

저 미소는 재밌는 걸 발견했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불길한데.’

저렇게 웃을 때면 늘 나에게 불똥이 튀었기에.

“세르니아.”

“네.”

“마법과 관련된 책을 자주 읽는다지.”

어떻게 알았지. 내 독서 기록이 공작에게 전달되고 있었던 건가!?

어디까지 들었을까. 내가 요즘 꽂혀있는 장르까지 아는 건 아니겠지.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딱히 혼내려던 건 아니었다.”

그렇게 말해도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는 예전에 아리엘에게 압수한 로맨스 소설을 심심풀이로 읽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재밌었다!

전생에도 로맨스 덕후였으니. 이곳의 일반적인 로맨스 소설은 로맨스 판타지 그 자체!

‘로판 장르는 ‘신유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여기서 읽은 장르 소설이 다 신선하게 느껴져서 멈출 수 없었어.’

로판 장르에 막 눈을 뜰 때쯤 죽었기에.

나는 압수한 책을 다 읽고 아리엘에게 물어서 시녀에게 책을 더 구해달라고 비밀리에 부탁했었다. 아리엘의 치장 담당인 마리는 곤란하다고 하면서도 늘 책을 구해줬다.

‘서로 감상평까지 나눌 정도로 절친인데. 마리를 믿자. 내 취향을 지켜 줬을 거야.’

거기다 공작은 마법책이라고 했으니 쌍둥이처럼 집사 데인이 티타임 칭찬용으로 알려 준 것일 수도 있다!

나는 혼자 합리화를 끝내고 공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데인에게 들었다. 서재에서 종종 마법과 관련된 책을 읽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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